기자명 이선영 기자 (sun3771@skku.edu)

지난 13일,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그 날이 올해도 어김없이 밝았다. 항공기 비행 전면 통제, 공사 일시 중단, 3만여 명의 경찰 인력과 4천여 대의 차량 동원…. 국가적 긴급 보안작전을 방불케 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수많은 카더라 에피소드들이 쏟아지는 이례적인 날. 굳이 말 안 해도 알겠지만 바로 대한민국 고3들의 영원한 D-day ‘수능’이다. 오죽하면 외신들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수능일은 한국 전체가 시험보는 날”이라고 보도했을까. 그만큼 우리에게 수능은 인생의 중대한 전환점이다. 물론 할 수만 있다면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다. 하지만 수능대박→명문대학 입학→상류층 진입→값비싼 자녀교육→수능대박으로 이어지는 쳇바퀴가 한국사회의 숙명인데 어찌 그 흐름을 부정할 수 있을까.

그런데 같은 13일, 시험장 밖에서는 조금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수많은 수험생들이 긴장감 속에 머리를 싸매고 있는 동안 정부종합청사 앞에는 한 명의 수험생이 숨 막히는 고사장으로부터 빠져나와 있었다. 이 학생은 앞으로 자신은 정규직이 아니라 비정규직의 길을 가겠지만, 모순된 입시현실 속에서 더 이상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며 “지금 난 여러분들의 동정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의 분노가 필요하다. 청소년의 부조리한 현실을 바꾸는 행동이 필요하다”고 당당히 선언했다. 이를 두고 괜히 공부하기 싫어서 저런다는 식의 아니꼬운 시선이 오고갈 안타까운 상황도 상상이 가지만 학벌사회에 정면으로 부딪힌 용기와 대담함까지 비하하는 일은 없길 간절히 바란다. 12년의 입시를 마무리 짓는 마침표를 스스로 포기하면서까지 이토록 주체적인 결정을 한다는 것은 이미 사회에 순응해 버린 우리들이 하지 못한 위대한 결정이었다.

이 학생의 당돌한 선언은 많은 교육단체들이 모인 ‘2008 경쟁교육반대, 입시폐지 대학평준화 전국 공동 행동 선포’ 기자회견에서 발표된 것이다. 수능의 반대편에 선 이들이 “우리 아이들 제발 죽지 않도록 도와주세요”라며 강력히 주장하고 있는 방안은 ‘대학입학자격고사’. 이는 프랑스의 바깔로레아 시험처럼 정상적인 공교육과정 수준에서 입학 자격여부만 판별하는 시험으로, 성적을 산출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처럼 모든 수험생이 무한경쟁 속에 뛰어들지 않아도 된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이제 대학생들이 할 일은 ‘간판 따고 안주하는’ 생활이 아니라 4년간 진짜 ‘공부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목소리들이 공고한 입시제도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까. 대학입시 전면 자율화만을 외치고 있는 현 정부 아래에서 학부모 등급제라고까지 불리는 수능의 힘은 더 강화될 일만 남은 듯 보인다. 그러나 최상위층을 제외한 전 국민에게 학벌 콤플렉스를 선사하고 대학생들을 점점 바보로 만들고 있는 지금의 대학서열체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다면, 한 고3 학생의 용기 있는 외침처럼 이 사회에 따끔한 일침을 놓을 수 있는 배짱이 우리에게 필요한 때가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