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하진(유동08)

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인문학이라는 말을 들으면 대학생들은 어떤 장면을 가장 먼저 떠올릴까. 아마 두꺼운 안경을 쓰고 어두컴컴한 방에서 세상과 단절된 채 책만 읽는 학자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인문학을 전공하는 나조차 그런 상상을 하는데 다른 대학생들은 오죽할까. 이렇듯 인문학을 실용적인 ‘산 지식’ 이 아니라 ‘죽은 지식’으로 치부하던 나에게 성대신문 2008년 12월 15일자 7면에 있던 인권실천시민연대 오창익 국장의 인터뷰는 큰 깨달음을 주었다.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실용적인 기술이 아닌 인문학을 가르친다는 파격적인 발상은 놀랍게도 구상단계를 넘어서 이미 실현되고 있었다. 결국은 어떻게 ‘먹고’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 가 중요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생각이 보편화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정계의 고위층 간부들이나 재력가들 사이에서 부정부패가 끊이질 않고 ‘노블레스 오블리주’ 문제가 화두로 떠오르는 게 아닐까 싶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사회적 의무를 다해야할 사람들조차 인문학을 경시한다는 사실이 부끄럽기도 했다. 그래도 사회적 약자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침으로써 그들이 깊은 사유를 바탕으로 스스로 대책을 강구할 수 있는 힘을 얻게 한다는 취지는 그들로 하여금 진정한 의미의 자립을 할 수 있게 돕는 것으로, 찬사 받아 마땅하다.

이 기사야 말로 취직이 잘되는 인기 학과들만을 선호하고 인문학 수양에 비중을 두지 않는 대학생들에게 꼭 필요한 정보가 아닐까 싶다. 우리 스스로의 사유를 바탕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실용학문은 결국은 또 하나의 죽은 지식이나 마찬가지일 뿐이다. 우리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나 대세에 따라서 배운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학문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가 이루어지는 대학생시절이야 말로 사유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인문학이 꼭 필요한 것이다.

학교 홈페이지에 올라온 내용을 종이로 옮긴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지레 짐작해 그동안 성대신문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기사를 읽은 후 신문에 깨달음을 주는 좋은 글이 담겨 있음을 알았다. 앞으로 신문을 통해 내 사유 폭을 더 넓힐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