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가작 - 손소은 (법 08)

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우선, 이야기의 시작은 아주 아주 이른 시각부터여야 할 것 같다. 이렇게 빙 돌려 말하는 것이 싫으면 중간 즈음부터 읽어도 좋아. 사실 무슨 말부터 써야 할까 고민하던 중이었는데 펜을 들기 전 몇 시간의 기억이 너무도 생생하거든. 그래, 그 부분부터 조금씩 써 내려 가면 막힘없는 완벽한 안부를 전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시작은 4시 50분으로 하자. 역 앞에 차를 세워둔 채, 엄마와 나는 피로와 서로에 대한 지겨움에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단다. 하필이면 라디오는 근엄한 목소리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스러움을 논하고 있었다. 너도 기억할 것이다. 몰래 교회 가서 중국요리를 얻어먹고 왔는데 들키는 바람에 엄마에게 맨발로 쫓겨났던 적. 유독 그 날, 자장면과 탕수육이 그토록 천박한 음식으로 전락해버린 것에 대해 영문 모르고 밖에서 떨며 추워했었다. 

  엄마가 그야말로 신경질적으로 라디오를 껐다. 엄마가 기독교방송을 듣는 건 7시, 추억의 팝송을 틀어주는 프로그램이 진행될 때뿐이다. 너도 알다시피 교회를 미워하는 나의 어머니에게는 이렇다할 종교가 없었다. 초파일에는 절에 가서 등을 켜고 우리 자매를 모두 수녀가 운영하는 유치원에 보냈지만 모두 지극히 이기적 차원에서 양쪽을 이용했을 뿐이었다. 지금도 각봉스님과 젬마수녀 둘 모두와 연락을 하고 그 둘은 때때로 집까지 찾아오기도 한다. 각자가 다른 방식으로 축복을 내려주고 가는 거야. 어쩌면 그래서 집안 전체에 괴이한 분위기가 감도는지도 모르겠다. 스님과 수녀가 동시에 아름다운 말을 쏟아내고 간 집이니 오죽하겠니. 물론 그 둘이 동시에 마주친 적은 없다. 그 점에서 엄마는 무척 치밀한 편이다. 

똑똑한 사모님, 아니 요즘은 ‘이사님’이라고 불리고 싶어 한다는 걸 들었다. 직원이래봐야 손가락에 꼽는 코딱지만한 소기업체에서 이사님이 얼마나 필요하겠느냐마는. 어쨌든 그날 새벽, 이사님은 때때로 내 옆에서 긴 한숨을 내쉬었지만 절대 편안한 숨은 아니었다. 허파에서 내쉬는 것이 아니라 코로 후욱 뿜어져 나오는 짜증을 알 것이다. 아빠 차는 시트가 푹신한 편인데도 등이 뻣뻣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내키지 않으면서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이 처량해 샌드위치를 꺼냈다. 잇몸 가득 신선할 뿐만 아니라 너무 찬 바람에 냉정하기까지 하더라. 불편한 정적과 바깥은 더 추울거라는 생각에 어깨가 더욱 뻐근해졌다. 난 가끔 모든 긴장을 어깨로 느낄 때가 있다. 그 순간은 꾸역꾸역 샌드위치를 구겨 넣으면서 불과 반나절하고 하루를 함께했을 뿐인데 마음의 벽이 한층 높아진 것에 대해 생각하던 중이었다. 아마 우리 모녀의 취향이 떨어져 있는 몇 개월만에 너무도 달라져서였던 것 같다. 엄마는 내 아슬아슬한 십 센티 짜리 구두와 각이 반듯하게 잡힌 핸드백을 경멸했다. 또 내가 다니는 작은 정문과 작은 캠퍼스를 가진 학교를 싫어했고 자취방에 토스터와 나이트램프를 사두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우리는 작은 것부터 이맛살을 찌푸리기 시작해서 이렇게 찬 새벽, 차 속에 나란히 동결되어 있었다. 

  “내려, 이제 타나보다.” 엄마는 탑승이 시작됐는지 확인하지 않고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는데 ‘다녀올게.’라는 말을 하기에 비굴한 느낌이 들어 가능한 한 빠른 동작으로 짐을 낚아채 차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그럴수록 동작이 서툰 법이다. 쾅 하고 차문을 닫고 보니 차라리 태연하게 ‘다녀오겠습니다.’하는 것이 더욱 어른스러웠을 텐데 하는 후회가 조금 들었다. ‘난 아빠가 뭐라고만 하면 눈물이 나.’라고 여린 목소리로 실토하던 너도 참 귀여웠지. 나는 돌이켜보니 그때 그 와중에서도 귀엽기엔 어쩐지 애매한 나이가 되어 있는 것 같았다. 물론 너도 나도 지금 이 시점은 어떤 경계선 상에서 서 있는 거야. 마음 내키면 어린 시늉이야 못 할 바도 아니었으나 또각또각 구두소리가 그럴 마음을 흩어놓을 때가 있지 않던? 가능한 한 반듯하게 걸으려고 노력하고 표를 보여 줄 때는 더욱더 꼿꼿한 척을 했다. 검표원이 얼굴을 힐끗 쳐다보았다. 이런, 뭔가 어색하긴 했던 모양이다.

5시 25분에 출발하는 용산행 열차를 이용하실 승객들께서는 지금 곧 탑승해 주시길 바랍니다. 안내방송이 플랫폼을 왕왕 울렸다. 새벽이라서 진이 빠져있어 그런지 소리가 귓속 가득 울렸다. 양손 가득 짐을 싸들고 걷는 내 뒷모습이 위태위태하다고 생각했다. 왜 걸어가면서도 뒷모습을 떠올렸을까. 지금 생각해보니 이치에 맞지 않아.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도 같았지만 누가 들어주겠다고 나서면 잔뜩 날을 세워 거절해야지 하고 마음속으로 희미하게나마 야무진 척을 했었다. 그 마음이 너무 우습지. 하지만 새벽,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스스로의 문제에만 마음을 곤두세우느라 나는 그냥 길을 막는 한심한 존재였다. 

통로측 역방향 좌석인 건 뒤늦게야 알았다. 차멀미 같은 건 하지 않으면서도 어쩐지 어깨의 긴장이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이대로 출발하면 누가 뒤에서 머리채를 확 잡아끄는 기분일 것만 같아 자리에 앉기가 주저되더라. 우주선 타는 것도 아니면서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해야 했다. 사실 나는 KTX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사람을 태우고 달린다기보다는 실어 나르는 꼴인 것 같아서. ‘팬아메리칸에어라인을 타면서 현대 문명 저주하는 바라문 승려’처럼 지금 와서 기계문명 저주하는 것은 웃기지도 않는 소리지만 유독 이 최첨단의 운송수단은 비인간적이다. 가야금 소리가 뚝 끊기면 불쾌한 금속음을 내는데 왠지 거기엔 출발의 설렘이 없는 듯 해. 

난 그냥 꼼짝없이 세 시간 가량을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시트는 충분히 뒤로 젖혀지지도 않아서 잠을 자려면 고개를 이상한 각도로 비틀어야 했다. 어쩌면 그게 이렇게 내가 펜을 들게 되는 이유인지도 몰라. 그나저나 뭐 하나 만족스러운 것이 없다. 지나가는 카트에서 파는 주전부리도 입맛이 확 당기게 하는 것이 없이 못마땅했다. 기차는 절겅절겅 리듬이라도 탈 수 있고 비행기는 이륙전의 짜릿함이 있다. 무엇보다 가장 여행다운 건 이인 휴게소에서 15분을 쉬어가는 고속버스 아니겠니. 하지만 나의 엄마는 허영이 많은 사람이다. 당신 경제력으로 큰딸에게 최첨단의 운송수단을 경험하게 해주었으니 응당 내가 그에 적절하게 고마워하기를 염두에 두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황당한 것이, 버스는 언제라도 뒤집힐지 모르는 위태로운 것으로 생각했다. 오쇼 라즈니쉬의 ‘배꼽’이라는 책에서 읽은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오토바이 여행을 즐기는 아들을 위해 어머니는 언제나 오토바이 교통사고가 난 기사를 스크랩 해주며 ‘아들아 보아라,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오토바이를 타다가 아까운 목숨을 잃고 있단다.’하며 아들에게 오토바이 사고의 위험성이 얼마나 높은지를 강조하려 했다. 그러자 아들이 말했다. ‘어머니, 인구의 95% 이상이 침대에 누워서 죽음을 맞아요. 통계학적으로 오토바이보다 침대 위가 더 위험하다는 것을 어머니는 왜 모르십니까.’ 

나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통로측 역방향 KTX를 탔고 열차가 전복될지도 모른다는 식의 긴박한 걱정거리는 없었지만, 끊임없이 고민을 했다. 이럴 때 창밖을 내다볼 수 있었다면 참으로 좋았을걸. 배가 남산만큼 부른 여자가 고즈넉넉한 미소를 띠고 창밖을 바라보는데 마음 심란한 내가 그 경치를 공유한다는 게 미안해져서 벌써 지저분해진 통로바닥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친구 없는 초등학생들이 으레 땅바닥을 긁어대곤 하지. 그 순간 많이 외로웠다.

  무엇보다도 너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을 것이다. 새벽에 매몰차게 나를 보내던 엄마의 마지막 모습도 머리가 핑 돌만큼 어려운 것이었지만 너에 대한 것이 참으로 컸다. 그냥 네 존재 하나만으로도 부쩍 나이가 들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인간관계를 지속한다는 것이 정신적으로 부대낄 때가 많아졌는데, 갑자기 걸려온 네 전화가 더욱 마음을 무겁게 했다. 물론 반갑지, 반갑고말고. 그런데 살가운 성격이 아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난 여태 어느 누구와도 끈질긴 연락으로 인연을 이어가 본 적이 없어서. 아니야, 사교적이지 못한 내 성격을 탓할 것이 아니라, 그도 그럴 것이 서로의 성장기를 상실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어색한 것 같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신발 크기를 키워가고 반장을 했니 못했니가 혈안이 되어있을 시절이 마지막이었으니. 그래서 만나자는 연락을 받은 후로도 왠지 내키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고고학에서 보면 미싱링크라고 하는 게 있다. 숙부의 행방불명 후, 그 8년, 혹은 9년이 빠진 고리에 해당할 것이다. 그 시간들이 다 뭐라고 너와 나는 이토록 이질감을 느끼게 되었을까 싶겠지만 가장 중요한 시기에 서로가 없는 세상을 살았으므로 그럴 법도 함을 인정할 거라 생각한다. 

너도 이것저것 생각나는 게 많지. 시골에 내려갈 때마다 숙부의 주관으로 내키지 않는 달리기 시합을 자주 했었는데 난 항상 저만큼 뒤쳐져서 뛰어 왔었고 자주 길을 잃었고 징징 잘 울었던 거. 그렇게 운 날은 한나절은 너무 미워서 너와 놀지 않는 것으로 분풀이를 대신 했고 엄마에게 안겨서 칭얼거리며 위로를 받았었다. 어린 것들을 시합에 붙이는 숙부의 눈은 사실 광기 그 자체였던 것 같다. 언제나 그 고통스러운 대결의 현장에는 우리 아버지도 함께 했는데 지는 거 싫어하는 성격이면서도 달리기 시합에서 진다고 나를 힐난하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거창하게 기뻐하는 숙부를 용인했을 뿐. 한 번은 게임을 시작하기 전 귓속말로 나직하게 ‘져 주어라, 네가 져주는 거야.’하고 다정하게 속삭여 주셨다. 하지만 구태여 져줄 필요도 없이 난 사실 단 한 번도 달리기에서 너를 이겨본 적이 없었다. 나는 울타리를 넘거나 미끄럼을 재빠르게 타는 데는 서툰 아이였던 반면 넌 바람처럼 빨리 달렸다. 그런 너는 네 아버지의 기쁨이요 자랑거리. 달리기 시합하는 그 순간만큼은 말이다. 숙부가 안주로 즐겨 드시는 ‘머거본’ 땅콩 캔 심부름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예쁨 받을 일이 드물다는 것을 너는 무척 빨리 간파한 것 같았다. 꼭 어른들이 모여 있을 때만 너는 ‘저어기 까지 먼저 뛰어갔다 오는 사람이 이기는 거, 시작!’하고 달려 나가서는 이미 반환점을 찍고 돌아오기 일쑤였다. 나는 또 그날 밤 내내 숨도 못 쉴 정도로 코를 훌쩍이며 끅끅 눈물을 삼켜야 했다. 또 엄마 품에 안겨 온 식구가 다 큰 계집애가 징그럽다고 흉을 보거나 말거나 그렇게 잠이 들었다.

시골 가면 우리 둘이 참 사고 많이 치고 다녔었는데! 물론 네 홈그라운드여서 그런지 저질러놓고 된통 구박받는 건 나였지만. 할아버지 포마드를 몽땅 꺼내어 남동생들 머리에 처덕처덕 발라주던 일, 우물 속에 하나 뿐인 낡은 창고 열쇠 빠뜨려서 증조부 때부터 개조 한 적 없다는 큰 집 창고 문짝을 운치 없는 철문으로 바꿀 수밖에 없었던 일. 그 중에서도 가장 머릿속에 오래 남았던 건 그때 그 새끼염소 사건일 거야. 동네 남자애들하고 같이 우우 몰려가서 아직 눈도 채 못 뜬 염소새끼를 괴롭혀서 죽였던 거 너도 기억이 안날 리가 없겠지. 그때 염소 키우는 곳은 시골집에서 한참 떨어진 곳이었던 것 같은데 수풀을 헤치며 누군가가 앞장을 섰었다. 애초부터 맘먹기를 염소 잡으러 가자였고 어린 나이에 그렇게도 잔인하게 굴 수 있었는지 지금도 많은 회의감이 드는 부분이다. 그때 가장 뾰족하고 튼튼한 나뭇가지를 가져온 건 나였다. 넌 차마 못 보겠다며 도리질을 쳤는데 약한 척하는 것이 미워보여서 너를 염소 우리 속으로 집어넣은 것도 나였다. 아마 전날 달리기 시합을 하고 난 뒤였나보다. 평소 기억에는 너에게 딱히 모질게 굴거나 못되게 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그 날은 남자 아이들 여럿 있는 앞인데도 네가 눈물을 똑 떨구기 직전까지 마구 못살게 굴었던 것 같다. 사람 하나도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그 견고한 무기로 갓 세상 공기를 쐰 핏덩이를 사정없이 공격하는 걸 보고 모두가 미칠 듯 즐거워했었다. 푸들푸들 떨다가 이제 미세한 떨림조차도 없다는 걸 알게 된 후에도 확인 사살. 그러고 나서 쏟아진 환호성과 성취감. 너는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나중에 숙부의 추궁은 “누가 먼저 하자고 했냐?”로 시작했다. 따지고 보면 너도 나도 시작은 하지 않았다. 그냥 치기 어린 광기가 모여 염소 새끼 한 마리 죽이는 데 이르렀을 뿐. 하지만 그런 이분법적인 질문에 대해서, 게다가 어른이 물어보는 질문에 대해서 대답을 꼭 해야 한다면 그것은 “저에요.”일 수밖에.  “그럼 그렇지.”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거칠게 쥐어박는 숙부가 싫었지만 “아니에요, 저도 같이 했어요.”라고 말하지 않는 너도 진짜 미웠다.

너랑 같이 있는 동안은 기를 못 펴고 사는 것이 너무 억울해서 조금 비열한 복수를 계획했었다. 놀란 숙모의 전화가 걸려왔을 때도 짐짓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발뺌했었지만 서랍  속에 숨겨진, 네 이름 앞으로 삐뚤삐뚤 도착한 러브레터를 일러바쳤던 건 나였다. 채 자라지도 않은 손가락으로 쓴 연필글씨에 무슨 외설이 있으며 흑심이 있었겠니. 그러나 숙부는 머리끝까지 화가 났었고 편지를 갈기갈기 찢어 없애는 걸로는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일기장을 죄다 꺼내 놓을 것을 명령했고 러브레터의 흔적이 남은 모월 모일자 일기를 발견한 다음에 그 장까지 깨끗이 찢어 없앴다. 넌 상투적 표현으로 말하자면 ‘비오는 날 먼지가 나도록’ 흠씬 두들겨 맞았음은 물론이고 여름방학 중이었던 것 같은데 땡볕에서 두 손 들고 벌까지 서야 했다는 후문을 들었다. 내가 일러바쳐놓고도 숙부가 너무 황당하고 미워서 한참동안이나 일부러 숙부 말이라면 빙빙 돌려 안 들었던 적이 있었는데. 몇 년 전인가 언니의 마지막 남자를 자처하던 언니의 첫 남자를 보며 그런 고지식함이라도 억지라도 좋으니 행동거지에 대해서 소리를 질러줄 어른이 몹시도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어디까지가 순수해야 하는 것이고 어디까지가 어른스러워야 하는 것인지를 잘 모르는 것은 언니나 나나 마찬가지인 것 같지 않니. 

무려 열한 살이 많았던 그 남자와 함께 살 시절, 언니의 자취방을 잠깐 들렀었는데 20개짜리 콘돔이 3개로 줄어있는 것을 보여주며 나를 부여잡고 펑펑 울었다. 엄마 앞에서 이렇게 울어보고 싶다는 말도 했었다. 마음을 다해 위로를 해주고 싶었지만 내가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 언니가 지금 내 나이 때의 일이었다. 아마 가장 어리고 상처받기가 쉬운 나이였는데도 남자는 영악한 편이라서 상처받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바라봐주는 척 기다리는 척하다가는 남은 콘돔을 모두 주워들고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언니는 그 첫 번째의 연애를 필두로 비슷한 종류의 남자들과 비슷한 패턴의 사랑을 했고 더 이상 나의 위로를 필요로 하지 않았으며 내가 자취방에 오는 날이면 남자를 내보내고 집안을 깨끗이 청소한 뒤 나를 맞았다. 그럴 만한 나이가 되었기도 하겠지만 굳이 순수함을 잃었다고 느끼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일본 주부처럼 무릎을 팍 꿇고 예쁘게 과일을 깎아 대접하기는 하지만 예전 지저분하게 머리를 기르고 손톱 사이에 때가 끼어있던 그 때보다도 더 제 나이답지 못한 인생을 사는 것 같다는 느낌도 지울 수가 없다. 

나이답게 사는 것이 좋은 거지. 수년의 공백기를 헤치고 너에게서 걸려온 전화, 반쯤은 숨소리와 침묵으로 나머지 반은 고통스러운 이야기들로 가득 찬 통화중에 무슨 이유에선지는 몰라도 나는 저런 말을 했었고 너는 발끈했었다. 네 말이 맞아. 나이답게 살기 위해서는, 즉 평범하게 살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너무도 많은 것이 오늘의 실정이다. 삼십 몇 평하는 아파트, 직업을 가졌든 살림을 했든 저녁에 보글보글 찌개를 끓여주고 힘든 날이면 치마폭으로 감싸줄 엄마, 중대형의 자가용, 아니 무엇보다도 적당한 수입. 그것도 아버지의 적당한 수입. 아버지. 아빠. 네 아버지, 그래 나의 숙부.

  “인생이 파란만장 했어. 쳇. 진짜 싸구려 드라마 같았어. 왜, 드라마 보면 그런 거 나오잖아. 아빠는 도망갔고 은행에서는 압류 딱지를 척척 붙이고 엄마는 안 돼요 오열하고. 나 다 해봤어. 빚쟁이들 따돌리려고 집으로 가는 길을 뺑뺑 돌아 남의 집 대문으로 들어서다가 혼난 적도 있었고, 밤에 전화벨이 울리면 온 식구가 이불 속에서 오들오들 떨면서 귀를 꼭 막고 저건 또 누굴까 신음했었어. 가장 걱정했던 게 뭔지 알아? 전화 건 사람이 아빠일 까봐 겁났어. 어차피 받을 수 없는 전화라서, 그래서 혹여나 아빠가 한 거면 어쩌나 해서. 나이답진 않아. 한 10년 쯤 후에 경험해도 괜찮았을 것 같고, 아니 차라리 이런 기억은 없는 편이 낫겠지. 아빠의 전화는 반갑게 받아야지, 우리 나이 때건 아니건 간에. 안 그러냐? 너라면 이런 경험을 필요로 했을까? 나이에 적합한 인생의 일부분으로? 근데 진짜 우린 왜 이렇게 다르게 산거냐. 진짜.”

안쓰러웠다. 정말 우리 너무 다른 시간들을 보내왔었구나 하는 생각에. 전화 벨소리에 오들오들 떨고 있는 너의 모습에. 그러고 보니 받을 수 없었던 수많은 전화 중 상당부분은 우리 집에서 걸려온 것일 수도 있겠다. 기억날 때마다 전화를 걸었었고 그때마다 신호가 가기도, 없는 번호라고 뜨기도 하는 것에 신기해서인지 이제 받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매일 전화를 걸었던 적도 있었다. 너희 식구가 모두 전화기에서 당장 폭탄이라도 터질 듯한 긴장감을 안고 벨소리가 끝나기만을 기다렸을 것을 생각해보니 못할 짓을 했구나. 숙모에게도 죄송한 마음을 전해 드리렴. 숙모하고는 친한 편이어서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이런 말을 한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은데 딱 한 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숙모한테 빌어본 적이 있다. 그 왜, 우리가 ‘꽃집네’라고 종종 부르던, 숙부의 전처. 그 여자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던 날. 그날따라 엄마도 없는데 병원에서 왜 그렇게 칭얼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나는 결국 이유도 없이 그날 사고를 치고 마는데 나보다 다섯 살이나 많은 ‘꽃집네’의 망나니 외동딸과 싸우다가 그 살찐 얼굴에 너무도 선명한 손톱자국을 내고 만 것이다.

왜 망나니인가 하면 1년 중 한 달 넘게 우리 집에서 하숙을 하는 그 딸이 우리 엄마 돈을 종종 훔치기를 잘 했고 수업을 마치고는 오락실에서 죽치느라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꽃집네와 딸, 둘 모두가 없는 자리면 아빠는 대놓고 망나니, 망나니 하며 코웃음을 참지 못했다. 게다가 네 아빠는 대놓고 꽃집네를 미워했다. 어린 내 앞에서도 그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무슨 여행을 그렇게 자주 다니는지 꽃집네 아주머니는 뚱뚱보 딸을 숙부 집에 자주 맡겼는데 그럴 때면 숙부는 거친 숨을 씨근덕거리면서 뚱뚱보의 손목을 붙잡고 우리 집 현관에 서 있곤 하셨다. 그 딸이 다니던 학교가 우리 집에서 버스 타고 두 정거장 정도밖에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꽃집네가 딸을 방치해둬서 당신이 보살펴야 한다는 사실보다 더 숙부를 신경질 나게 했던 사실은 차마 딸이라고 인정하기도 밉상인 그 뚱뚱이를, 내놓기 부끄러운 딸을 우리 집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큰숙부는 버섯농사에 골몰하여 시골에서 도통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으므로. 꽤 성장해서 까지 나에게, 사실 꽃집네 뚱뚱보 딸의 존재는 미스테리였다. 너는 그 뚱뚱보를 ‘언니’라고 불렀고 그 뚱보는 숙부를 ‘아빠’라고 불렀지만 함께 살지 않는다. 어린 내가 이해하기엔 조금 이상한 가족관계였다. 하지만 숙부는 나에게 세상엔 결혼을 두 번 한 사람도 있고 이혼한 여자의 딸을 울며 겨자 먹기로 맡아 기르는 남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아했다.

아무튼 망나니 혹은 뚱뚱보라고 불리는 그 딸은 숙부를 무서워해서 나에게 손톱 공격을 받고도 숙부에게 일러바치지 못했다. 대신 죽은 엄마가 아쉬웠는지 숙모에게 엄마아 하고 달려가 살찐 얼굴을 들이댔는데 숙모가 울기 시작했었다. 장흥병원 영안실 앞, 사람도 없는 병원 복도에서 어린애 둘을 세워두고 펑펑 우는 숙모가 너무 안돼보여서 싹싹 빌었다. 다시는 싸우지 않겠다고, 다시는 숙모 말 안 듣고 꽃집네 딸과 싸우지 않겠다고. 숙모가 눈물을 거두고 말했었다. “그럴 필요 없다. 이제 둘이 싸울 일도 없을 거야.” 과연 꽃집네 딸과 나는 더 이상 만날 일이 없었다. 

누가 뚱보 딸의 새어머니가, 새아버지가 되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녀가 이름을 바꾸었고 아버지의 경쟁업체의 경리직원으로 취직해 있고 우리 집에서 불과 5분도 안돼는 거리에 새로 대한주택공사가 염가 분양한 아파트에 살고 있으며 깜짝 놀랄 만큼 이른 결혼을 해서 벌써 두 명의 아기 엄마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 뿐이다. 이럴 때면 세상이 참 좁다고 느낀다. 엊그저께 보니 꽃집네 뚱뚱보 딸 얼굴엔 여전히 상처가 남았다고 한다. 누구로부터 들었는지 궁금하지 않니. 아빠가 직접 해주신 말씀이다. 

 “너도 기억나지? 거 가끔, 우리 집에서 자고 갔던 그 돼지 같은 가시네. 권 사장 아저씨 회사에서 타자기 치고 있더라. 살은 겁나게 빠졌는데 거 볼딱지에 흉터 자국이 배기 싫어서 금방 알아봤다야. 우리 딸내미 손이 맵긴 매운 갑다.”

 그러고 아빠는 헛기침을 흐음흐음 하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야말로 머리 위로 샹들리에가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이거 폴 오스터 소설에 나오던 표현인데 딱 그 상황에 어울렸다. 난 완전히 얼었다. 꽃집네 뚱뚱보 딸의 못난 얼굴에 덧붙여진 못난 흉터에 사과하느라고 그랬던 건 아니었다. 단지 우리 부녀가 오랫동안 서로 건드리지 않았던 민감한 부분. 그게 표면으로 떠오른 것에 대한 충격이었다. 지지리도 못생긴 얼굴 위에 남은, 지워질 수 없는 상처를 보며 애써 외면하고 잊으려 해봐야 부질없다고 느꼈던 걸까? 아니면 실수였을까? 그건 아니었을 거야. 내 아버지는 결코 위험한 발언을 먼저 시작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아빠와 내가 모른 척해왔던 그 금단의 지역. 그때는 내가 어린 탓에 그랬고, 지금은 나이가 먹을 만큼 먹어서 쉬쉬해야만 하는 그 하루가 있었다. 너와 내가 같은 하늘에 살면서도 귀를 막은 것처럼 소식을 못 듣고 산 그 기나긴 공백기보다 더 완벽하게 ‘누락’된 하루의 기억이 있었다.

  사실, 나는 네 아버지가 자취를 감추던 그 날, 그분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다. 더 이상 손 벌릴 일이 생길까봐 두려워 연락을 끊었다는 숙모의 변명은 오로지 너를 위한 것이었다. 상처 입지 않기 위한 완충이었다. 숙부는 네 일가보다는 우리 가족 앞에서 먼저 표표히 사라졌다. 너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어느 날 아침 밝은 미소를 지으며 출근했다가 그 날 저녁에 돌아오지 않은 행복하고도 괴이한 사나이이겠지만 우리 가족에게, 나에게 있어 숙부는 마지막 진을 다 빼고서야 흔적을 감추어버린 서글픈 존재였다. 

사실 이제 방금 열차가 광명을 지났다. 너를 만나기 위해서라면 광명에서 내렸어야 했겠지. 하지만 그 날 있었던 일을 솔직하게 너에게 전하고 난 뒤 이 편지를 부치는 걸로 만남을 갈음하려는데 크게 실망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애초부터 너를 만나려던 계획이 없었다는 말도 솔직하게 전하고 싶다. 다시 만나기엔 서로의 ‘빠진 고리’에 상처가 너무 많은 것 같아서.

  나중에서야 알코올 중독임을 알게 되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숙부는 지나칠 만큼 술을 좋아해서 더부살이 하면서도 여러모로 위험스러운 일을 자주 만들었었다. 시골집 마당만한 창고와 열 평 남짓 되는 사무실을 차려놓고 사업을 해보겠다고 끙끙 신음하던 와중에도 아빠는 네 아버지에게 그럴듯한 직함과 2층 다락의 독립된 공간까지도 마련해주었다. 숙부가 차지한 2층 다락은 어느새 화투판과 낮술이 난무하는 냄새나는 곳으로 바뀌어나갔고 아빠는 숙부의 그런 행동을 묵인했다. 숙부는 점점 얼굴이 붉어졌고 더욱 큰 배를 갖게 되었다. 목소리도 갈수록 커지는 것 같았다. 마당만한 작업장이 온통 숙부의 노랫소리였다. 엄마는 퇴근길, 차 문을 쾅 닫고 사이드미러에 숙부의 얼굴이 점점 작아지는 것을 확인하자마자부터 바가지를 긁었으나 아빠는 참아야 했다. 혈육이라는 이유로. 그렇게 나의 아버지와 네 아버지와 나의 어머니는 불편한 한 지붕 생활을 해오고 있었고 그러는 동안은 네 집에도 과일바구니와 저금통이 풍족했다고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낮부터 얼근하게 취한 숙부가 몹시도 장난이 치고 싶었던 모양이다. 아니, 장난을 치고 싶기보다도 초라한 자신의 모습에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 평생 형보다 똑똑치 못하다는 것에 깊이 자괴감을 가져왔는데 배 나온 중년이 되어서까지 스스로 밥 벌어먹지 못하는 서글픔이 컸으리라. 네 엄마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똑똑한 사람이었다. 네 아버지의 고충을 이해할 만큼 슬기로운 여자였으므로 숙부의 실종 이후, 우리에게 연락을 취하지 않았던 것 같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숙부는 그 날 몇 명 안 되는 회사 사람들을 모아 아빠를 상대로 파업을 시도했다. 말이 파업이었지 그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애초부터 파업 따위를 벌이기에는 너무 화창하고 조용한 여름 대낮이었다. 매미 소리 하나만 귀청이 따갑도록 들렸다. 나는 회사 지붕 사이에 숨어 고양이를 데리고 놀다가 밖에서 쌍욕이 들리는 것에 왠지 모르게 흥분이 되었었다. 엄마는 우리 자매의 언어생활에 상당히 엄한 편이어서 욕설을 내뱉는 것은 물론 듣는 것조차 금기시했으므로 이렇게 밝은 날 선명하게 들리는 ‘개새끼’ 소리에 나는 호기심이 당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걸쭉한 욕지기에 이끌려 눈을 돌린 그곳이 바로 고독한 숙부의 전쟁터였다. 그 앞에 펼쳐지는 진풍경을 놓치기가 아까워, 필시 누군가에게 발각되었다간 안으로 쫓겨 들어가기가 일쑤였을 테니 컨테이너 박스 속으로 숨었고 그 속에서 모든 것을 지켜볼 수 있었다. 

어린 나도 그 상황이 비참하다는 것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무언가 허술하고 후덥지근하고 지쳐있었다. 숙부 얼굴이 너무 시뻘건 바람에 빨간 띠 같은 건 따로 두를 필요도 없었고 파업에 적극 참여해야 할 당사자들은 정작에 의욕이 없었다. 매일 밤, 엄마와 아빠가 식탁자리에서 조곤조곤 이야기하던 흉흉한 소문-직원들에게 술을 사며 이 사장, 박 사장, 김 사장은 자네보다 1년이나 덜 근무한 풋내기한테도 연봉 얼마를 준다지 하며 꼬드겼다는-은 별로 위협적이지가 않은 것으로 판명 된 거다. 오로지 숙부만이 아빠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개새끼, 돈 좀 벌면 다냐 개새끼, 니가 형이냐 개새끼를 연발했을 뿐이니. 셔츠 자락을 풀어 헤치며 아빠에게는 없었던, 숙부만 가졌던 육중한 아랫배를 서럽게 두드렸을 뿐이니. 그마저도 그 소동마저도 숙부가 숨을 새로 쉬는 동안은 풍선 바람 빠지듯 가라앉아 버리는 것이었다. 그 나이 때는 아버지뻘인 남자가 초라한 것을 보면 두렵고 눈물이 나기 마련이다. 나 역시 숙부의 그런 모습에 슬퍼졌다. 더욱이 아빠는 개새끼 소리를 실컷 듣고도 묵묵했다. 성격적인 면에서 둘이 많이 닮았다는 것을 주변으로부터 귀가 닳도록 들었다. 자랑도 아니면서 어쩜 그렇게 꼭 닮았어 그랴 하며 뿌듯해 하던 형제였다. 그래서 아빠가 잠자코 욕을 견디는 것을 대단하다고 여겼었다. 그리고 아빠가 섧게 우는 것을 보고 다시 한 번 놀랐다. 나는 배알이 꼬이는 느낌이었다. 할아버지의 장례식 때도 눈물이 없는 아빠였다. 엄마가 허구헌날 마광수의 책을 붙잡고, 전혜린의 책을 읽으며 흐느끼기가 일쑤였던 것에 비해 아빠는 사내라면, 아니 사내고 계집이고 눈물은 없어야 된다는 주의였다. 그래서 우리 자매가 젖떼기 전 그칠 새 없이 우는 것도 이해하지 못해 그 어린 것을 장롱 속에 집어넣은 일화로 유명한 아빠였다. 더 자라서도 사소한 이유이든 중대한 사건이든 징징대는 꼴만은 못 참아 하던 아빠였다. 그런데 아빠가 울고 있었다. 아내와 여직원과 몇 명의 장정들, 아우와 몰래 지켜보는 어린 딸 앞에서. 숙부도 할 말을 잃은 것 같았다. 아빠는 숙부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울었다. 숙부는 계속 말이 없었다. 형님, 미안하오 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더 이상 쌍소리를 내뱉지도 않았다. 

사람들이 죄다 마비라도 된 것마냥 서서 땀을 주룩주룩 흘리고 있는 가운데 컨테이너 속에 있는 나만이 시원했다. 컨테이너 사각 모서리 안으로 나는 바깥 상황이 한 폭의 액자그림처럼 퍽 명료하게 보이는 듯 했다. 머리가 너무 차가워서 어쩐지 여기 모인 사람 중에 혼자서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허세도 들었다. 그 광경 그대로 정지해버린 중에 나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보았는데 무언가 용감한 행동을 해서 이 난국을 타개해야 할 것만 같았다. 돌이켜 보면 약간의 영웅심리도 작용했던 것 같다. 지금도 나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야. 똑똑한 척, 센 척 하기를 그렇게도 좋아하던 그 버릇, 여름날 컨테이너 박스 속에서 머리 굴리는 그 순간부터 시작됐던 것일지도 모른다. 

영악하고 작은 머리가 움직이는 동안 숙부가 침을 카악 뱉었다. 

내 생각엔 그게 일종의 ‘트리거’였던 것 같다. 불편한 상황 속에서 아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침을 뱉는다. 증오에 찬 표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켜보는 눈들도 곱지가 않다. 아빠도 표정이 뒤엎인 것 같았다. 차라리 평생에 쏟지 않던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편이 풍경에 걸맞는 평온함이었다. 

날카롭게 공기를 가로지르는 가래침 소리와 함께 나는 컨테이너 박스 속에서 뛰쳐나갔다.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어야 했는데 힘차게 달리면서 그런 표정을 짓는다는 것도 쉽지가 않더라. 그래서 반쯤은 숨이 턱에 차 희열에 찬 행복감으로 반쯤은 죄악을 처단해야겠다는 의미심장함으로 무장한 채 숙부 앞으로 달려 나갔고. 나는 손이 매운 편이었다. 숙부의 뺨을 빗나가지 않게, 보기 좋게 갈기고 난 다음 대단한 걸 기대했던 건 아니지만 술에 올라 벌건 숙부의 얼굴에도 어린 손자국이 선명히 남는 것에 대해서 약간 의아함을 느꼈다. 주변의 놀란 눈들이 나를 단순한 방면에서 놀라게 했다. 아빠의 얼굴도 더 이상 슬퍼 보이지 않았다. 내 손이 그 날 공기를 흔들어 놓았고 네 아버지를 상처 입게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너에게 말한다는 게 부끄럽지만.
  조카에게 따귀 맞은 남자는 정신적인 공황에 빠질 법도 하다. 성난 고래처럼 화를 내는 편이 차라리 나에게 덜 어려웠을 것이다. 진심으로 허탈해 하는 너무 큰 몸집의 숙부, 하지만 사죄를 하기에는 몇 초 전 내 행동이 지나치게 용감했으므로 분위기를 의식하는 중이었다. 어디서부턴가 이미 그 장소엔 ‘말’이 없었다. 몸짓과 눈빛, 그리고 한 차례의 손찌검이 다였다. 그것이 다였다. 

숙부는 천천히 몸을 돌려 걸었다. 길을 건너면 아파트 재개발 단지 건설현장이 있었는데 아직 기초공사도 시작하지 않아서 황폐했었다. 숙부가 그쪽으로 걸어서 점점 작아지는 모습이 그럴싸했다. ‘그 모습이 어색하지가 않았다.’라고 생각했었다. 그런 식으로 내가 저지른 사고를 무마하고 싶었다. 사실 붙잡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굴욕감을 덜어주는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민간인이 들어가서는 안 될 것 같았던 먼지가 흩날리던 아주 깊숙한 곳까지 네 아버지가 걸어 들어가는 광경을 끝까지 지켜보았고 그것이 너는 몰랐던, 숙모는 짐작만 했던 그리고 아빠와 내가 보았던, 내가 조장했던 숙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죄책감을 모르던 시절이 지나고 애써 그 사건을 잊으려 했다. 아빠도 굳이 질책하지 않았다. 아니 입에 담기도 싫으셨던 것 같다. 그러나 네 아버지가 그 길로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나서부터 잊을 수가 없었다. 엄연한 사실로서 그 여름날은 실재하는 것이었다. 나는 네 아버지의 따귀를 때린 조카였고 네 아버지는 그 길로 세상을 등진 거였다. 

네 손. 하얗고 통통하고 참 예뻤지, 지금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동안의 고생으로 거칠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손이 고운 사람이 미인이래. 마흔이 넘으면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더니, 아직 마흔 되려면 십 년 한참 넘게 남았지만 그 책임, 난 손으로도 져가나 보다. 딸내미 손은 맵기도 하지 하시는 말씀을 듣고 양 손등을 번갈아 보는데 까맣고 비루먹은 못난 손이 보였다. 어쨌든 흉한 손으로 펜을 쥔 채 이렇게 주절주절 써 내려가는 중인데, 이제 꼭 너한테 용서 받고 싶어서라고 생각하지는 말아 줬음 한다. 그러기엔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와서 용서 했어, 훌훌 털어버려 한다면 내가 너무 이기적이고 너도 구태여 내 행동을 용인할 만한 위치가 아닌 것 같아서. 뭐 10년도 안된 일이니 다시 돌이켜 헤아려봄 직도 하겠지만 일전에 말했듯이 그 기간 동안 우리가 너무 많이 성장했고, 또 너무 많이 변했지. 아버지 없이 지낸 지난 시간들을 내가 보상해 줄 수도 없는 일이다. 이제 너 나름의 삶을 살고 있으니 이렇게 털어놓기는 했지만 이것이 잘 한 일인지는 모르겠다. 엄마에게도 아빠에게도 물어서 어찌어찌 해보겠다는 의논을 한 적이 없는 일이라서 더욱 그런 것 같다. 다만 알아야 된다고 생각하기에 이렇게 일방적으로나마 지난 일들을 서술해본 것이고, 그래서 더더욱 너를 만나야 할 이유 또한 없어져 버린 것 같다. 아니, 사실 이러려던 게 아닌데 본의 아니게 또 자존심을 세우고야 말았네. 나 또 혼자 시원시원한 사람인 척 유난을 떨고 있구나.
 
  사실 난, 아주 나중에, 정말 시간이 많이 지나서 내가 더 이상 손바닥에 어른 뺨을 함부로 휘갈겼다는 느낌을 지우고, 내 손으로 행사한 폭력을 잊고 난 다음에야 너를 떳떳하게 만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미안하다는 말이 하고 싶은 것 같다. 아마도.
  곧 용산이다. 이만 쓸게. 어릴적 네가 마지막으로 보냈던 편지는 크리스마스 카드였지. 그 카드가 지금도 집에 남아 있다. 집을 옮기면서 네가 보내준 편지 거의 다 버렸는데, 그 카드엔 답장을 못했던 게 못내 아쉬웠는지 그냥 남겨두었다. 꽤 큰 도화지에 크레파스로 동화책에 나오는 뚱뚱한 산타 할아버지 그림을 그려 보냈는데 그거 꼭 네 아버지 닮았더라. 살짝 쳐진 눈도 볼록 튀어나온 아랫배도. 그 답장을 20대가 되어서 쓰는 셈이 되었구나. 많이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다. 미안하고, 건강하길. 언니에게도 너의 안부를 전할게. 건강하렴.

2008년 3월 31일. 열차 안. 너에게 씀. (끝)

 

 

공교롭게도(?) 내 글이 성대문학상 당선작으로 선정되었다는 연락을 받은 그 날은 2008학년도 2학기 성적표가 우리 집에 도착한 날이었다. 나는 비루한 성적표를 조심스레 부모님께 내밀며 더불어 성대문학상 수상 사실도 함께 전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가작에 그친 탓인지, 역시 글 잘 쓰는 큰 딸보다는 공부 잘 하는 큰 딸을 더 원하셨던건지 부모님의 잔소리는 그칠 줄을 몰랐다. 법학도가 도서관에 틀어박혀서 6법전서를 탐독할 생각은 않고 또 글이나 깨작거렸다는 사실이 부모님은 영 못마땅하신가보다. 
잡기가 많은 사람은 오히려 실속이 없다는 말이 있다. 감수성이 지나치게 풍부한 사람은 고시에 적합하지 않다는 말도 있다. 그래서 수상을 해놓고도 아 정말 내가 실속 없는 인간일까, 이래가지고 고시를 볼 수 있기는 할까 하는 생각에 우울하기도 하다. 
하필이면 성적표와 함께 도달해서일까, 나에게 많은 고민을 가져다주었던 상이지만 어쨌거나 수상하게 돼서 기쁘다. 좋은 성적을 내겠다는 생각으로 야심차게 도전한 글이 아닌데도 높은 평가를 받게 돼서 더욱 기쁘다. 다만 이젠 조금 더 본업에 충실해서 똑똑한 학생이 글재주 또한 좋다는 말도 좀 들어보자 하는 생각을 하며 내년을 기약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