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우수작 - 김덕중(독문03)

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내가 407호실을 열고 꾸역꾸역 뭉친 먼지더미를 발로 차내며 짐을 내려놓았을 때 그가 들어왔다. 그것이 처음이었다. 연이어 들어오는 그가 너무 태연하여서 마치 뒤를 밟힌 느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저도 407호입니다. S대 사회과학계열이구요. 고향은 김제입니다. 전주 Y고를 나왔어요.
  그는 그렇게 로보트처럼 말을 뱉어놓고는 자신의 몸을 훑고 있는 내 눈길을 피해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문과 창이 마주보고 있던 길쭉한 방. 그것은 꼭 복도 같아서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곧장 걸음을 떼기 시작해야만 할 것 같았고, 창가에 붙어있는 책상 앞에 앉아야만 수순이 마무리 될 것만 같은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창 앞에서 멈춰 서지 아니한 채, 그 행로를 연장시키고 있었다. 넋이라도 놓아버린 듯이 창밖을 살피는 그였다. 나는 악수를 청했다. 그가 반사적으로 손을 쥐었다. 쥐었다기보다 내게 맡겨버렸다. 내가 손을 놓았을 때, 그의 손은 잠시 하향했다.
  -사수했구요.
  손을 거두며 그가 말했다. 머리를 쓸어 넘기던 내 손이 멈췄다. 그리 놀라운 일이겠는가. 하지만 뜻하지 않은, 정말 의외였다.
  -그럼 나이가 어떻게 되는 거죠?
  23살. 나는 군대를 갔다 와 이번 학기 경제학과 2학년 1학기로 복학을 하는 것이었고, 그는 사회과학계열 새내기이지만, 그와 나는 동갑이었다.

  -여기는 되도록 같은 학교에 다니는 사람들끼리, 선후배간 묶어 놔. 이름이 뭐라고 했지? 동수? 그래 동수도 군대도 갔다 왔고 그래서 잘 알겠지만 그렇게 해야 서로 조언도 해주고 도움도 되고 좋잖아. 동수도 학숙 생활은 처음이지만, 그래도 선배답게! 응? 형답게! 음… 연우 잘 가르쳐주고 그래. 연우도 동수네 학교 새내기거든. 그리고 말인데 학교생활도 학교생활이고 그렇지만 우린 모두 동향이잖아. 나를 아버지처럼 여겨. 모두 어울려서 잘 지내야지. 여기 행사 있고 그럴 때마다 꼬박꼬박 나오고.
  제대 후 바로 복학하는 참에 집에서 일방적으로 구해준 학숙이었다. 나는 똥인지 거름인지 가릴 새도 없이 온 셈인데, 바로 들이대는 학숙사감의 끈적끈적한 말이 달게 들릴 리 없었다. 어수선하게 오가는 학숙생들, 한 쪽 벽에 있는 학숙생들의 이름 팻말, 더욱이 2인 1실. 한데 묶여 지내는 것에 대한 반감도 좀 있었지만, 내 출신지역과 엮인다는 느낌이 그리 즐겁지 않다는 것도 있었다. 건물 앞에서 휘날리는 고향의 깃발은 그리 자랑스럽지 못했다. 숨기고 싶은 과거? 뭐 그런 게 있던 건 아니었지만, 그냥 그랬다. 어디로 갈지는 몰라도 혼자서 막 뛰어다니고만 싶은데, 자꾸만 놔주려 하지 않는 모든 것들, 걸리적거리는 그 모든 것 때문에, 내가 주저앉아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런데 407호의 룸메이트 그는, 내가 잡아주어야 할 것만 같은 인상이었다.
  -짐이 적네.
  -버릴 것만 많아서…….
  무슨 심지로 사뒀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온갖 어학서적부터 더러는 에세이집까지 꽂혀있던 내 책장과 대조되는 그의 책장이었다. 새내기를 위한 학교 안내서만 놓여있던 그의 책장. 내 책장이 자랑스러웠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미묘한 쾌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어수선함 속에서 학숙 입학식이 끝나고, 자연 저녁시간이 돼서 우린 지하식당으로 향했다. 그는 본래 교대에 가기 위해 3년 동안이나 입시에 매달려있었다고 했다. 집에서 원했으니깐. 이라고 끝말을 붙이는 것이 그 자신이 그렇게 교대에 애가 달았던 것은 아닌 듯했다.
  -이제… 그러면?
  -아무데나 들어가서, 교직이수를 해야 할 것 같아. 집에서도 원하니깐.
  -너도 선생이 되고 싶은 거야?
  -난 잘 모르겠는 걸. 그래도 그렇게 싫은 건 아냐.
  나는 그래도 이 동갑인 새내기에게 대학생이란 것이 얼마나 환상과 거리가 먼 것인지에 대해 말해주려고 했건만, 그는 대학생이 된다는 환상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너무 처절하게도 공허했다. 처음에 내가 그의 소개를 들으면서 느끼고 있었던 어떤 우월감. 내가 너보다는 3년이나 앞서고 있구나 하던 안도감 같은 것을 느끼기에 그는 너무도 거리가 먼 랠리 위에 있었다. 아니, 그에겐 아예 랠리라는 것이 없었다. 3년이라는 유예가 그를 이렇게 만들어 버린 것일까? 모를 일이다. 그는 빌어먹게도 그저 지금 이러고 있을 뿐이었다.

  몇 명이 방에 찾아왔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구했다는 그는 방에 없었고, 나는 토익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무엇에라도 대단히 능숙해’ 라는 표정으로, 그들은 학숙에 존재하는 모든 일정을 이야기 해주었다. 단순 싸게 먹고 자는 곳이라고 생각하던 내게는 너무나도 과분한 일정들이 안내되었다. 동문회, 향우회부터 해서 체육대회, 운동 소모임 등등 까지. 나는 별로 생각해 본 적 없었다면서 얼버무렸다. 그들은 그래도 일요일 저녁 10시는 꼬박 챙기는 게 좋을 거라고 말했다. 청소시간에 빠지면 벌점을 받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나가면서야 자기소개를 해 주었는데, 4층 대표와 청소반장이었다. 꼭 시트콤에 나올 법한 사람들이었다.

  -완전 새로 시작해야 돼. 머리가 진짜 굳어버렸어.
  -고등학교 때는 뇌 용량이 가득 차서 더 이상 안 들어가는 것은 아닌가했었는데 지금은 텅텅 비어버렸다니깐. 머리를 흔들 때마다 달그닥 달그닥 소리라도 나는 것 같아.
  청소시간 후의 담배피우는 멤버들이었다. K, H 그리고 나. K대생이고 H대생이기 때문이었다. 이름은 기억하지 못했다. H가 보라는 듯이 머리를 흔들며, 너희는 안 그러냐고 물었다. K는 웃었다.
  -인간의 뇌에는 암기세포라는 것이 있다는 얘기 들어봤어? 암기를 담당하는 뇌 세포인데 이것은 쓰면 쓸수록 더 활성화 돼서 더 많이 외울 수가 있다는 거야. 뇌 용량 100기가. 딱 이렇게 정해지는 게 아니라 암기세포를 활용하는 정도에 따라 한계용량은 늘어날 수도, 줄어들 수도 있다는 거지. 

  수강신청기간이 끝나고 학과수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나는 복학생다운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아침 9시면 어김없이 등교를 했고, 하루수업이 다 끝날 때까지 내 공강시간은 도서관에서 채워졌다. 정말 독한 마음으로 토플학원도 등록하였고 학원수업까지 끝난 직후엔 아르바이트도 하였다. 2학년 1학기를 다니는 학생치고는 조금 너무했다 싶을 정도로 내 하루 일정에는 빈틈이 없었다. 무엇보다 초조했었다. 군대 가기 전부터 어려웠던 경기는 더 악화되어 있었고, 언론에서 나오는 청년실업이란 말은 어느새 고유명사처럼 쓰이고 있었다. 학년은 2학년이었지만, 나이 스물 셋이면 그리 이른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갖고 있는 A+의 개수만큼, 영단어의 개수만큼 미래가 나아지기만 한다면 내 20대를 바치리라. 현재가 내 50년이 될 수도 있을 미래만 보장해준다면 어떻게든 몸부림 쳐보겠다고 작심하기로 했다. 그런 바쁜 일상이 이어지면서 나는 룸메이트가 깨어있는 모습을 좀처럼 볼 수가 없었다. 내 하루의 시작인 8시에도 그는 잠들어 있었고, 지친 몸을 이끌고 들어서는 12시의 407호실 역시 불은 어김없이 꺼져 있었다. 둘이 살지만 거의 혼자 살다시피 된 생활이 그리 불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한가로운 새내기이자 무기력한 23살인 그가 잠든 모습은 언제나 내게 씁쓸함을 자아내고 있었다.

  축구중계가 있던 날, 나는 학숙에 일찍 돌아왔다. 이름조차 생소한 나라와의 친선경기를 보고 싶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고 그저 다들 들뜬 때에 홀로 도서관 책상을 긁고 싶지는 않았을 뿐이었다. 학숙 거실에서는 사감과 학생들이 TV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지나치게 활기차 있던 H와 눈인사를 하고 계단을 올랐다. 얼마 전에 K는 학숙 초입이거나 벌점이 많은 학생들을 위주로 4층부터 배치를 시키고, 사감 눈 안에 든 학생일수록 아래층에 방을 배정시킨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한국 팀이 골에 실패했던지 학숙생들의 원성 깃든 함성이 계단에까지 울리고 있었다. 괜히 학숙에 일찍 왔나 보다고 중얼거리며 남은 계단을 오르고, 407호실로 들어서는데 룸메이트가 깨어있었다. 스탠드만 켜져 있던 방은 전체적으로 어두웠고, 창틀에 발을 걸치고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은 좀 위태로워 보였다. 차마 나는 그가 방에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잘못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겠지만 계산실패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일찍 왔네.
  -어. 뭐하고 있었던 거야? 축구는 안 봐?
  스탠드 불빛만 켜져 있는 방은 왠지 그 홀로 있어야만 하는 공간 같았다. 나는 꼭 얼떨결에 순간이동이 된 것처럼 그 복도 같은 방의 복판에서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뭔가 음울함 같은 것이 가득 배어나오고 있었다. 어리석은 감상주의 같은 것이라 속엣 말을 하면서 가방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내 스탠드 스위치에서 손을 주저하고 있을 때, 그가 대답했다. 
  -축구는 여기서도 보여.
  그가 고갯짓을 했다. 창밖은 방배동의 저녁 거리로 고정되어 있었다. 오렌지 빛 가로등 불빛들이 묵묵히 서 있는 풍경. 거대한 집 몇 채 그리고 사이사이에 이끼처럼 낀 다닥다닥한 어떤 것들. 골목길에는 사람들이 지나가지 않고 있었다. 아주 평범한 풍경이었지만 그것을 주시한다는 것은 좀 쓸쓸해지는 기분이었다. 어디선가 축구중계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긴박감 넘치는 중계 소리와 함성은 아련한 추억의 그것처럼 멀리서 들려왔다.
  -어디 말이야?
  -저기.
  그가 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리 멀지 않았다. 바로 밑이었다. 407호실의 창문을 넘어 조그만 집의 창을 또 넘어서였다. 그곳에서부터 TV불빛은 희미하지만 섬광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TV의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사각지대에 몸을 기대고 있는 듯했다. TV주인은 어둠 속에서 그것만을 켜둔 채 잠에 들길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진짜 TV의 시청자는 내 룸메이트 혼자였을지도 모른다. 창과 창을 넘어서, 어떤 선수가 클로즈업되었는지도 확인하기 힘든 그 빛을 보며, 그가 TV라며 웃고 있었다.
  -여기서도 보여.
  -뭐야 이게. 싱거운 녀석. 
  나는 수건을 챙기고 샤워장으로 향했다. 이해할 수 없는 녀석. 별 일도 아닌, 그저 농담이었겠지만, 그의 무기력한 일상 속에서 떠오른 그의 웃음이 내 머릿속에서 오래도록 파동치고 있었다.

  매주 화요일에 그와 나는 함께 등교를 하였다. 3월 마지막 주 화요일에, 학교 앞에 있는 복사집에서 텍스트를 복사하느라 늑장을 부리는 사이에, 정문에 들어서는 그를 발견한 이후부터였다. 그는 화요일 아침수업이 있기는 한데 8시는 너무 일러서 라고 마치 속여서 미안하단 듯 말했다. 그의 어설픈 미소 앞에 나는 음료수 캔을 내밀었다. 그 이후부터였다. 화요일마다 그와 나는 9시에 조금 못미칠 즈음 학숙을 나섰다. 뒤로하는 아침 9시의 학숙에선 기상음악이 흘러나왔다. 나는 항시 늦어도 8시 반이면 학숙을 나섰기 때문에 라디오 DJ를 가장한 사감 목소리와 기상음악이 나오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와 나는 느릿느릿 학숙을 나서다가 기상음악이 나오기라도 하면 걸음을 재촉하고는 음악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부터 다시 평소걸음으로 걸었다.
  -저런 곳에서 사람이 산다는 것이 신기하지 않아?
  사실 그가 말할 때까지 나는 그것이 집인 줄도 몰랐다. 그가 말하지 않았더라면 줄곧 몰랐을 것이다. 그런 고철 꾸러미 같은 것을 엉겨 붙인 것이 집일 줄은. 그런데 그것은 놀랍게도, 아주 가까이, 그것도 부자동네라는 방배동에, 그리고 내 곁에 있었다. 서너 채의 집도 아닌 집들은 거대한 집과 전봇대의 틈바귀에서 어디서 자라기 시작한 지 모를 호박잎들과 함께 숨 쉬고 있었다. 모양새는 정해진 것 없이 제각각이었고, 쓰레기더미 같은 것이 주변에 산만하게 흐트러져 있어서 그것이 더욱 사람 사는 집 같지 않았나 보다. 녹슨 철문 같은 것, 우편함 그리고 우편함에 매직으로 적혀있는 집 주소와 세대주의 이름을 나도 유심히 관찰할 수 있었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사는 방식들이 모두 같을 수만은 없겠지.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아서 지껄였을 뿐이었다. 내 억양은 그리 의미심장하지도 못했고 내가 듣기에도 괴상망측한 말인 듯했다. 그와 나는 이 후 별 말 없이 CCTV를 달고 있는 집을 지나치고 수입차를 닦는 운전기사도 지나쳤다.

  일요일 저녁 10시. 학숙에는 어김없이 요란한 유행가가 흘러 나왔다. 나는 역시 만만한 빗자루를 들었고 H는 대걸레를 들고 화장실을 부지런히 닦고 있었다. K는 정수기 필터를 30분 내내 씻었다.
  -정말 피우면서도 왜 피우는지 모르겠다니깐.
  -그런 질문은 시작하지 않는 게 좋아. 골치만 아프다고.
  그러면서 동시에 연기를 흡입하는 세 명이었다.
  -언제부터 피우기 시작했어?
  -군대에서.
  -실연? 그럼 너는?
  -나는 그냥 심심해서 피우기 시작한 것 같은데, 대학교 1학년 때.

  룸메이트를 생동하게 하는 무엇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지하철에서도 열심히 포켓 암기장을 펼쳤다. 화요일 아침 함께 등교할 때는 포켓 암기장이 더 집요해졌다. 보통 때라면 조금 펼쳤다가 지하철 신문이나 뒤적이기 일쑤였던 것을, 그가 옆에 있을 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더 열심히 암기장의 페이지를 넘겼다. 그는 가만히, 아주 가만히 있으면서 맞은편 유리에 반사되는 제 얼굴을 보거나, 사람들의 표정을 관찰하기만 하였다. 나는 그때 쯤 그가 불쌍하기도 했고, 그의 무기력증에 한편 짜증이 돋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 내 감정을 돌출 시킨 적은 없었다. 단 몇 마디 말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해왔다. 그러나 언제나 완벽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중간고사 기간을 맞아 학원을 잠시 쉬었을 때였다. 가능한 한 학교 도서관에서 오래 버티려 했지만 좀이 쑤셔서 학숙으로 향하고 말았다. 평소보다 훨씬 이른 시간이었다. 룸메이트가 방 안에 있었다. 형광등 불빛은 꺼져 있었고 그의 스탠드만 켜져 있었다. 종종 있는 일이었다. 가끔씩 마주치는 그의 모습은 거의 그래왔다. 그는 그렇게 창밖을 주시하다가 내가 들어서면 처음 만났을 때처럼 멍청한 눈빛을 보내곤 했다. 가까이 있는 것은 무엇이라도 초점 맞추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그는 고집스럽게도 내 얼굴을 지나쳐버렸다.
  -뭐 하는 거야. 시험기간인데.
  저음으로 깔리는 내 목소리.
  -그냥 그렇지 뭐.
  -시험공부는 안 해? 교직이수 하려면 학점도 높아야 할 것 아니야.
  학교에서 끝내지 못한 시험공부를 여기서 마무리 해야만 하는 데, 룸메이트라는 것이 이러고 있으니 갑자기 짜증이 솟아 오른 탓도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왜 이 방 안에 살아있어가지곤, 나를 방해하는 거야 하는 원망이기도 했다. 저음으로 깔려 나가던 목소리는 그의 침묵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땐 머릿속이 온통 시퍼렜다.
  -왜 대답이 없어. 등록금이 아깝지도 않아? 네가 그래가지고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네가 도대체 원하는 게 있기나 하니? 이...
  괴물 같은 새끼야! 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면서 나는 번뜩 정신을 차렸다. 방을 뛰쳐나왔다. 도망치듯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원망스러웠다. 그에게 내 뱉던 온갖 경멸감과 증오가 단번에 나를 향해 돌아서고 있었다. 너는 뭐 얼마나 착실했었니? 너는 뭐 얼마나 위대하니? 너는.... 뭐가 그렇게 떳떳하니? 사실은 그런 룸메이트를 보면서 언제나 미래에는 그를 짓밟고 올라갈 ‘어떤 지위’를 생각해 왔고, 거기에 대해 온갖 쾌감과 연민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으면서, 지금 위선을 떠는 거니. 내가 꾸며놓은 온갖 무기들이 나를 찔러대고 있었다. 나는 수학문제를 암산할 때처럼 눈만 꿈벅대면서 담배만 피워댔다. 그가 나를 쳐다보던 표정이 자꾸만 어른거렸다. 당시 내게 너무도 끔찍했던 것은, 그가 화내는 표정도 아닌 울상을 짓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울상은 오히려 내가 이래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듯했다. 담배꽁초를 내던져 버렸다. 그런데 더 짜증나는 것은, 모레 있을 경제학원론 시험 생각이 한 편에서 떠나질 않는 것이었다. 학숙 건물을 올려다보니 407호의 창은 불이 꺼진 채 닫혀 있었다. 나는 이내 올라가 보았는데 방에선 아무런 인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그 이후 난 학교 철야 도서관을 애용했다. 시험기간인지라 함께하는 등굣길은 없었고 언뜻 마주치는 일만 가끔 있었는데, 나는 뜨끔했지만 아무 일 없었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처음 몇 번은 좀 켕기는 기분이 들었지만 점점 자연스러워졌다. 오히려 어떤 일이 있었다는 내색을 하는 것이, 서로에게 더 안 좋은 상황만 만들 것 같아서 그렇게 했다.
  -시험은 잘 봤어?
  -그냥 그렇지 뭐.
  중간고사가 끝나고 2주 만에 함께 한 화요일 등교시간이었다. 조금 어색했지만, 나는 화해라는 통과의례를 아주 자연스럽게 건넜다고 생각했다. 언제나처럼 환승역인 사당역에서 출발하는 지하철을 타서 우린 나란히 구석에 앉았다. 내가 포켓 암기장을 꺼낼 때, 그도 주섬주섬 가방을 뒤졌고 거기서 그의 MP3 플레이어가 등장하였다. 나는 의례적으로 그것에 대해 몇 가지 물어봐주고 내 단어장에 집요하게 매달렸다. 내가 보기에 대용량 MP3 플레이어는 그의 뭉툭한 손에 그리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그의 귀에 꽂힌 이어폰에선 왠지 MP3가 아닌 라디오가 나올 듯했다.

  -내 룸메이트가 변했어.
  -마치 애인의 변심 이야기 같은 걸.
  -뭐가 어떻다는 건데?
  K는 대게 남의 일에 관해서는 철저히 무심하다는 듯, 아무렴 어떻냐는 듯 이야기 하곤 했다.
  -매우 광적인 취미가 생긴 것 같아.
  -뭔데?
  말하는 내가 짐짓 과도하게 심각한 것은 아닐까 했다. 왜 그렇지?
  -MP3를 광적으로 모으고 있어.
  -뭐. 그런 애들은 흔하다고.
  나는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K는 별로 친하지도 않다던 룸메이트에게 왜 과도한 신경을 쓰느냐는 듯 한 표정을 지었다.
  -뭐. 원래 좀 유별난 애였으니깐.
  -내 룸메는 야동으로만 30기가를 채우고 있다고.

  MP3맨의 MP3 축적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는 곧 이어 데스크탑도 하나 장만하였다. 데스크탑은 언제나 켜져 있었고, 그와 내가 잠을 잘 때도 홀로 MP3를 받고 있었다. 그는 잠을 자면서도 MP3 플레이어를 들었고 화요일 등교 때에도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었다. 이어폰을 꽂은 그의 걸음은 박자에 따라 빨라지거나 느려지곤 했다.
  -40기가나 된다면서 다 채우기나 했어?
  말은 분명 머릿속에선 침착했는데, 목청 끝에서 비틀어진 채 튀어나갔다. 포켓 암기장 때문이었을 것이다. 슬슬 한계를 드러내는 그것. 외웠다고 생각했건만 뒤죽박죽 수많은 단어들이 엉키고 있었다. 수많은 단어들이 어디서 본 듯한 느낌만 자아낼 뿐, 도무지 해석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암기세포의 활성화를 되뇌면서 단어에 매달리고 있었다.
  -이제 반 쯤 들어있나?
  내 포켓 암기장의 페이지는 132p였고, 끝은 376p였다.
  MP3맨은 전과 달리 매우 생동하는 듯했다. 더 이상 무기력한 전의 모습은 없었다. 그는 나보다도 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항시 밤마다 데스크탑 앞에서 MP3를 찾다가, 더러는 새벽에도 잤는데, 그의 일은 MP3보관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저음질로 받았던 것은 고음질 파일로 교체하고, 음반출시연도, 앨범정보, 아티스트, 가사까지 파일에 차곡차곡 집어넣는 일은 꽤나 오랜 정성과 노력을 필요로 해 보였다. 키보드와 마우스를 번갈아 건드리는 그의 손짓은 언제부턴가 매우 능숙해져서 마치 직업으로 하는 사람 같았다.
  -왜 그렇게 모으는 거야?
  그래프를 노려보고 있었는데 그래프 또한 내 시선을 담담히 견디면서 뻔뻔하게 책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그의 마우스 클릭하는 소리는 계속 바쁘게 들려오고 있었다.
  -취미지 뭐.
  종이인형처럼 맥없이 존재하던 그가 MP3 축적에 사력을 다하는 모습은 내 경멸감을 모락모락 피워 올리기 시작했다. MP3를 모으는 그의 광기 어린 모습에서, 인간이라는 것이 저런 것에 충족하면서도 살아갈 수 있는 가벼운 존재이구나 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전에도 좋은 감정은 아니었건만, 연민을 느끼게 했던 그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자, 나는 MP3맨을 정말 싫어하게 됐다.

  5월에서 여름이 다가오기 까지 나는 줄곧 학과와 토플공부에만 전념하였다. 몇몇 과목에서 공개된 내 중간고사 성적은 그리 만족스럽지 못하여 아르바이트를 계속 고집할 수가 없었다. 나로서는 처음 접하는 전공수업에서 고학년자들과 경쟁해야만 했고,  2년 동안 썩혀두었던 머리도 좋지 못한 성적의 한 원인이 되었다. 나는 더욱 숨 가쁘게 공부에 열을 올렸는데 MP3맨은 말도 안 되게 평온하기만 했다. 그에게 그동안 변화가 있었다면 MP3 플레이어와 하드디스크에만 저장했던 MP3 파일을 DVD에 저장하기 시작했다는 것 그리고 언제부터선지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담배 피울까?
  갑자기 쏴아 하고 비가 오기 시작했을 때 그와 나는 몇 주 만에 얼굴을 마주쳤다. 형광등은 꺼둔 채 각자 스탠드와 모니터를 켜고 있던 그와 내가 마주치는 눈빛이 머쓱했나보다. 어쨌든 좋은 타이밍이었다. 연한 바람을 타고 빗물은 창틀에서 두두두두-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는 대답 없이 먼저 담뱃불을 붙였다. 어둠, 반경이 짧은 각자의 조명 그리고 그와 내 담배연기가 방안에서 묘하게 순환하였다. 그때 그의 시선이 오랜만에 창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모니터와 MP3 플레이어 액정에만 향하던 눈이 빗속에 잠긴 주황색 가로등 불빛을 좇으며 초점을 잃었다. 벌써 그와 생활한지 4개월이 넘어가고 있었고 다음 주 기말고사가 끝나면 여름방학이 시작될 참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 나는 이 방의 중앙에 청테이프라도 그어버려서 절단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비 오는 풍경에 넋을 잃어버리고 만 그가 위태로워 보이기 시작했다.
  -담배는 언제부터 피우기 시작했어?
  -네 것을 한두 개씩 몰래 피웠던 것이 사실 처음이었지. 그게 두 달 전인가?
  그가 나를 보고 빤히 웃었다. 그가 가끔씩 내게 얼빠진 눈빛과 함께 친절한 표정을 짓곤 하는 것에 나는 그 어떤 대응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얼른 돌아서서 펼쳤던 책을 몇 장 넘겼다.
  -창문 좀 닫아줄래.
  -난 그만 잘게.
  그는 창문을 닫은 후 MP3 플레이어를 들고 침대로 향했다. 그의 모니터가 꺼지자 내 스탠드 불만 방 한 견에 남겨지게 되었다. 마치 MP3맨을 위한 연극의 독백무대처럼 비춰지고 있지는 않을까 싶었다. 그가 눈을 감지 않고 MP3를 배경음악으로 깔고 나를 쳐다보고 있을 것 같았다. 흰색 스탠드 불빛 안에 있는 나를. 열심히 그래프에 집중하려는 나를. 나는 차마 뒤를 돌아보지는 못했다. 그리고는 그저 온 몸으로 굳은 채, 그래프 속을 헤맸다.

  -시험은 끝났는데.
  -이제부터 또 시작이지 뭐.
  H는 그래도 집에 며칠이라도 내려갔다 올 것이라고 했고, K는 추석이나 되면 내려가겠다고 했다. 나는 언제 내려갈지 아직 계획이 없었다.
  -토플 상급 코스를 신청했어.
  -상당한데?
  -피 터지는 거지.
  그래도 K의 얼굴엔 자부심 같은 것이 번지르르 했다.
  -좀 살면, 방학 때 캐나다 같은 데나 가보는 건데.
  -좀 살면 말이지.
  자기비하 같은 것. 사실 각자를 위한 가면인 것 같다. 한 명이 그런 말을 시작해버리면 끝도 없이 그렇게 되어버리는 분위기. 나는 싫었다. 다들 온갖 야망과 정복욕으로 들끓고 있으면서.

  방학이 시작되어도 전과 같은 생활이 마찬가지로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학원과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다녔고, MP3맨도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이 아르바이트를 늘린 듯했다. 그런데 7월 초순 어느 날. 내가 407호실로 들어섰을 때 그는 짐을 싸고 있었다. 제로에 가까웠던 청소시간 출석률과 처참했던 1학기 성적이었지만 학숙 인원 조정은 2학기 시작과 함께 개시될 것이었다. 어차피 나갈 그였지만, 이것은 너무 갑작스러워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쫓겨나기 전에 제 발로 나가야지.
  그가 수줍게 웃었다. 나는 도와주는 시늉이라도 하려고 했지만 얼마 되지 않는 짐은 박스 두 개로 간단히 끝나버렸다. 그래도 처음 왔을 때는 가방 하나였던 것이 늘어서 박스 두 개와 데스크탑. 왠지 미안한 감정이 먼저 들었다. 그가 나가게 된 것이 내가 잘 돌봐주지 않아서 그런 것만 같았다.
 짐을 다 싼 그와 나는 근처 슈퍼에서 맥주와 과자를 사왔다. 그래도 반년을 함께 했는데 이런 것쯤. 마지막까지 아무것도 안 한다면 케케묵은 감정 같은 것, 서로 단절되어 있었고, 숨겨왔던 감정 같은 것이 계속 내 속에서 떠돌 것만 같았다. 죄책감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비슷한 지저분한 것들이 이후 가끔씩 떠오를 듯했다. 털어버리자고 나는, 종이컵에 담긴 맥주를 연거푸 마셨다. 그의 술잔 역시 바로바로 비워지고 있었다.
  -이제부턴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MP3 수집은 다 끝난 거야?
  그가 묘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순간적으로 뜨끔하였다. 나는 정말 그보다 나은 존재던가 라는 물음이 먼저 들다가, 그래도 어느 정도는 이라는 결론을 내리곤, 술기운을 빌려 오만하게 그와 마주보았다.
  -MP3 모으는 것. 왠지 재미있었어. 모으고 나눠주고 뭐 이런 것이 좀 뿌듯하기도 했어. 그런데 삭제 키 한방에 그건 아무것도 아니더라고. 부질없지 뭐.
  그가 MP3 플레이어를 이어폰으로 감아 박스에 두던 것을 떠올랐다. 그때 그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던 것 같은데 지금 그의 표정은 낙담에 거의 가까워 보였다.
  -너도 성공의 가능성들을 차곡차곡 모으면 되는 거야. 그러면 언젠가 결과가 와.
  -너는 목표가 어디야?
  -우선은 금융계 쪽이 목표야. 좀 바쁘긴 하겠지만 연봉이 좀 되잖아.
  -거기 평생 있을 거야?
  -글쎄. 돈 모이는 거 봐서.
  그게 끝이었다. 그는 갈게라고 하고는 가버렸고, 나도 그럼, 잘가 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룸메이트가 사라진 407호실은 내게 지나치게 넓어 보였다. 형광등 불빛이 방안을 가득 채웠으되 채워진 것은 방안일 뿐인, 그 어디로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그저 2평의 방일뿐이었다. 그것은 창문에 덧댄 구릿빛 철판으로 명징하게 드러나는 듯했다. 지나치게 커다랬던 창문. 학숙 4층까지 50여 개의 창문은 중3짜리 딸을 둔 아주머니의 항의를 받았다고 한다. 총총 빛나는 창문들이 꼭 후레시처럼 빛나서, 맞은 편 사는 딸이 방에 들어가기조차 겁낸다고 하였다. 학숙의 대응은 신속했다. 서편을 향하고 있던 2층 이상의 모든 창문에 구릿빛 철판을 덧대 막아버린 것이다. 룸메이트가 그토록 쳐다보던 창문은 이제, 빛은 커녕 바람도 잘 통하지 않았다. 나는 장학금을 타지 못했다. 무엇이 잘못 되었던지 알 수 없이 내 인생도 평범해 지거나 혹은 그 이하의 수렁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답답했다.

  나는 철판을 발로 차버린다.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렸지만, 그것은 제법 튼튼한지 찌그러지지도 않았다. 청소시간인지 스피커에선 유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복도에서 들려오는 학숙생들의 소음들. 나를 에워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종로에서 용산대책위 분들이 주신 <경향신문>을 손에 든 채 당선 통보를 받았습니다. 편파/왜곡 보도에 맞서고 진실을 알리기 위해 용산대책위 분들의 자비와 후원금으로 무료 배포하는 것이었습니다.
 매일같이 분노와 체념을 중첩시켜야만 하고, 트인 입을 막게끔 해야 하는 잔인한 현실 속에서 크지 않은 상일지언정 당선 통보는 제게 자그마한 응원이 되어줍니다.
내가 쏟아낸 말들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눌 수 있게 된 기회.
이 기회가 입막음을 하는 손가락들 뒤에서 자꾸만 체념을 쌓아올리던 제 자신에게 작은 용기를 주는 것 같습니다.
글을 쓰는 자로서의 전망을 생각하고 있지는 않지만, 어떤 일을 하더라도 권력자의 입막음에 체념하거나 순응하지 않고, 내 안에 요동치는 목소리를 내뱉겠다고 다시 한 번 마음가져 봅니다.
모든 이의 목소리가 가로막히지 않는 현실을 꿈꿔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