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박경흠 학술부장 (trident22@skku.edu)

무도 모르는 요새 속에 초능력을 갖춘 영웅이 사회를 내려다본다. 범죄가 발생하면, 요새에서 나와 악당들을 물리치고 다시 요새로 들어가 언제나처럼 악을 감시한다’ 전지전능한 힘을 가진 한 명의 히어로가 시민들의 안전을 담보하는 일반적인 히어로물의 이야기구조다.

그런데 히어로의 요새를 원형감옥(파놉티콘), 히어로를 원형감옥의 감시자로, 시민들을 죄수로 치환시켜보자. 시민들 모두가 히어로의 존재를 어렴풋이 알고는 있지만, 어느 누구도 그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반면 히어로는 시민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모조리 알고 있다. 파놉티콘 사회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이처럼 기존 히어로물은 작가가 히어로 한 명에게 지나친 힘을 몰아줬기 때문에, 배경이 되는 사회가 파놉티콘적인 모습을 띌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감시자는 누가 감시하는가?”

영화 <왓치맨(Watchmen)>은 이처럼 로마 시인 유베날리스의 의미심장한 물음을 바탕으로 내용이 전개된다. 은퇴한 히어로의 죽음과 이를 둘러싼 음모를 파헤쳐 나가는 동료 히어로들의 이야기는 여느 히어로 영화와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왓치맨의 원작 만화는 영미권에서 ‘코믹 북(Comic Book)이 아니라 그래픽 노블(Graphic novel)로 추앙받을 만큼 그 예술성을 인정받았다.

그토록 왓치맨이 작품성을 인정받는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유베날리스의 물음이 스토리 전반에 걸쳐 우회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사실 왓치맨에 등장하는 히어로들 대부분은 ‘진짜 히어로’가 아니다. 히어로 의상을 입고 있을 뿐 일반 사람들과 똑같은 이들은 힘을 합쳐 악을 감시하고 응징한다. 기존의 히어로물이 한 사람(Man)의 영웅담에 주목했다면, 왓치맨은 평범한 사람들(Men)의 모험담에 가깝다. ‘평범한 사람들’이 왜 그토록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사실 초인적 영웅이 없는 현실에서 파놉티콘화되가는 사회는 심각한 문제다. 현실 속 파놉티콘의 꼭대기란 곧 권력의 최정점이다. 시민들은 히어로의 말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구조란 것이다. ‘사이버 공간에서 개인의 명예를 보호해주기 위해’ 사이버모욕죄 관련 법안을 신설하고, ‘평화로운 시위문화를 정착하기 위해’ 집시법을 개정한다는 것도 사회의 ‘히어로’를 자청하는 그가 보면 옳은 이야기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주장하는 ‘선의의 행동’들이 과연 시민 개개인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그만의 파놉티콘을 더욱 높이 세우려는 것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렵다.

이러한 현실적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왓치맨은 파놉티콘의 대체제인 시놉티콘의 사회를 제시한다. 시놉티콘이란 ‘동시에(Syn)’와 ‘옵티콘(opticon)’이 합쳐진 말로, 권력자와 시민이 동시에 서로를 감시함으로서 권력의 수평을 유지하는 체계를 말한다. 영화 속 고만고만하고 평범한 히어로들은 서로가 서로를 의식적으로 견제하면서 권력을 분배했고, 오랜 기간동안 평화를 지켜왔다. ‘그분’의 독단적 행동에 불만이 많았던 우리 사회 역시 지난해 촛불집회를 통해 국민 모두가 사회의 ‘작은 히어로’가 되는 짜릿한 시놉티콘적 경험을 만끽했다.

그러나 영화도 현실도 행복은 오래가지 못하는 것 같다. 평화를 지켜온 영화 속 히어로들은 음모에 휘말려 모두 죽을지 모르는 위기에 처했고, 현실 속 ‘작은 히어로’들은 범법자로 전락했다. 권력 감시의 선봉장이었던 언론마저 방통위와 미디어법으로 수족이 잘릴 위기다. 가장 높은 그곳, 파놉티콘의 주인은 시놉티콘의 요소요소를 붕괴시키며 자신의 원형감옥을 더욱 높게 짓는데 여념이 없는 듯한 인상마저 풍긴다.

이쯤 되면, 우리 사회 가장 높은 ‘저곳’에 사시는 히어로께서 과연 ‘선’인지 ‘악’인지 구분하기 힘들다. 아무리 착한 히어로라도 요새가 너무 높으면 사회의 진정한 목소리를 듣기가 어려운 법이고, 그의 행동을 시민들이 원하지 않으면 절대적 ‘악’으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물론 히어로께서 ‘사회 전체의 정의’를 위해 그런 결정을 내리셨으리라 생각해도 좋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은, 양적 공리주의의 개념을 처음 주창한 벤담이 실은 파놉티콘을 개발한 장본인이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사회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주장하던 벤담의 발명품이 ‘완벽한 감시 권력의 상징’이었다는 역사적 아이러니라니, ‘공익을 위해’ 힘쓴다는 그의 행보가 결국은 신 ‘빅브라더 사회’를 도래하게 할 것이라는 우려가 드는 것은 우연이 아닌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