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신상현 기자 (sangpa88@skku.edu)

엘리자베스 여왕이 즉위할 때 태어나 지어진 이름 에리사.
이름이 인생을 좌우하는 것일까. 그녀는 항상 왕좌의 자리를 지켜왔다.
현역 시절에는 강력한 공격을 바탕으로 최강자의 자리를, 지도자 시절에는 88 서울올림픽 금메달을,
이에 더해 작년 10월에 자진 사퇴한 태릉선수촌 촌장까지...
항상 최고의 위치에서도 만족하지 않고 쉴 새 없이 노력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어보았다.

# 선수 시절의 이에리사

■ 처음 탁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집안에 탁구대가 있어서 자연스럽게 탁구를 접할 수 있었다. 오빠가 탁구 선수 생활을 했던 것도 도움이 됐다. 사실 주변 사람들은 내가 국가대표 선수 생활을 하던 고등학생 시절에도 지도자의 모습이 더 어울릴 것 같다며 선생님이 되라고 말했다. 하지만 부모님은 내가 자녀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을 이해해 준 것이 탁구를 계속해 나간 계기가 됐다.

■ 우리나라 최초로 세계대회 구기 종목에서 첫 우승을 일궈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얘기해 달라
당시 스포츠계에서 구기 종목 우승이라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다. 워낙 가난하기 때문에 1년에 1개의 대회에 참여하기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개인의 이름이 아닌 국가의 이름으로 참가한 대회라는 것은 나를 더욱 기쁘게 만들었다.
지금은 스포츠스타가 많기 때문에 관심이 분산될 수밖에 없었지만 당시에는 유일했기 때문에 당시 인기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지금 가장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피겨스케이팅의 김연아나, 수영의 박태환도 당시의 내 인기에 따라오지 못할 정도였으니 어느 정도인지 알겠나(웃음)

■ 탁구 열기도 높았겠다.
온 동네에 탁구장이 생기고 탁구 동호인이 급속도로 늘어났다. 오죽했으면 탁구공 공급이 수요를 못 따라갈 정도였다. 탁구공을 구하는 방법은 주변의 아는 선수들을 통해 몰래 빼돌리는 방법 밖에 없었다.

■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올림픽을 2번이나 치렀다. 선수시절 지도자시절과의 차이가 있었을 텐데
선수시절의 우승 또한 기뻤지만 잠깐의 기쁨 후에 다음대회를 준비해야 하는 부담감이 생겼다. 나에게 있어서 승리란 한순간의 기쁨으로만 남았던 것이다.
하지만 지도자로서의 의미는 다르게 다가왔다. 내가 키우고 함께한 선수들이 한 경기를 이기는 것만으로도 좋았고 보람찼다. 이런 것들로 비춰봤을 때 내가 지도자로서의 체질을 갖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 촌장 시설의 이에리사

■ 수백명의 국가대표선수들을 관리하는 자리였다. 부담은 없었나
부담이 안 될 수가 없다. 한 종목의 대표팀을 맡을 때와는 다르게 전 종목 6백명이 넘는 엘리트선수를 지휘하는 자리기 때문이다. 특히 태릉선수촌 건설이래 40년 만에 나온 여성 촌장이기 때문에 갖는 주변 시선들로 인해 처음엔 더욱 부담을 됐었다.

■ 처음 촌장에 부임한 이후 여성이라는 이유로 받았던 차별이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특별히 여성이라는 이유로 주변에서 부정적인 견해를 갖지는 않았다. 다만 일을 처리하기 위해 가장 쉬운 방법이 인간적인 접근임에도 불구하고 밤새 술자리를 하거나 목욕탕을 가는 것 등을 할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 태릉선수촌에서의 입촌한 선수들의 권리 확보를 위해 노력한 유명한 일화가 많다
처음에는 가급적 많은 국민들이 선수촌과 한국 체육의 실상을 알고 문제 해결을 위해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때로는 공론화를 위해 일부러 언론에 먼저 공개를 하기도 했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지도자들이나 선수들의 처우 문제였다. 훈련일수가 연간 105일에 불과해 선수들은 제대로 된 훈련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대로 가다간 한국 스포츠의 미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강제 퇴소 등의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해  해고돼도 어쩔 수 없다는 심정으로 훈련일수를 늘려나가기위한 노력했고 이는 결국 180일로 훈련일수를 늘리는 쾌거로 이어졌다.
시설개선도 마찬가지였다. 기숙사 리모델링 당시 태릉선수촌이 문화재청 소속의 문화재인 까닭에 개축이 불가능하자 체육인 사상 최초로 선수들을 이끌고 문화재청을 찾아가 “한국 스포츠의 역사인 우리 아이들은 살아 있는 문화재”라고 외치며 시위를 하기도 했다.

■ 이러한 행동들은 기존의 촌장들과는 다른 행보였다. 새로운 변화를 지속적으로 추구했는데
선수촌을 먼저 경험했던 선배로서, 무엇인가 후배들을 위해 해줄 수 있다는 기회 자체가 기뻤다.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사회의 모든 것들이 변하고 있음에도 태릉선수촌의 시설은 내가 선수생활을 하는 시절과 다를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선수촌 내부는 여전히 열악했고, 선수들은 여전히 합당하지 못한 임금을 받고 있었다. 심지어는 체육관에는 비가 오면 빗물이 새서 물통을 놓고 있었고 숙소는 습기로 가득 찼다. 이러한 상황들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 이러한 활동 중 비교적 사회적 약자인 여자 운동부들에 대한 권리 신장과 복지 증진을 위해 특히 노력한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여성 지도자들이 배출돼야 하는 당위성을 강조했는데
선수 출신 남성들이 직업으로 계속 운동을 하기는 상대적으로 쉽다. 학연ㆍ지연에 영향을 받아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면서 자연스럽게 지도자로 탈바꿈한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들은 남성들과 같은 능력을 가지도 있으면서 제대로 활용돼지 못했다. 이것이 지금까지 스포츠계가 여성들의 불모지로 평가받는 이유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여성이 무조건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무엇인가에 얽매이지 않은 채 능력을 펼칠 수 있는 기회가 열려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전에 능력이 뒷받침돼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 앞으로의 계획

■ 현재 한국스포츠는 어떠한 상황이라고 평가하는가?
현재 우리나라의 스포츠는 엘리트체육과 생활체육으로 나뉜다. 문제는 엘리트체육에 대한 시선이다. 엘리트체육에서 발생하는 일부 부정적인 사고로 엘리트체육 전체가 문제가 있는 것으로 취급받기 때문이다.
정부의 생활체육 위주의 정책도 문제다. 물론 생활체육 역시 중요하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엘리트체육의 도태와 생활체육의 활성화는 옳지 않다. 적절한 균형이 필요하다.

■ 경기인 출신 여성 메달리스트 1백67명이 ‘범 여성체육인’ 서명운동을 통해 추천을 펼친 것을 계기도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에 도전하기도 했다.
사실 후배들이 지원을 해줘 감사할 따름이다. 처음에는 사실 나조차도 IOC 위원은 정치인이나 경제인 등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만 하는 거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후배들이 용기를 내준 덕분에 이제는 선수 출신이 세계무대에 진출할 시대가 왔다는 깨우침을 얻게 됐다.
또한 IOC 내부 규정상 위원 중 20%는 여성에게 할당돼야 함에도 현재 여성의 비율은 20%가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좋은 기회기도하다.

■ KOC(한국올림픽위원회)에게 추천 받기를 1년째 기다리고 있다. 앞으로도 IOC 위원에 도전할 계획이 있는지
KOC에서 후보자 자격을 줘야 IOC위원에 도전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올림픽이라는 큰 행사를 앞두고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려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아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연맹의 새로운 회장이 선출되는데 바로 요청할 것이다. 물론 내가 돈이 많거나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선수 출신으로서 선수들의 마음을 알고 스포츠가 가야 할 길을 알고 있다는 점은 충분히 타당성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이도 있고 내가 선출돼도 실제로 일을 할 수 있는 기간은 많지 않다. 하지만 내가 힘닿는 한 선배로서, 지도자로서 선수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어느 위치에 있든 그 부분만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 그렇다면 진정한 리더가 갖추어야 것이 무엇이라고 보는가
리더의 위치에 안주하는 것이 아닌 끊임없이 노력하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려는 의지가 중요하다. 또한 단순히 의지로 그치는 것이 아닌 실제로 결단하고 추진할 줄 알아야 한다.

■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다
결혼을 진지하게 생각할 나이는 지난 것 같다.(웃음) 실제로 20대 후반 이후로 결혼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해본 적이 없다. 나는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못하는 성격인데 지금은 지도자로서의 생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마지막으로 대학생들에게 한 마디 해주자면
사람들과의 관계에 소중함을 깨닫고 매사에 최선을 다했으면 좋겠다. 나 역시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많은 덕을 받았고, 이 자리에도 오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