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정윤 사회부장 (kjy0006@skku.edu)

신은 지금 11살이고 판자촌에서 겨우 끼니를 때우며 살아가고 있다. 점심은 학교에서 지원해주는 무료 급식으로 해결하지만 저녁을 먹는 것은 불규칙할 때가 많다. 그나마 저녁을 제공해 주고 공부도 할 수 있었던 공부방이 재정적인 이유로 지난 달부터 문을 닫았다. 공부에 흥미가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학원은커녕 학습지를 배울 돈은 엄두도 나지 않는다. 수업시간마다 매번 사가야 하는 준비물을 사기에도 빠듯한 상황이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버티듯’ 살아가야 하는 상황에서 20살이 됐을 때, 별 무리 없이 우리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자신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론 결과의 원인을 100% 상황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그래서인지 이미 높은 곳에 ‘계신’ 분들은 “열심히 살아서 열심히 벌어라”라고 충고한다. 가난했지만 악착같이 노력해 오늘날 굴지의 대기업을 일으킨 인물들은 힘들었던 과거 덕분에 오히려 더욱 존경받는다. 그런데 이런 ‘악착같은 위인’이 도대체 몇 %나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게다가 이미 격차의 정도도 심각해 노력만으로 극복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어린이날 특집으로 6~17살 아이들 7백90만 명 가운데 1백20만 명이 빈곤을 경험한다는 뉴스가 보도되더니, 그 다음 뉴스에서는 1억 이상 어린이 주식부자가 75명이란다.

제는 어린이의 불평등이 단순히 특정 기간의 지표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 아동청소년 종합실태조사’ 자료에 따르면 빈곤층 부모를 둔 0~2살 자녀는 18.5%이지만, 9~11살이 되면 31.5%로 늘어나는 양상을 보였다. 시간이 지나 아이가 성장함에 따라 오히려 소득격차가 벌어지는 것이다. 특히 사교육 위주로 이뤄지는 우리나라 교육의 특성은 이런 문제를 더욱 고착화시킨다. 성장시기의 경제적 격차는 평등한 교육의 기회를 박탈하고, 이에 따라 발생한 교육 불평등은 어린이가 성장한 후의 경제적 불평등으로 이어진다. 결과적으로 어린이의 양극화는 이후의 이분화된 사회구조를 더욱 공고히 하게 되는 파급효과를 가져온다.

럼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우리나라의 아동복지예산은 국내총생산(GDP)의 0.1%로 OECD 평균의 5분의 1에 그쳤다. 게다가 종부세 환급으로 인해 지방교부세 수입이 감소하면서 결식아동급식비와 보육시설관리 등 최소한의 어린이 복지를 위한 관련 예산이 큰 폭으로 감소했다. 보육 및 아동복지예산의 특성상 지자체의 분담비율이 높다보니 가장 큰 타격을 받게 된 것이다. 이렇듯 ‘어린이’라는 집단은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대표도 없거니와, 그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인식하는 담론조차 형성돼 있지 않다보니 독립적인 ‘권리의 주체’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똘똘 뭉친’ 소수 어른들의 욕심은 어린이들을 하나의 주체라기 보다는 어리고 귀여운 인형 정도로만 치부해버리는 듯하다.

미 ‘이벤트성’으로 물들어버린 5월 5일 어린이날은 그래서 슬펐다. 모처럼 나들이 나온 가족들로 붐비는 놀이공원과 동물원, 어린이들만을 위한 행사를 진행하는 길거리 곳곳의 풍경들. 그리고 연예인 몇 명을 초청한 뒤, 몸이 아프거나 경제적 사정이 어려운 어린이들을 위한 기금 마련 행사를 진행하는 TV 프로그램들도 이젠 익숙하다. 그러나 결코 어린이날을 즐길 수 없는 빈곤층 가족과 불평등이라는 사회 구조적 문제는 형식적인 모금과 즐거운 어린이날의 모습들에 의해 가려져 있다.

이상 어린이를 ‘작고 귀여운 인형’으로만 취급해서는 안된다. ‘아이들이 희망이다’라는 형식적인 말에서 벗어나, 어린이를 최소한의 복지를 보장해줄 필요가 있는 권리의 주체로서 인식할 때 우리 사회는 진정한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