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諸葛亮)은 자기 재주만을 믿고 군령을 어긴 마속(馬謖)을 참형에 처한 후 흐느껴 울었다. 군령을 어기기는 했지만 신임했던 장수의 단 한 번 실수를 관대하게 처리할 수는 없었을까? 제갈량은 가혹하다할 만큼 엄하였다. 그럼에도 “그의 형벌은 매우 준엄했지만 원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역사는 평가한다. 공자(孔子)는 낮잠을 즐기는 재여(宰予)에 대해 “썩은 나무에는 조각할 수 없다(朽木不可雕)”며 나무랐다. 제자의 낮잠을 관용의 눈빛으로 보아 넘길 수는 없었을까? 그보다 심한 욕이 없을 정도로 나태한 제자를 엄혹하게 꾸짖었던 공자, 그도 만세의 사표로서 존경받는다.
제갈량과 공자가 이같은 평가를 받는 것은 관(寬)과 엄(嚴)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의 미학을 잘 이해하고 실천했기 때문이다. 관(寬)과 엄(嚴)은 상반되고 모순된 개념처럼 보인다. 그래서 혹자는 관대함과 관용만을 중시하고 혹자는 엄격과 준엄만을 강조한다. 그러나 관(寬)과 엄(嚴)에 대한 선현들의 인식에는 남다른 점이 있었다. 관대한 사람을 좋아하고 엄격한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 세상 이치인데, 선현은 “관이견외, 엄이견애(寬而見畏,嚴而見愛)”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관대하게 대해도 두려워하도록 하고 엄격하게 대해도 좋아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은 무슨 이치인가? “관대하게 대함으로써 남들이 좋아하게 하면 그 좋아함은 일시적인 것이 되며, 엄격하게 대함으로써 남들이 두려워하게 하면 그 두려움은 힘이 미치는 곳에 국한되기(以寬得愛,愛止於一時. 以嚴得畏,畏止於力之所及)” 때문이다. 선현에게 있어 관(寬)과 엄(嚴)은 양립할 수 없는 모순된 존재가 아니었다.
이같은 도리를 교육 영역에 적용하면 교육자로서 우리는 더욱 반성해야 한다. 때로는 관용과 아량으로 포장된 무책임이 횡행하고 때로는 엄격과 준엄을 빙자한 사감의 횡포가 난무하기 때문이다. 학칙 위반은 학생보다 교육 담당자가 더 많이 범하고 있다. 성적이 낙제 점수임에도 불구하고 아량이라는 이름으로 학점을 준다. 학업수행의 성과를 초월하는 후한 학점을 하사하고, 졸업 예정자는 아무리 불성실하더라도 좀 더 후한 점수로 졸업시켜 준다. 졸업시험 성적이 아무리 바닥권이더라도 이미 취업한 학생의 인생을 망쳐서야 되겠냐며 규정을 무시하고 커트라인을 무한대로 하향한다. 그러면서 이 모든 것들이 극심한 취업난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라고 미화한다.
이것은 관용도 아량도 아니다. 단지 무책임한 인심 베풀기에 불과하며 교권의 남용일 뿐이다. “대학가의 학점 부풀리기” , “학점 인플레가 도를 넘어섰다”는 타이틀이 아직도 기사거리가 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은 교육의 목적과 책임을 망각한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이다. 최소의 시간과 노력으로 최고 학점의 취득을 갈구하는 학생들의 의식에도 문제가 있지만, 피교육자에게 이 슬픈 현실에 대한 책임을 전가할 수는 없다. 그런 학생이 존속하는 것도 교육자의 책임이고 그런 풍토를 바로잡는 것 또한 교육기관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스승으로서 엄(嚴)하다는 것은 권위를 앞세워 위임받은 권한을 멋대로 휘두름이 아니라 원칙과 규율을 준수하고 철저하게 적용함을 의미한다. 진정한 아량과 관용은 개인적인 희생과 봉사를 통해 베풀어지는 것이지, 원칙과 규율을 위반하여 학생들에게 부적절한 이익을 제공할 때 쓰일 수 있는 말이 결코 아니다. 오늘날은 관대한 스승이 되기보다 우선 엄한 스승이 되어야 한다. 학생을 교육 대상자로 보기보다 섬겨야 할 고객으로 떠받드는 현실 속에서, 엄한 스승 노릇하기는 더더욱 쉽지 않다. 그러나 “가르친다는 것은 학생들을 올바르게 이끈다는 것이지 그들의 환심을 얻고자 함이 아니므로 스승은 반드시 도리를 지키면서 의(義)를 주장해야 한다. 그래야 제자들과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을 수 있다.” 스승이 그런 존경을 받아야 교육의 도(道)가 바로 설 수 있는 법이다.
관(寬)과 엄(嚴)의 진정한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철저하게 구현해야 한다. 선현이 보여준 양자간의 조화와 경계의 미학을 대학 교육의 현장에 부활시켜야 한다. 그래야만 “F학점의 천재는 가고 A학점의 둔재만 넘친다”는 풍자로부터 우리 대학이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