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박경흠 학술부장 (trident22@skku.edu)

무현 전 대통령 서거를 두고 인터넷에서는 그의 죽음을 둘러싼 수많은 음모론이 판치고 있다. 이처럼 음모론이 인기를 끄는 까닭은 대중에게 많은 지지를 얻었던 인물이 갑자기 사라지게 되면 사람들은 어떤 ‘설명’을 통해 상실감의 탈출구를 찾아내려 하기 때문이다. 유명인의 죽음 뒤에는 언제는 그 죽음을 종용한 ‘가해자’가 있고, 결국 유명인이 죽은 이유는 다름 아닌 그 ‘가해자’ 때문이라는 논리가 음모론의 핵심이다. 즉 한 사람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피해자-가해자 논리로 규정하면서 “순전히 누구 탓”으로 자신들의 분노를 돌리려는 일종의 보상 심리인 셈이다.

러나 한가지 아쉬운 것은, 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누구 탓’으로 돌리려는 수많은 음모론 때문에 오히려 ‘전 대통령조차도 자살을 할 수 밖에 없는 사회적 구조’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수반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소위 검찰의 표적수사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곤 하지만, 이는 노 전 대통령이 자살을 하게 만든 ‘상황 논리’정도다. 중요한 것은 ‘자살’ 그 자체다. 어째서 우리 사회는 국가 권력의 최고 수장이었던 사람마저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들 만큼 자살이라는 병리 현상에 취약한 시스템을 갖고 있을까.

는 아마 우리 사회가 언제부터인가 ‘이 일을 마땅히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보다, ‘이 일을 하지 않으면 닥칠 고통’을 더 강조하는데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은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를 배우기보다 공부를 ‘못하면 대학에 못간다’ 식의 생존 논리를 주입받는가 하면, 대학생이 돼서도 사회는 이들에게 취업을 못하면 감내해야 할 수많은 고통을 강조하며 치열한 취업 경쟁으로 내몰고 있다.

렇게 하루 하루를 급급하게 살다보면 어느새 꿈꿔왔던 장밋빛 미래는커녕 ‘고통’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힌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나이가 들수록, 직급이 올라갈수록 개인이 견뎌내야만 하는 고통과, 그에 대한 공포는 비례해 커져만 간다. 문제는 언젠가 개인이 그 공포를 이겨낼 자신이 없다면, 그 고통을 감내할 수 없는 상황에 다다르게 되면 선택지는 하나뿐이라는 사실이다. 삶의 목적이 ‘고통을 피하는 것’이 되버리는 순간, 개인의 삶은 말할 수조차 없이 피폐해진다.

대통령의 죽음이 국민의 심금을 울리는 것 역시 그의 유서에 적힌 말 못할 고통에 대한 공감과 연민의 감정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꿈과 열정이라는 모토로 선거운동을 벌여 대통령에 당선됐다. 노 전 대통령이 후보시절 한국 사회에 남긴 꿈, 열정과 같은 희망적 가치들은 국민들에게 많은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심리적 압박과 고통을 견디다 못해 자살을 선택했고, 대통령의 이러한 인간적 고뇌는 일반 국민들이 겪고 있는 여러 고민들과 맞닿아 있었다. 국민들은 노 전 대통령의 불행했던 말년을 떠올리며 측은지심 반, 동병상련 반의 감정으로 그의 서거를 애도했던 것이 아닐까.

도라가 제우스가 준 상자를 열자 온갖 악(惡)이 세상으로 쏟아져 나왔지만, 상자의 안에는 ‘희망’만 남아있었다고 한다. 어떠한 시련이 닥쳐와도 인간이 품은 희망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신화적 해석이라 할 만 하다. 하지만 이번 노 전 대통령의 서거는 우리 사회 시스템이 얼마나 쉽게 희망을 망각할 수 있는지 경종을 울리고 있다. 우리 삶과 사회에 ‘꿈’과 ‘희망’은 얼마나 남아있는지,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