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떠나는 일인 여행은 궁극적으로 ‘나’를 떠나는 일이다. 지금의 ‘나’를 떠나서 ‘내’가 미처 몰랐던 ‘나’를 찾기 위해 떠나는 일이다. 그러므로 ‘나’를 찾는 일이 반드시 멀리 있는 여행지여야 할 필요는 없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여행도 많다. 이 글 읽기를 멈추고 두 눈을 살며시 감아보라.
무엇이 보이는가? 검은 장막과 그 앞을 스치는 희미한 어떤 빛이 보이다가, 점차 안정이 찾아오면서 장막 너머의 일상들이 차단되고 ‘내 안의 다른 내’가 나타날 것이다. 두 눈을 감기 싫으면, 하늘을 쳐다보라. 맑은 하늘에 그려지는 ‘꿈꾸던 나’를 만나는 일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여행이며, 지상에서 가장 먼 여행지에 다녀오는 일이다.
이 여행이 맘에 안 들면, 조금 움직여서 책을 보라. 책을 다 읽고 나면 타인이었던 저자는 ‘내 친구’가 되고, ‘내’가 어려울 때마다 ‘내’ 앞에 나타나 ‘나’를 도울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내’가 몰랐던 ‘내 안의 나’를 찾게 해주는 조언자가 될 것이다.
필자가 여행 중인 『김삿갓 풍자시 전집』을 소개하려 한다. 한 번에 독파한 뒤 꽂아두고 마는 책이 아니라, 수시로 펴드는 책이다. 풍자시는 사회가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울 때 자주 등장하는데, 한국현대시사에서도 풍자시의 조류는 평탄하지 않다. 풍자시의 등장은 사회에 그 이유가 있지만, 동일한 사건 앞에서 우리의 반응이 각각 다르듯이 근원적으로는 시인의 개인적 성향에 달렸다.
『김삿갓 풍자시 전집』은 <풍자시>외에도 <인도주의 사상과 평민 사상을 표현한 작품들>, <영물(詠物)시>, <자연 풍경시와 향토시>, <연정(戀情)시>, <과(科)시>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체적 정취는 풍자풍이다. 김삿갓(본명 김병연, 1807.3.13~1864.3.29)이 누구인지 모르는 한국인은 없을 것이듯이 그의 시는 방랑객이었던 그의 삶의 반경을 반영하고 있다.
천하를 돌아다니되/다 환영하여/나라를 일으키고 집을 일으키는/그 세력이 가볍지 않다.//
갔다가 다시 오고/왔다가 다시 가는 사이에/산 사람을 능히 죽이고/죽을 사람을 능히 살구어.//
아무리 장사라도 이게 없으면/종시 힘을 못 쓰며/바보라도 이것 있으면/반드시 이름을 떨치니―//
부자는 잃을까 무서워하고/가난한 사람은 얻으려고 애써/몇천 몇만 사람이/이 속에 늙어가나.
<돈> 전문
원문이 <錢>이라고 되어 있는 위 시에서 우리는 김삿갓이 살았던 19세기 초에도 지금과 전혀 다르지 않게 ‘돈’이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했음’을 확인하면서 무척 놀라게 된다. ‘돈’으로 사람을 좌우하는 근대화의 한 풍조가 19세기 초에도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공간 이동 없이도 김삿갓을 만나고, 19세기까지 긴 여행을 하면서 그의 조언을 들었다.
덧붙여서 글쓰기야말로 ‘나’를, ‘미래의 나’를 만나는 가장 탁월한 여행임을 말하고자 한다. 글쓰기는 우리를 어두운 일상에서 빛의 세계로 이끄는 진보적 여행이다. 이제 필자의 진보적 여행도 마쳐야 할 때다.
진순애(글쓰기의 기초와 실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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