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성>에서 보이는 차범석의 동성애관
<장미의 성>에서 차범석이 이분법적 사고의 ‘저쪽’에 자리 잡고 있는 존재를 작품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사회 전체에 널리 퍼져 있는 이분법적 사고에 대한 문제제기를 한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서 제기한 것이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사회의 기본 틀에 저항하거나 중심 이데올로기를 해체하려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한 채 ‘자살 기도’라는 비극적인 세계 인식 정도에만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 사회에서 억압당하고 있는 존재들을 적극적으로 인식하며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는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단순한 관심 표명 정도에 그쳤다는 것이다.
작품 내 등장인물들과 동일시되어야 하는, 그래서 경계선 너머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지만 경계선 안쪽으로 자리를 옮겨 그 의미를 찾아주어야 하는 작가의 시선이 동일시를 포기하였다. 작품 내 상황에서만이라도 경계선 밖의 인물들이 현실적 의미를 가져야만 작품 밖 현실과 갈등을 하며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게 되는데 그 최소한의 존재 의미마저도 상실당한 채 묘사된 것이다.
이 현상은 무엇에서 비롯된 것인가. 사실 차범석의 작품에는 경계선 밖에 존재하고 있는 인물들이 다수 등장한다. <산불>의 점례, <열대어>의 진우, <스카이라운지의 강사장>의 강칠선, <파도가 지나간 자리>의 고영애 등은 <장미의 성>의 배영도와 마찬가지로 경계선 밖에 위치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 등장인물들을 경계선 밖으로 몰아낸 것은 가부장제이다. 이들은 가부장제 사회 하에서 어떤 형태로든 억압 받는 모습으로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은 작품 내에서 긍정적 모습으로 형상화되는 것이 아니라 결정적 순간에 와서는 단죄의 대상으로 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장미의 성>에서 윤병희의 욕망은 성적 대상인 남성의 부재로부터 비롯되지만 그것을 주장하는 순간 가부장제를 옹호하는 인물들(시어머니, 딸)에 의해 결국 자기의 성은 무너지고 만다. 이것은 작가인 차범석이 경계선 밖의 것을 동일시하지는 않은 채 대상으로만 관계하고 있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며, 그 속에는 가부장제도의 긍정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1960년대에 발표된 차범석의 작품을 보며 적지 않은 사람들이 동성애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점을 주목하며 작가도 혹시 그런 경향이 있지 않은가하는 의구심을 표현했었다. 그러나 이런 의구심은 경계선 밖의 것들을 작품의 대상으로 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지 않은 가운데서 나온 말 그대로 의구심에만 머무는 것이다. 그리고 의구심은 그것에 그쳐야만 한다. 어느 누가 <왕의 남자>의 이준익이나 <쌍화점>의 유하 감독을 동성애자로 보는가. 동성애와 관계된 몇 개의 작품이 있다고 해서 그런 경향으로 몰아붙이는 태도는 그릇된 것이다. <장미의 성>을 비롯한 일련의 작품에서는 작가 차범석에게서 가부장제도라는 정반대의 이념이 자리 잡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적어도 작품에서는 말이다.현재원(학부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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