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영인 기자 (youngin09@skku.edu)

정크아트(Junk Art:일상생활에서 나온 폐품을 소재로 작품을 창조하는 예술)의 불모지라는 한국에 한 줌의 씨앗을 뿌린 사람이 있다. 바로 정크아티스트 오대호이다. 버려진 물건을 모아 메시지가 담긴 새로운 작품으로 만들어 내는 그의 창작활동. 그리고 현실에 대한 솔직하고도 당당한 그의 태도는 인터뷰 내내 묘한 흥분을 줬다. 이른 아침, 충북 음성에서 그를 만났다.

 

김영인 기자(이하:김) 정크아트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오대호 작가(이하:오) 어릴 때부터 만들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영향으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업을 했다. 제조업을 했는데 그 당시에도 운영보다는 공장에서 쓰레기로 나오는 부품들에게 관심이 더 가더라. 그냥 버리기엔 너무나 아름다웠던 부품들로 조금씩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주위 사람들의 반응이 생각 외로 좋았다. 그때부터 작품 활동에 대한 막연한 꿈을 키운 게 아닌가 싶다. 이에 반해 사업은 나를 계속해서 피폐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과감히 정리했고,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김: 급작스레 사업을 그만두고 시작한 창작활동이 순탄하지만은 않았을 것 같은데
오: 처음 3년간은 정말 ‘개고생’ 했다(웃음). 무엇을 시작하기에 45살은 늦은 것만 같았다. 특히 내가 미대에서 미술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사람들을 어떻게 따라잡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가장 컸다. 이에 내가 생각한 해결책은 ‘그들보다 세 네 배 넘치는 노력’이었다. 무작정 혼자 이곳(충북 음성군)으로 내려와서 2년 남짓 새벽 5시부터 저녁 10시까지 작품 창작에만 몰두했다. 그 당시 실어증도 걸리고 영양실조로 쓰러지기도 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이 만들며 직접 부딪히는 일 뿐이었다. 

김: 그러한 시기를 겪으며 예술적 성장을 이뤘던 것 아닌가
오: 당연하다. 물론 그런 시기를 거치고 내가 갑작스레 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무엇인지 모를 자신감이 생겼다. 나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가끔씩은 회의감도 느꼈지만, 모두 겪어 내야 할 것들이었고 나는 성공적으로 견뎌냈다. 또한 톨게이트 비용을 아끼기 위해 국도를 이용했는데, 이 같은 경험 또한 나를 성숙하게 했다. 현재 말하는 Slow City(△시간 △자연 △환경과 우리 자신을 존중하며 느긋하게 살기)에 대한 관심이 생겼고 이를 작품에 적용하게 됐기 때문이다. 또한 정해진 형식이 아닌, 나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자유롭게 소통하는 법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다.

김: ‘국내 최초 정크 아티스트’로 수식되기도 하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오: 사실 나는 잘 모르겠다. 그저 나의 작품이 유명해지고 나에 대한 인지도가 높아지니 주변에서 그렇게 날 부르는 것뿐이다. 그러나 내가 누군가에게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보람을 느낀다. 정크아트분야를 함께 개척해 나갈 사람들이 생긴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영감을 줬다고들 하는데, 이런 말을 들을 때면 기분이 묘하다.

김: 외부에서 평가하는 오대호가 아닌, 본인이 정의하는 작가 오대호는 어떤가
오: 나는 내가 작가가 아닌 그저 언제나 고물을 주울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즉, 나는 정통 예술가는 아니다. 그러나 만약 내가 미대를 나온 정통 예술가였다면, 지금과 같은 꿈을 꾸지 못한 채 그저 악착같이 내 이름을 높이는 것에만 치중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행히도 그렇지 않고, 생활과 관련된 창작 활동을 하는 사람이 됐다. 이해를 위해 긴 설명이 필요한 것이 아닌, 누구나 보고 바로 느낄 수 있는 작품을 하는 사람이 바로 나다. 어찌 보면 이 방식이 당연한 것 아닌가? 예술은 공부를 많이 한 특정인이 아닌 모두의 것이지 않나.

김: 국내 미술계의 현실상 정통 예술가로 인정받기 위해서 미대를 나와야 한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오: 우리나라는 한 신진작가가 주류 예술가로 자리매김하기까지 출신 미술대학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건물을 건설할 때 건설가격의 1백분의 1 이상의 값이 나가는 조형물을 설치해야 하는 법을 봐라. 물론 5년 전에 없어지긴 했지만 이 법은 국내 미술계의 현실을 보여준다. 신진작가는 이런 기회를 얻어야만 하기에 작품을 추천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교수에게 쩔쩔맨다. 이는 교수가 후계자를 양성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말이 좋아 후계자 양성이지, 실제로는 교수의 절대 권력 강화를 위한 절대반지 같은 것 아닌가? 나는 이것을 예술계의 못된 관행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작가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도권의 부하를 만들어 내는 것 같기 때문이다.

김: 작품을 많이 창작하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어떤 이유에서 다작(多作)을 하는지
오: 우선은 너무 늦게 시작했기에 더 늦기 전에 꿈을 빨리 이루고 싶은 마음에서다. 그래서 나는 60살이 되기 전에 1만 개의 작품을 창조해 낼 것이다. 현재 5천여 개 정도 만들었으니 절반 정도 온 셈이다. 또한 많이 만들어야 많이 팔 수 있는 것 아닌가(웃음)? 이런 다작에는 경제적인 논리도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작을 하면서 초창기에 겪었던 설렘, 즉 내가 만든 것을 보고 내가 반했던 것은 좀 줄어든 것 같아 아쉽다.

김: 예술가가 경제적 논리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새롭다. 그러나 때로는 이것이 상업적이라고 비판을 받는 근거가 될 것 같다
오: 내가 작품 활동을 하기에 충분한 돈을 가지고 있었다면, 순수 작품 활동에만 전념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가난한 예술가나 소위 ‘헝그리 정신’ 등을 운운하지만 나는 이것이 핑계라고 생각한다. 작품 활동을 할 돈조차 없으면서 무슨 활동을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자칫하면 내가 꾸는 원대한 꿈이 중단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남들처럼 점잖게 돌려 말하기를 바랄 수도 있지만, 나는 그럴 수 없다. 작품 활동을 하는 사람으로 거짓되고 싶진 않기 때문이다.

김: 앞으로도 계속될 예술 활동과 관련해 미래의 계획을 밝힌다면
오: 작품의 소재가 버려진 물건이라 많은 사람들이 나의 작품을 환경적인 면에서 해석하는 것 같다. 그러나 딱히 하나에 집중한다기보다 △과학 △예술 △환경을 조합하는 활동을 하고자 한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희망이나 미래에 대한 꿈을 심어주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 내 작품이 계기가 되어 누군가 꿈을 발견한다면 굉장한 일 아닌가? 또한 지금과 같이 실생활과 밀접한 예술을 하는 사람이고 싶다. 그리고 나의 다작 1만 점의 목표를 이룰 것이다. 이를 위해 ‘나’에게 충실한, 언제라도 작품을 창작할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있는 진짜 사람 오대호가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진정한 예술가를 양성하는 미술센터를 설립하고 싶다.

김: 대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오: 내가 정통적인 것에 목을 맸다면 지금과 같을 순 없을 것이다. 나는 나만의 길을 걸었다. 그게 비록 ‘고물 덩어리가 무슨 작품이냐’는 등의 비난을 받는 일이었어도, 나는 그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했기에 꾸준히 노력한 것이다. 물론 남들이 닦아 놓은 길을 수월하게 갈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2인자의 길이기 때문에 자신의 길을 찾아야만 한다. 이를 위해선 우선 내 자신의 정립이 필요하다. 자신의 남은 인생을 지금 정립하지 않으면 나는 진다고 생각해라. 그리고 어떤 방식이어도 상관없으니 차근차근 본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 이를 통한다면 돼먹지 않은 자존심과 같은 마음의 거품을 걷어낼 수 있고, 보다 쉽게 자신만의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