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미(<문화인류학> 강사)

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한 남자가 있다. 이 남자는 얼마 전 얻은 자신의 아이를 안고 컴퓨터 앞에 앉는다. 그리고는 모니터 속의 한 여인과 대화를 나눈다.
“아이가 당신을 닮아서 너무나 예뻐요. 너무 사랑스러워요.”
그러자 여자가 대답한다.
“네, 너무 예뻐요. 제 품에 안아보고 싶네요. 당신이 잘 키워줄 거라 믿어요.”

이 장면은 며칠 전 TV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 ‘구글 베이비’의 한 장면이다. 여기 나오는 여아는 남자 주인공이 얼마 전 10만 달러를 들여 얻게 된 그의 소중한 딸이다. 그는 동성애자였고 애인과 함께 아이를 갖고자 했으며 수소문 끝에 미국의 대리모를 통해 아이를 구입(?)하게 된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대리모를 통해 아이를 얻은 후 주변의 동성애자들이 그들만의 아이를 원한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 후 직접 이 사업에 뛰어들게 됐다는 사실이다. 그는 가까운 동성애 커플에게 인터넷을 통해 난자를 구할 수 있게끔 도와준다. 1회 난자를 판매하는 가격은 8천5백달러. 난자 판매 여성은 기혼인데 그 돈으로 구입한 집을 꾸밀 것이라고 말한다. 그 난자와 의뢰인의 정자를 수정시킨 주인공은 수정란을 착상시킬 값싼 대리모를 찾기 위해 인도로 떠난다. 인도의 한 대리모회사. 그 곳의 여인들은 각자 집을 사기 위해, 혹은 아이의 교육비를 구하기 위해 대리모를 자청한 것이다. 장면이 바뀌고 분만실에서는 이미 아이를 낳기에는 너무 늦어 보이는 한 인도 여인이 신음 소리도 한 번 내지 않은 채 허공을 바라보며 아이를 낳는다. 그 아이는 낳자마자 다른 곳으로 옮겨진다. 이렇게 해서 또 한 명의 구글 베이비가 탄생한 것이다.

집을 사겠다는 인도 여인은 자신의 새 집을 장만하고 난자를 판 여성은 대금의 일부로 장만한 장총을 가지고 집 뒷켠에서 남편과 사격 연습을 하면 즐거워한다. 어린 딸아이에게 맞는 소형 장총까지 장만하여 딸아이에게 사격 연습을 시킨다.

동양에서는 고래로부터 아이가 탄생하기까지 엄마가 아이를 품은 열 달의 기간도 매우 소중한 것으로 여겨 아이가 태어나면 바로 한 살의 나이를 먹게 한다. 그만큼 부부가 아이를 만들고 엄마가 아이를 잉태하는 기간이 숭고한 것이며 엄마의 뱃속에서 성장하고 영글어 가는 아이도 그만큼 힘든 과정을 겪은 것이라 여기는 것이다. 그 열 달을 그저 무심하게 아무 관심 없이 빨리 하루하루가 가길 바라는 대리모의 뱃속에서 아이는 무얼 듣고 무얼 느낄 것이란 말인가? 더구나 부부가 아이를 잉태하는 순간은 또 어떠한가? 서로의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가장 서로를 사랑하는 순간에 자신의 짝을 닮은 아이를 원하는 간절함을 담아 아이를 갖게 되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구글 베이비가 탄생하기까지 그 어떤 부분에도 이런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아이를 갖고자 하는 동성애 커플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들도 보통의 커플들처럼 서로를 반반씩 닮은 아이를 왜 갖고 싶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아이를 가질 방법이 달리 없는 그들에게는 이 방법이 최선일 수 있음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과정에 돈이 개입되고 돈 때문에 이뤄진 행동에 기인하여 아이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왠지 모를 슬픔과 두려움이 앞선다.

이 모든 게 지나친 자본주의의 광기 앞에서 허우적거리는 인간들의 표상인 듯 보여서 더욱 더 안타깝다. 아이는 결코 소유물이 아니다. 그렇기에 애완견 고르듯이 난자를 고르고 돈을 주고 산 대리모의 배를 빌어 아이를 낳는 것은 결코 동의하기 어려운 방법이다. 그 아이가 성장하면서 느껴야 하고 받아야 할 고통을 한번이라도 생각해 본 것일까? 먼 훗날 아이가 자신의 엄마가 누구냐고 물으면 뭐라고 답해줄 것인가? 인터넷 안에서 너의 엄마를 구입했다고 말해줄 것인가? 자신을 낳아준 엄마를 찾아 온 아이에게 난 단지 난자만 팔았을 뿐이라고 말할 것인가? 그러면서도 아이를 원하는 그들에게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할 수 없는 현실이 가슴 답답할 뿐이다. 하지만 부모로서 느끼는 진정한 사랑을 실현하려면 구글 베이비보다는 입양이라는 방법이 보다 인간적일 것이라 여겨진다.

우리는 미래의 자손들에게 많은 것을 물려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손들은 우리의 그림자 속에서 또 다른 미래를 낳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을 사는 우리는 필요 속에 만든 여러 산물이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지 않게끔 보다 신중해야만 한다. 입에 달다고, 몸을 편하게 한다고 덥석 입에 물고 손에 들어서 삭막한 내일을 만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구의 정상화와 마음의 온난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