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트윈스 봉중근 선수

기자명 유정미 기자 (sky79091@skku.edu)

 

완연한 가을 향기가 나는 금요일 밤, 188cm의 큰 키에 다부진 체격을 자랑하는 훤칠한 야구선수가 기사 마감으로 분주한 신문사를 찾았다. 그는 자신이 속한 야구 팀 ‘LG트윈스’의 워크숍이 끝난 지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지쳐있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특유의 건강한 웃음으로 인터뷰 시간을 훈훈하게 채워줬다. ‘한화이글스’의 류현진 선수, ‘SK와이번즈’의 김광현 선수와 함께 한국의 국보급 왼손잡이 투수로 널리 알려진 봉중근 선수. 혹자들은 “야구는 투수놀음이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 말에 걸맞게 그의 큰 왼손에는 노력이란 이름을 가진 영광의 굳은살들이 박여있었다.

#1. 그는 그렇게 시작했다

■ 처음에 야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집안의 반대는 없었는지도 궁금해요
야구를 처음 시작한 건 초등학교 2학년 때에요. 저희 학교에 야구팀이 있었어요. 선수들이 유니폼 입고 슬라이딩 하는 모습, 경기장에서 흙먼지 냄새 맡는 모습을 구경하는 게 좋았어요. 그래서 감독님께 여쭤봤죠. 저도 야구를 할 수 있겠느냐고. 그런데 감독님이 제가 키도 크고 그러니까 흔쾌히 허락하시더라고요. 어머니는 하고 싶은걸 다 하라고 하는 성격이셔서 많이 도와주셨죠. 반대로 아버지가 많이 불편해 하셨어요. 되게 화도 내셨고. 아무래도 누나 셋에 아들 하나니까 공부를 시키고 싶으셨나 봐요. 하지만 저는 운동이 너무 하고 싶었죠. 그래서인지 처음에 운동을 시작할 때는 되게 힘들었어요. 그래서인지 그렇게 순탄하게 야구를 시작한 것 같지는 않아요.

■ 고교시절 전국대회에서 큰 활약을 거두셨잖아요, 이때의 감회가 어땠나요
‘이제부터 시작이구나’라고 느꼈어요. 그 때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는데, 그 때 봉황기, 황금사자기, 청룡기를 타면서 3관왕을 했죠. 그때가 아마 제가 봤을 땐 야구를 시작하게 된 것에 대해서 가장 후회를 안했던 때 같아요.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얻을 걸 다 얻었다는 생각도 들었었죠.

■ 학창시절 재밌는 에피소드가 있으면 들려주세요
두 가지가 기억이 납니다. 첫 번째는 맞는 게 너무 싫어서 야구를 그만둘 뻔 했던 일인데요. 남들보다 조금 더 잘한다는 이유로 선배들한테 아무 이유 없이 맞기도 했어요. 그게 너무 싫어서 한 번은 집합하는데 뛰쳐나왔어요. 그런데 동료들이 제발 좀 도와달라고 가지 말라고 잡더라고요. 그렇게 제 일탈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죠. 다른 하나는 웃긴 기억이에요. 중학교 때 저학년들은 훈련 중에 물을 못 먹었어요. 선배들만 먹을 수 있었죠. 더운 여름, 물이 먹고 싶었던 저와 친구는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진 사람이 자기 코를 쳐서 코피를 내기로 했어요. 그렇게 코피를 내서 둘이 수돗가에서 사원하게 놀고 물먹고 그랬던 적이 있었어요.

■ 타자로 데뷔했다면 더 좋은 기량을 보였을 것이란 얘기를 들었어요
아직도 미련은 많이 남아 있어요. 지금도 왠지 저만의 자신감이라고 해야 하나(웃음). 제가 방망이를 종종 잡거든요. 가끔은 공보다는 방망이를 잡을 때가 더 뿌듯할 때도 있죠. 언젠가는 저도 팬들 앞에서 던지는 모습 말고 치는 모습을 한 번 보여주고 싶어요. 잘하기 때문은 아니고 그냥 제가 하고 싶어서.

■ WBC(World Baseball Classic)에서 고교시절 우상이었던 이치로 선수와 대결하게 됐는데

고등학교 2학년 때 스즈키 이치로 선수를 알게 됐어요. 그 때부터 51번을 달게 됐고 그 선수의 플레이를 보면서 커왔습니다. 2003년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선수시절에 그를 처음 만났어요. 존경한다면서 사인도 받았죠. 그 당시엔 이치로 선수와 승부를 겨루게 될 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WBC에서 자진 등판하고 이치로 선수가 첫 타석에 들어왔을 때에는 제가 스스로를 컨트롤 했죠. 저는 태극기를 달고 뛰는 선수였기 때문에 이기고 싶었고 안타만 안 맞으면 된다는 생각에 떨렸죠. 공하나 던질 때마다 긴장감도 컸고.

 

#2. 8년 동안의 미국생활, 그에게 찾아온 위기

■ 메이저리그에 진출하셨을 때 소감은 어땠는지
경기 중 한 선발 선수가 어깨 부상을 당했어요. 그래서 저에게 기회가 왔고, 제 경기를 본 감독이 직접 전화가 왔죠. 처음엔 메이저리그에서 선발등판 기회를 잡았다는 생각에 전화기를 안고 무척 기뻐했어요.

■ 어린 나이에 외국에서 선수생활을 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없었나요
제 기억 속에는 힘든 기억이 더 많아요. 일단 의사소통도 힘들었고 제 성격이 무뚝뚝해서 그런지 외톨이었어요. 고민이 생기고 슬럼프에 빠졌을 때 터놓고 얘기할 사람이 없었죠. 일어나서 경기장에 가보면 여전히 혼자였고 그게 정말 어려웠던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 8년의 미국 생활 동안 가족들, 동료들과 선배들이 그리웠어요. 그러다가 제1회 WBC 때 2주 동안 한국 선수들과 합류해서 훈련을 하는데 일단 언어의 장벽이 없어서 그런지 서로 소통이 너무 잘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젠 좀 한국에 돌아와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때 제일 힘들었던 건 부상을 당해 슬럼프에 빠졌을 때 같아요. 신시네티 레즈로 트레이드를 당하고 나서 2004년도에 기회를 잡아보려고 공 던지는 폼을 바꿨는데 어깨부상이 왔어요. 공을 들지도 못하고 던지지도 못할 정도로 아팠죠. 병원에서는 간단한 수술이라고 했고 얼마 지나지 않으면 공을 던질 수 있다고 했는데 재활기간이 2년이나 됐어요. 그 시간 동안 매일 똑같은 재활프로그램을 받다 보니 과연 내가 던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서 무서웠었죠. 그때가 제일 힘들었어요.

#3. 그에게 ‘야구’를 묻다

■ 올해 정규시즌에서 본인의 활약을 평가해 주실 수 있나요
올해는 되게 아쉬운 게 많았던 것 같아요. 김재박 감독님도 마지막 해였고, 그래서인지 우리도 4위 안에 들어야겠단 각오가 남달랐고. 연승을 하다가 크게 연패를 했던 게 제일 아쉬웠던 것 같아요. 그 안에서 제가 도와주지 못했던 게 많이 아쉬웠죠. 개인기록에 너무 의존했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팀한테도 너무 미안했고.

■ 징크스가 있는지
있죠. 전 선발 때는 점심 때 항상 파스타나 장어덮밥 같은 똑같은 음식을 먹어요. 그리고 항상 같은 시간에 야구장 가서 양말도 항상 오른 쪽부터 신구요. 그리고 사람들이랑 얘기를 잘 안 해요. 그렇게 안하면 질 것 같거든요.

■ 대구나 대전, 광주 구장 등 지방 구장의 시설이 매우 열악하다고 들었어요
매년 팬이 늘어나고 있는데도 8개 구장은 그대로에요. 미국의 시절과 비교해보면 우리나라의 시설은 너무 아쉬워요. 물론 인천의 문학경기장 같은 경우에는 메이저 리그 수준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지만 나머지는 시에서 관리하기 때문에 마케팅이나 이익을 먼저 생각하죠. 제 개인적 바람으로는 구단이 야구장을 인수해서 팬들을 위한 놀이시설을 확충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어린이들이 놀 수 있는 공간을 많이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사람들이 더 많이 올 것 같고 야구장이 더 재밌어질 수 있을 것 같거든요.

#4. 도전, 그리고 도전

■ 야구 인생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순간이 언제였는지 궁금해요
쿠바와 치룬 올림픽 결승전 때가 저에겐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9회 때 저를 포함해서 덕아웃에 있던 모든 선수들은 패배를 예상했었고, 은메달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죠. 그러다가 더블플레이가 되고 결국 이겼잖아요. 그 때 25명 모두 주저앉아서 눈물을 펑펑 쏟아냈죠. 그 때의 감동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

■ 자신의 에너지의 근원을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첫 번째는 가족인 것 같아요. 왜냐면 제가 먹여 살려야 되니까(웃음). 단순한 대답이지만 가족은 제 인생의 전부입니다. 가끔 오랜만에 집에 들어가면 아이들이 저를 못 알아 볼 때 서운하기도 하지만요(웃음). 아버지와 관련된 언론 보도를 보고 봉중근은 효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아직도 아버지께 은혜를 다 못 갚았다고 생각해요. 아무튼 가족은 제게 전부죠. 그리고 두 번째 원동력은 팬인 것 같아요. 한 사람 한 사람이 나를 알아 간다는 게 재밌어요. 제가 잘하게 되면 더 많은 팬들이 생기겠다고 생각하니까 더 잘해봐야지 하는 원동력이 생기거든요. 그래서 부상 때도 마운드에 섰어요. 이런 대답이 가식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팀이 7위를 했다고 포기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거든요.

 

■ 우리 학교 스포츠과학부에 수시 원서를 넣었다고 들었어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웃음). 미국 생활 당시, 비자문제 때문에 비시즌에는 애틀랜타에 있는 모든 대학교를 다 다녀본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제대로 된 대학생활을 해보고 싶었죠.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생활을 해보고 싶었고, 평생 못해볼 뻔 했는데 이번에 기회를 잡은 것 같아서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새로운 기분이 듭니다. MT도 가보고 싶어요.  대학생활 동안 제가 나름대로 잘 해서 자부심 있게 언론에 얘기할 수 있게끔 잘해야 될 것 같습니다.

■ 봉중근 선수에게 야구란 무슨 의미인가요
항상 제일 어려운 질문입니다. 저에겐 야구란 도전인 것 같아요. 야구는 저에게 한계를 벗어나게끔 해줬습니다. 늘 이건 만족이 없구나 하고 느껴요. 나는 이정도면 됐구나 하는 욕심, 자만 이런 게 야구를 하면서 없어졌어요. 올해 WBC 경기를 하면서 팔 수술 때문에 잘 못 던질 것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시속 145km만 던지면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막상 던져보니 전광판에 155km/h가 찍힌 거예요. 저 자신한테도 놀랐어요. 그러고는 다시 한 번 느꼈죠. ‘아 야구는 정말 도전이구나, 야구는 정말 한계가 없구나’라고.

■ 앞으로의 꿈은 무엇인지 듣고 싶습니다
제 등번호 51번을 영구결번으로 만드는 게 인생의 목표입니다. 올해까지 투구 코치를 맡아 주셨던 ‘LG트윈스’의 김용수 코치님이 팀의 영구결번을 갖고 계시거든요. 41번이요. 그 옆에 51번을 붙이고 싶어요. 주위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격려해 주셔서 자신감이 붙었죠.

 

경 력
2009년   WBC 한국 국가대표
2008년   제29회 베이징 올림픽 야구 국가대표
2007년~현재   LG 트윈스 구단 소속
2006년   WBC 한국 국가대표
2004년~2006년   미국 메이저리그 신시네티 레즈 트레이드
1998년   미국 메이저 리그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입단
1997년   캐나다 몽튼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최우수선수상
1997년   봉황기 우수투수상
1997년   청룡기 최우수선수상
1997년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우수투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