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훈(물리) 교수

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중국 최고의 명산을 꼽으라면 흔히 황산(黃山)을 든다. 중국의 전설적 시조 황제(黃帝)가 이곳에 살면서 약초를 연구하고 나중에 신선이 되어 하늘로 승천했다는 전설로 말미암아 그 이름이 붙여진 기암절벽의 산이다. 황산에서 열린 학회를 참석하고 귀국한지 불과 며칠이라 아직 이 산에 대한 추억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깎아지른 절벽”과 “천길 낭떠러지”가 무엇인지 체험했고, 내가 그토록 좋아했던 영화 와호장룡의 배경이 되었던 곳곳을 구경하고 왔으니, 공부만 열심히 해도 이런 호강이 절로 따른다는 자화자찬도 나올 만하다. 황산의 서해대협곡(西海大峽谷)은 천길 절벽의 허리를 잘라 산책로를 만들었다. 만리장성을 건축한 중국인의 인력(人力)과 인력(忍力)이 겹쳐지지 않고서는 상상할 수 없는 역사(役事)다. 방학이 되면 친구들과 짝을 지어 이 길을 한 번 걸어봄 직하다. 닥쳐오는 중국의 거대한 힘을 미리 짐작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참석한 학회는 한국과 중국과 일본의 학자들이 모여서 결성한 연구 단체였다. 비슷한 관심 분야의 교수 여럿과 그에 소속된 대학원생들이 모여 일 년에 세 번, 한국, 일본, 중국을 번갈아 가며 학회를 개최한다. 학회 때 마다 늘 같은 면면(面面)이 참석하다보니 학생들끼리도 무척 친한 친구가 되었다. 서울 신촌 거리에서, 일본 호카이도의 주점에서, 황산의 어느 대반점(大飯店)에서 술잔을 나누며 다져진 우정이라, 그 끈끈함은 아마도 평생을 가고도 남을 것이다. 교수들은 태생의 점잖음 탓에 그리 놀지는 못하지만 친해지고 마음이 툭 터지기는 매 한가지다. 며칠 간 합숙하며 밥 먹고 함께 힘겨운 산행을 나누다보면 그들도 나도 실력과 명성 고하(高下)를 막론하고 정을 나눌 수 있는 같은 인간임을 절감한다. 산을 올라갈 때는 남남이지만 산을 내려올 때는 친구가 되었다. 그런 고사가 있던가. 이제 보니 정말 그렇다.

교수는 공부하는 사람들이다. 연구하고 새로운 진리를 밝히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권위자가 쓴 책과 논문을 읽고 생각하고, 자기의 의견이 그들보다 우수해지면 자신의 논문을 쓴다. 이것이 진정 학문의 세계다. 그럴까? 종종, 가장 진솔한 학문적 의견의 교류는 연구실과 학회장 밖에서 이루어진다. 함께 식사를 하면서 학자들끼리 무슨 얘기를 나눌까. 노교수는 젊은 시절 자신의 연구 경험을 토로한다. 젊은 교수는 겸손하면서도 잘 조준된 질문을 통해 노교수의 모든 지혜를 짜내려고 노력한다. 여기에 새로운 생각을 조금만 첨부하면 이미 다음 학회에서 발표할 연구 주제는 그 밥상에서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모든 대화 과정은 즐거운 식사와 술 한 잔과 끊임없이 농담 섞인 대화 속에서 진행된다. 이 과정을 녹화해서 아무개에게 보여준다면 아마 이곳이 창조적 생각이 탄생하는 장소라고는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학회는 거대한 “인연 만들기”에 필요한 장소와 시간을 제공한다.

모든 공동체는 인연 만들기를 위한 장소와 시간과 인연의 대상을 제공한다. 학교 공동체에서는 국산사자(국어,산수,사회,자연)의 기초 지식과 더불어 동년배 사람들과 섞이는 법을 배운다. 그들과 생각을 공유하고 문화를 나누다 보면 결국 당신 세대들이 세상을 쥐락펴락할 그 언젠가의 시대정신이 바로 그곳에서 탄생한다. Malcolm Gladwell의 책 “Outliar”에서 강조하는 “만 시간의 법칙”은 서로 인연을 쌓는데도 필요하다. 아니 천 시간이라도 좋다. 대학 생활 4년 간 천 시간을 인간관계에 투자해 보라. 일 년에 250시간, 방학과 주말 등을 빼고 나면 학교 다니는 날은 매일 하루 한 시간 정도인 셈이다. 친구들과 대화하고, 음모하고, 서로를 웃기도록 노력해 보자. 새로 건축된 수원의 기숙사를 보면 난 그 안에서 지금도 맺어지고 있을 거대한 인연의 덩어리가 생각나 웃음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