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혜(국문05)

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신문을 펼치니, ‘삼십만 원이 없어 아파트 입주 포기하고 새 터전 찾아 떠나는 재개발 지구의 철거민들’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어제의 신문과 다를 것이 없다는 현실에 막막함을 느낀다. 요즘 이야기가 아니다. 1975년 씌어진 조세희의 <칼날> 속 문장이다.

지난 10월 28일, 신문에서 ‘용산 참사’ 판결 소식을 읽었다. 문득 소설 속 주인공 신애처럼 중얼거렸다. ‘어느 편이 좋은 편이고, 어느 편이 나쁜 편인가?’

철거민 측과 경찰특공대 측은 팽팽하게 대립했다. 결국 공판은 철거민 측에 발화의 책임을 물음으로써 끝을 맺었다. 법질서를 유린했다는 죄목으로 중형을 선고한 것이다. 공판 결과에 의문이 들었다.

나는 비록 법학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법대 친구도 4명밖에 없는 인문대 학생이지만, 법이 사회의 맥락을 고려하여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빵을 훔치는 사람을 징역에 처한다는 법은 불평등한 법이다. 부자는 빵을 훔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가난한 이들에게만 적용되는 법이다. 이번 판결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농성자들이 비대한 경찰력과 대립하며 망루에 오를 수 밖에 없었던 맥락을 고려해야 했다. 하지만 판결에는 ‘공세적 진압’이라는 배경이 빠져 있었다.

형법 22조에 ‘긴급피난’이라는 규정이 있다. 변호인단이 철거민들의 긴급한 상황을 고려하여, 그들의 방위를 인정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한 까닭이다. 하지만 재판부가 검찰 측의 기소 내용만 받아들인 결과, 책임은 한 쪽에게만 돌아가 버렸다. 법이 극한에 몰린 철거민들을 위협하는 불평등으로 작용한 것이다.

이주노동자, 장애인, 철거민들의 인권은 우리 사회의 모습을 가늠해볼 수 있는 잣대다. 이들에게 대하는 대접에서 한국 사회의 수준을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용산 참사’에 끊임없이 관심을 갖고 의문을 제기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다.

졸업을 앞두고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지 못했다는 사실에 후회스럽다. 후배님들은 당당하게 궁금해 했으면 좋겠다. 그러면 적어도 내 일에만 갇혀 살았다고, 나처럼 아쉬워할 일은 없을 것 같다. 마지막 학기를 다니며, 몇 자 적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