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숙(국문07)

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근래에는 서울시나 정부나 할 것 없이 모두 ‘생태’에 열을 올린다. 생태적인 ‘4대 강 사업’, ‘생태 도시’ 조성. 특히 아파트 광고에서는 ‘생태’라는 코드가 일반화된 지 오래다. 그러나 이들이 만드는 것이 진짜 ‘생태’일까? 생태라는 이름을 뒤집어쓰고서는 오히려 자연 파괴를 철저하게 행하는 4대 강 사업은 제외한다손 치더라도, 단지 안에 나무 몇 개를 심고, 아스팔트를 뚫어 조그마한 하천을 만드는 것들도 생태라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생태’라는 것은 조성될 수 있는 어떠한 결과물이 아니라, 그 과정 속에서부터 담아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전에 살던 주민들을 몰아내고 짓는 아파트부터, 단지 보기 좋으라고 만들어낸 일련의 작업들을 우리는 생태라고 부를 수 없다. 그것들은 오히려 생태를 어기고 있으며, 그들이 만들어낸 것은 인위적인 녹색 숲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진정한 생태라는 것은 만들어내는 모든 과정 하나하나가 ‘생태적’인 것, 즉 어떤 연결 고리도 파괴하지 않고(오히려 그것들을 생성해내고) 궁극적으로는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조화롭게 작동하는 것이어야 한다.

요즈음은 어느 학교나 학생회 선거로 들썩거린다. 우리 학교도 마찬가지다. 다른 동네에 있는 모 대학교의 총학생회 선본은 아예 ‘생태주의’라는 키워드를 들고 출마했다. 우리 학교 총학생회 선본의 공약 중에도 ‘생태’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생태’들이 개발 중심주의에 단순히 녹색을 칠해놓은 생태이진 않은지 검토해보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보인다. ‘녹색’이라고, ‘친환경’이라고, 혹은 ‘유기농’이라고 모두 다 ‘생태’일까? 그것은 결과론적인 ‘에코’에 집착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지, 실질적으로 그 단어가 함의하고 있는 것과는 사실 상관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진정 생태주의를 고민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녹지를 조성한다는 사고를 뛰어 넘어, 모든 관계성을 고려해야 한다. 어떻게 대화를 걸어, 어떤 관계를 생성해낼 것인가? 나는 그것이 진정한 생태주의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