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현(경제08)

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수업 도중 어느 수업에도 언급되지 않았던 ‘빅토르 하라’라는 이름이 문득 들렸다. ‘민중가요’ 노래패의 일원으로써 ‘빅토르 하라’라는 유명한 칠레의 민중가요 가수의 이름은 내 관심을 단 번에 사로잡았다. 그런데, 교수님의 설명을 듣는 순간, 교수님의 입에선 ‘민중가요’라는 표현이 아닌 ‘운동가요’라는 표현이 나왔다. 실상 현대인들이 민중가요를 잘 접하지 못하고 관심도 없다보니 이와 같은 단어 사용의 오류가 생기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나에겐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었다. 손을 번쩍 들어 당당히! ‘민중가요’로 설명해야한다는 발언을 아니 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왜 우리들의 삶을 담고 있는 민중가요를 ‘운동가요’ 또는 ‘노동가요’로 알고 있는 것일까? 제일 큰 이유는 과거 민중가요의 탄생과 그 발전 과정에서 겪어온 역사 때문일 것이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 민주주의는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고 노동 현장 속 사람들은 동물만도 못한 대우를 받고 있던 때였다. 이런 열악한 시대 속에서 사람들은 분노와 비애를 느꼈고 세상의 변화를 꿈꿔왔다. 이와 같은 삶과 감정을 담아내기 위해 그 당시 사람들은 음악을 이용하였고 이를 통해 ‘민중가요’가 탄생한 것이다.

그렇게 민중가요가 탄생하고 10년 20년이 흐른 지금, 시대는 바뀌고 한 민중가요 가수는 군화발의 시대도, 폭력의 시대도 끝났다고 말했다. 그렇다. 과거에 비하면 지금은 그렇게 피 터지도록 민주주의를 외치지 않아도, 노동조건을 개선해달라고 말하지 않아도 될 듯한 시대가 온 듯하다. 80, 90년대를 보면 정말 이 땅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 한 몸 받쳐 싸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이러다보니 자연히 억압과 투쟁의 역사 속에서 탄생한 민중가요 역시 그것이 불려 져야 하는 이유를 잃는 게 당연한 듯 보인다.

하지만 과연 시대는 변한 것일까? 실상을 살펴보면 과거에 비해 우리는 너무나 ‘형식적인 민주’ 사회에 삶과 동시에 너무나 ‘실질적인 비민주’사회에 살고 있다. 가까운 예로 투표와 같은 ‘형식적인’ 민주주의로 사람들에게 이 땅에 민주주의가 도래했다고 외치는 기득권층의 연설과 자본가들의 끝없는 폭력에 의해 들춰지지 않는 노동현장의 그 처참한 현실들이 조금만 옆을 바라보면 보인다. 평화로운 시대가 왔다고? 매스미디어가 발달하고 정보화 시대가 왔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의 온갖 부정과 부패들은 과거에 비해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있고 기득권층이 뿌린 연막 속에 싸여 더욱 사람들의 숨통을 조여오고 있는 게 오늘날의 진정한 모습이 아니겠는가?

힘든 사람들의 고된 역사 속에서 탄생한 민중가요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기득권층과 자본가들의 연막 속에 쌓여 불러져야 할 이유를 잃은 듯이 보인다. 조금만 눈을 돌려보면 시대는 과거에 비해 전혀 나아진 것이 없고 민중가요는 불러져야 할 이유를 조금도 상실한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민중가요는 그 생명력을 잃고 있다. 사람들의 삶을 담고 있는 민중가요. 여기에 어떤 삶과 감정이 담겨 있는지, 대학생이라면 한번 쯤 관심을 기울여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