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최우수작 - 박재우(독문08)

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믿음은 왜 쉽게, 사람의 도덕이 되지 못하는가.
 예로부터 누구이든지 아는 바대로, 신께서는 쉽게 노하신다. 신의 비위를 거스르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이다―그러나, 사람은 현명하지만은 않은 존재임에 틀림없다.
 오늘 정오에 열릴 제전(祭奠)에서 신들을 위하여, 그리고 신께 부족의 안녕을 축원하여 주시라 빌기 위하여 바칠 공양물은 다시금, 간밤에 제사장이 부족민들에게 전달한 대로, 신의 의지에 의하여, 사람으로 결정되었다. 풋풋한 젊은이 스무 명이 오늘, 신성한 동굴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한 줄로 서서, 차례차례 그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그들이 다시 나오는 때는 아마도 오늘, 늦은 밤이 될 것이다. 어쩌면 새벽녘일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시 나온 그들은, 필시 무언가가 ‘결여된’ 존재로 바뀌어 있을 것이다―그들의 살갗 일부와, 뼈, 힘줄, 그리고 머리카락만이 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그들의 흔적은, 풀이 웃자란 초가을 뒷동산 중턱의 흙 속에서 세월에 쓸려갈 것이다.
 스무 젊은이들이 사로잡힌 것은 어제, 해가 서녘으로 기울어가던 때였다. 그들은 상수리나무골에 살던 어버이들의 아들들이었다. 상수리나무골은 늦여름, 보리걷이와 그 외 먹을거리 채집의 수확이 우리 부족 가운데에서 가장 적은 마을이었다. 그들이 제사장에게서 요구받은 곡물과 고기는 그들이 여름내 벌어들인 것의 갑절에 가까웠다. 그것은 그들이 바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사장과 신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믿음’이 있다면, 바칠 수 있는 것이라고 그들은 상수리나무골의 촌로에게 말했다. 그것은 보통의 말이기보다 선고(宣告)라고 해야 했다. 그들의 말은 곧 신들께서 말씀하신 바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칠 수 있다’는 말은 신의 의지에 의해, ‘마땅히 바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나 다름없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상수리나무골 사람들은 신이 정한 선에 미칠 수 없었다. 그들의 몸에는 지상의 ‘미천한’ 피가 흘렀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그 피를 후대로 이어 내려왔다. 그렇게 낳은 아들과 딸들이 그들이 살아가는 진정한 이유였다. 신을 향한 믿음을 반절이나마 유지하려면, 그들이 살아가는 이유인 아이들이 설령 배를 곯고 주려 널브러지더라도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있을 만큼 강철 같은 심장이 필요했다. 그러나 상수리나무골 사람들의 심장은 강철이 아니라 피와 고기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전혀 새로운 길로 접어들어 보기로 했다―믿음을 버린 것이다.
 믿음을 버린 자들이, 자기네와 마찬가지로 믿음을 버린 젊은 아들들과 함께 손에 괭이와 몽둥이를 들었다. 믿음을 버린 자들은 살면서 전에는 그런 적이 없도록 굳세어져서 부족의 심장부로 내달려왔다. 제사장과 신관들은 그들의 거친 목소리에 놀랐다. 제사장과, 그 혈통의 젊은이들인 신관들은 그들의 아내까지 더하더라도 열 명이 채 되지 않았다. 제사장은 부족의 나머지 젊은이들을 불러서 믿음을 버린 자들을 막으려 했지만, 마침 그때 부족의 사람들은 대부분 수렵을 하러 나간 다음이었다. 그리고 사실은, 상수리나무골 사람들만큼이나 다른 마을들에도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은 많이 있었다. 부족 사람들 가운데 넉넉한 사람은 없었다. 제사장의 가문 사람들만을 제외하면. 그랬기 때문에, 제사장의 부름에 대해서 부족 사람들 저마다의 핑계가 생겨났다.
 믿음을 버린 자들은 거칠었다. 그들은 전에도 반절에 가까운 믿음만을 가졌다고 여겨진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부족 내에서도 유독 쉽게 악에 받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몽둥이에 제사장의 넷째 아들이 죽었다. 젊은 신관의 가죽옷은 넝마가 되었다. 제사장의 가문은, 그나마 그들을 도운 몇몇 젊은이들을 믿음을 버린 자들 앞에 던져 놓고 신성한 동굴로 달아났다.
 제사장과 신관들은 크게 노하였다. 그들은 동굴 입구에 서서 신들을 불러냈다. 신들은 제사장의 부름에 이내 나타났다. 제사장의 믿음은 그처럼 드높았던 것이다. 신들의 어마어마한 위용 앞에, 믿음을 버린 자들은 쉽게 주눅이 들었다. 신들은 전설로 전해지던 그들의 검은 마술 막대를 들고 나타났다. 막대의 마술은 강력했다. 신들의 푸른 눈이, 가로로 든 막대의 끄트머리에 달린 뾰족한 부분을 응시하고, 막대의 끄트머리는 다시 불경한 자들을 겨누었다. 그리고 뒤이어, 불경한 자들의 가슴과 머리에서 차례로 피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다섯 번 피가 솟구치고 나자, 믿음을 버린 자들이 무릎을 꿇었다. 신은 신이었다. 그들은 위대했다. 전설 속에서와 똑같이, 그들을 거스르는 이들은 가슴과 머리에서 피를 뿜어내며 스러지게 되어 있는 것이었다.
 신들은 제사장에게 말씀을 전하신 뒤 동굴 안으로 돌아갔다. 제사장은 신의 말씀을 해석하여 부족민들에게 전하였다. 말씀에 따르면, 불경한 자들은 이제 그들이 받아 마땅한 처벌을 받아야 할 것이었다. 부족민들에게서 거둬 모은 공물들로 치를 가을 제전의 날이 다음날이었으므로, 그들이 받을 처벌은 분명해졌다―그 옛날, 우리 부족이 아직 아주 작았을 무렵, 우리처럼 작았던 부족을 쳐서 이겼을 때 우리가 행하였듯이, 그때의 패배(敗北)한 부족민들처럼 불신자들도 공양(供養)으로서 제전에 오르게 될 것이었다.
 상수리나무골은 믿음 없는 이들 무리의 본보기로서, 폐(廢)할 것이 결정되었다. 신의 의지에 의해, 그것을 널리 퍼뜨리는 제사장의 전언에 의해, 상수리나무골 사람들 모두를 부족민들이 끌어왔다. 상수리나무골의 젊은이들 가운데 가장 강건한 이들 스물을 골라내서 제사장은 한 줄로 세웠다. 그리고 긴 줄로 그들의 손을 차례차례 묶어, 그들을 모두 하나의 묶음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제사장의 집 앞에 꿇어앉아서 밤을 지새야 했다.
 한편, 상수리나무골 사람들이었던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울지 않았다. 아들들과 남편들 가운데 가장 강건한 이들 스무 명이 신성한 동굴 안으로 들어가야 해도, 그 마을의 여자들은 전혀 울지 않았다. 아마도 더 흘릴 눈물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음이 약해진 자의 눈물은, 그들이 오기 며칠 전 이미 제사장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모두 흘려내었다. 그들은 그들의 믿음이 신과 제사장이 보시기에 탐탁잖을 만큼 부족하다는 것만을 알고, 신께서 요구하시는 믿음의 문턱이 그 높이를 반절로 접을 날이 오는가는 전연 모른 채로 눈물샘을 비워냈었다. 문턱이 오로지 믿는 자들의 공물만으로 그 높이를 사람에게 드러낸다는 것만을 그들은 배우고 돌아갔었으며, 그래서 이번엔 아무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여기까지가, 어제까지의 일이다. 그리고 날은 밝았다.
 아침부터 부족의 땅은 온통 부산했다. 정오에 시작할 제전을 준비하느라 아낙네들도 거의 모두 밤을 새운 터였다. 그리고 몇몇은 입맛을 다시기도 했다. 어쨌거나 제전을 하는 바로 그 날만은 부족민이 보기 드물게 배불리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제사장과 신관들도 한창 싱글벙글하고들 있었다. 이미 오래도록 부족에 큰 죄를 지은 자가 나오지 않고, 주변의 소부족들도 시비거리를 만들지 않아 초조해하고 있던 차였던 것이다.
 어느 부족이든지, 각자는 각자가 믿는 위대한 신들을 모신다. 그리고 서로 다른 부족들이 서로 겨룰 때에, 힘센 부족과 나약한 부족을 가름하는 것은 그들이 각자 섬기는 신의 힘의 차이에서 나온다. 우리 부족의 신은, 인근 부족의 신들을 모두 통틀어 보아도 전연 버금가는 이가 없도록 강력하였다. 잔솔나무 부족이 섬기던 푸른나무의 정(精)도, 흰바위 부족이 섬기던 큰바위님도, 독수리 부족이 섬기던 검은수리님도 우리 부족의 신에 비하자면 하잘것없었다. 그래서 우리가 인근 부족들을 모두 쳐내고, 부족 내 모든 마을을 합치면 사람의 수효가 천 명에 이르는 큰 부족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패배한 부족들은 우리 부족보다 훨씬 작은 소부족으로서, 우리에게 복종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매번 가을이 돌아올 때마다 우리 부족민들에게 일정한 양의 식량을 바쳐야 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매번 우리의 뜻을 거스를 때마다 그 부족에서 가장 빼어난 젊은 남녀 한 쌍을 보내야 하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 신의 뜻에 의한 것이기도 했다.
 우리 부족의 신들은, 다른 부족의 신들과는 달리 우리의 조상신도, 바위의 신도, 물이나 나무의 정(精)도 아니시다. 우리의 신은 땅에서 솟아난 존재들이었으며, 우리를 조금 닮았으나 훨씬 아름답고 고매한 존재들이었다. 그러한 그들의 특별함이 아마도 다른 신들을 이기는 힘을 낳았을 것이다. 그들은 자연의 그 무엇도 상징하지 않았으며, 상징하려 하지도 않았다. 우리가 그들에게 올리는 그 어떤 지엄한 호칭도 그들은 거부했다. 그들은 오직 부족전쟁에서 우리에게 승리의 가호를 내리는 위대한 무신(武神)이기만을 자처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부족의 신들과 그 생김과 상징이 다른 만큼이나 그들의 신봉자들에게 요구하는 공물, 그들의 은혜의 대가로도 다른 것을 요구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언제나, 사람이었다. 신은 대자연의 기운 가운데에서도 사람의 몸에 쌓여 굳은 것을 드시기를 가장 좋아하신다고 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신들에게 사람을 올리려면, 우선 우리 가운데에서 누군가를 골라내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은 예로부터 부족의 큰 고심거리가 되어왔다. 왜냐하면 신들은 그들에게 바친 우리의 사람을 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들이 우리의 사람에게서 기운을 뽑아내고 다시 그를 돌려줄 때, 그는 육신의 대부분을 헐벗은 상태로서만 우리에게 돌아왔다. 신들은 자기들이 그의 육신에서 이승의 때를 벗기고 저승의 낙원으로 그의 순수한 부분을 보내 주었기 때문이라고, 우리의 사람을 뼈와 살갗과 머리채만 남겨 되돌려주는 까닭에 대해서 우리에게 설명했다. 그러나 신들의 가호야 어떻든, 우리의 입장에서 그것은 곧 우리가 보낸 이의 죽음과 같은 것이었다. 요컨대 우리의 공물은 죽음으로써 신의 갈증을 풀고 가호를 받아다 우리에게 전하는, 돌아올 수 없는 차사(差使)였다.
 우리는 처음엔, 우리 가운데에서 가장 아름다운 처녀와 가장 용감한 청년을 골라서 신들에게 바쳤었다. 그러나 그 공물의 문제점은 이내 드러났다. 가장 용감한 청년이 신의 손길을 따라 저승으로 가고 나면, 우리가 다른 부족들과 싸울 때 그만큼 이기기가 어려워졌던 것이다. 그럴 때면 우리는 신을 불러내야 했고, 신들은 검은 막대로 마술을 부려 적 부족을 물리쳐 주었지만, 그것이 너무 잦아지면서 신들도 매우 불쾌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결국은 방침이 바뀌었다. 우리 부족민 가운데에서는, 죄를 지은 사람이나, 노예만을 신에게 보내는 것으로. 신들은 우리 부족민 모두에게 가호를 내리면서, 이 가호를 어기고 죄를 짓는 이만을 자신들이 따로이 벌하고, 위대한 영웅을 사자(死者)의 낙원으로 보내는 일은 보다 느긋이, 그가 늙었을 때 해도 좋은 것으로 공양(供養)의 규칙을 바꾸라 우리에게 명하였고, 제사장이 그 명을 우리 부족 전체에게 전달하였다.
 그리하여, 매번 신께서 공양을 원하실 때, 우리가 바치는 사람은 우리 부족 내에서 골칫거리가 된 자, 신에 대한 믿음이 약하였던 저 상수리나무골 출신의 젊은이들과 같은 불신자, 그리고 신께서 가호를 내리신 바인 우리 부족에 감히 도전하는 다른 소부족들의 전사들로 바뀌게 되었다. 우리는 우리 가운데 가장 용감한 전사가 우리 곁을 너무 일찍 떠나지 않아도 좋도록 한 신의 뜻에 감사하였고, 친히 죄인을 저승의 가장 음습한 곳으로 데려가시기로 한 신의 노고에도 경배를 올렸으며, 우리의 인근 부족들은 우리 신의 그러한 결정을 통고받고 크게 떨었다.
 문제는, 우리의 인근 부족들이 너무도 크게 우리와 우리 신을 두려워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의 젊은이들로 이룬 군대로 우리를 들이쳐도 우리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속절없이 지고 나면 그들의 젊은이들은 우리의 신께 바쳐져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길 수 없는 상대에게, 그것도 의미 없이 도전하는 것은 바보짓이다―그들은 그것을 너무 빨리 깨달아 버렸다.
 그렇다. 그들은 너무 빨리 깨달았다. 우리의 신들은 그 어떤 공양물보다도 사람을 좋아하시는 허기진 존재들인데, 그들의 깨달음으로 인해 우리는 신들의 갈증을 미처 충분히 채우지 못할 정도로 궁지에 몰려야 했다. 그렇다고 아무 때에나 소부족들에게 시비를 걸 수도 없었다―우리 부족이 강하다고 해서, 인근의 모든 소부족을 적으로 돌리고 거침없이 그들의 젊은이들을 주기적으로 잡아다가 신에게 바치려 들었다면 그것은 곧 그들의 필사적 도전에 우리가 직면하는 상황으로 이어질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이기더라도 결국 의미는 없게 될 것이다. 우리 부족도 그들의 소부족이나 마찬가지인 작은 부족으로 돌아가고 말 터이니. 그래서, 우리는 호시탐탐 소부족들의 반항을 노리며―그러나 우리 부족 대 모든 다른 부족의 큰 갈등으로까지 이어질 일은 없도록―, 신을 달랠 수 있기만을 애써 기다리고, 법을 갈수록 엄해지고 팍팍해지도록 만들어 공물을 조악하게나마 충당했지만, 기회는 다가오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제야 드디어 백여 명이나 되는 불신자가 나타나, 우리에게 사로잡히고 만 것이다. 자, 이제 신들의 한동안의 오랜 갈증을 풀어드릴 수 있을 것이다―그러고 나서 남는 불신자들은, 우리가 직접 노예로 부리다가 이후 차차 또 신들게 한두 명씩 공양을 하면 될 것이다, 제사장과 신관들은 그렇게 생각을 하며 지금쯤 만족의 웃음을 웃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 그들은 그렇게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제전 앞에 늘어선 이들은 그렇게 모두 웃고 있으며, 그들과 더불어 부족의 사람들도 모두들 웃고 있다. 특히 경박한 젊은이들이 누구보다 크게 그리고 밝게 웃고 있다. 스무 명이나 되는 건장한 젊은이를 바칠 수 있으니, 앞으로 두어 달 정도는 인신공양을 덜 해도 될 것이고, 그러면 제사장과 신관들은 으레 부족의 규율을 느슨히 하게 마련일 것이다. 즉, 공연한 불벼락이 내리는 일을 한동안은 덜 겪어도 될 터―마음이 놓일 것이다, 젊은이들은. 사람은 남이 자기 대신 아파할 수만 있다면 언제까지고 그러기만을 바라는 별(別)한 짐승이어니.
 제례가 곧 시작되었다. 제사장은 크게 신들을 향해 축원을 드리는 말을 늘어놓고, 상수리나무골의 촌장이었던 늙은이와 그의 노파더러 직접 한 잔씩 신관들에게 술을 따라 올리도록 하였다. 늙은이들은 한 방울도 술에 눈물을 섞지 않을 만큼 마음이 모질었다. 그것이 마음에 안 들어서였을는지는 몰라도, 제사장은 상수리나무골의 처녀 대신 그 늙은이들의 목을 쳐서 그 피로 제사의 시작을 고하였다. 그리고 부족의 젊은이들을 시켜 상수리나무골 젊은이들의 왼발 힘줄을 끊도록 하였다. 이것으로, 장차 부족의 노예가 될 이들이 쉽사리 탈주할 위험은 사라졌다. 그러고는 저들, 스무 건장한 청년들을 동굴 앞에 세우고, 다시금 신을 부르고, 그리고 그들을 이끌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사라진 동안은 신관들이 제례를 집전할 것이었다.
 이제, 올해 부족의 수확물 가운데 따로이 이 제전을 위해 모아 두었던 것들이 상에 올라 부족민 모두를 위한 양식이 되었다. 모두들 즐겁게 먹고 마셨다. 이런 때만큼은 누구나 마음들이 한가지로 기쁨으로 벅차게 된다. 사람은 아마도 이렇게 드물게 찾아드는 기쁨을 위해서 매일을 사는 것일 터이다.
 신관들까지도 얼근히 취한 초저녁이 되어서야, 제사장은 신성한 동굴에서 도로 나왔다. 그는 힘들게, 큰 자루 하나를 쥐고, 피를 얼굴에 덕지덕지 묻히고 있었다. 자루 안에는 아마도 예의 그 스무 청년들의 잔해일 무언가들이 가득 들어차 묵직함을 드러냈다. 제사장은 거친 숨을 씨근거리며 그 자루를 끌었다. 언제나 생각하는 것이지만, 그리고 아마도 모든 부족민들이 그렇게 여기리라고 생각하지만, 신성한 동굴에서 돌아나오는 제사장의 저 거친 숨은 아무리 봐도, 격하게 몸을 놀린 사람의 단내 나는 숨결이 아니라, 턱밑까지 호흡이 차오르도록 목구멍으로 무언가를 미어터지게 넘긴 사람의 그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신관들이, 다른 젊은이들조차 부르지 않고 그 자루를 받아들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마도 그들은 남들이 거의 다가가지 않는 어딘가에 그 자루를 버릴 것이다. 그것은 신에 의해 부정(不淨)함을 타매(唾罵)당한 불신자들의 표식으로서 남았다가 바람에 흩어질 것이다. 어쩌면 들개들이 갉죽거리는 바람에 사라질는지도 모르겠다.
 제례의 마지막. 부족의 모두는 언제나 한마음으로 신을 경외하고 부족의 영광을 중시하며 살아야 할 것임을 제사장이 천명하였다. 그리고 다음으로, 노예가 부족의 용사나 공훈이 있는 이, 손재주가 유달리 좋은 이, 몹시 늙은 이에게 배분되었다. 소부족들과의 전쟁에서 잡은 포로를 노예로 삼은 이들은 전부터 종종 있었지만, 한때 같은 부족 사람이었던 이가 노예가 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부족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아마도 대부분은, 동정심을 그다지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남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경험에 비추어 보건대 대체로 배가 고프지 않을 때에, 다른 그 어느 때보다도 쉽게 마음에서 우러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부족민들 가운데 배가 고프지 않은 사람은 제사장과 신관들, 그리고 몇몇 용사의 가문 사람들 외에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보통의 부족 사람들은 아마도, 나와 마찬가지로, 저 노예들을 크게 불쌍히 여기지는 않고 있을 것이다. 모두가 그럴 것이다―
 ―아니, 모두는 아닌 것 같다.
 “…….”
 단 한 사람은 그러지 않았다. 나의 아우 잿빛이리. 그는 시선을 노예들 가운데의 한 사람에게 못박고 있었다. 그것은 한 여인이었다. 상수리나무골의 초록반디. 오라비를 신성한 동굴에 들여보내고, 어머니와 함께 자기도 왼발의 힘줄이 끊겨서 젊은 신관의 가문에 노예로 들어가게 된 그녀의 핏기 가신 얼굴에 잿빛이리의 시선은 단단히 붙박여 있었다. 시선이 속박이 될 수 있다면, 잿빛이리는 틀림없이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는 그녀를 사랑했고, 내가 알기로는 그녀도 그를 사랑했다. 초록반디와 잿빛이리는, 이미 정혼한 사이라고 보아도 될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초록반디의 부모가 잿빛이리를 반기는 것이나, 내가 초록반디의 방문을 받아들이는 것이나 이미 한가족을 맞는 것처럼 일상적인 것이 되어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 그 인연이 한순간에 끊어져 버렸다. 초록반디의 아비는 아까 제사장이 제례를 시작하면서 올린 핏물 가운데 일부를 내뿜고 죽었다. 초록반디는 본래대로 정상적인 일가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일가를 꾸릴 자유도 박탈당했다.
 잿빛이리의 얼굴은 굳어져 있었다. 그는 아마도 신을 향한 자기의 외경심과 초록반디를 향한 자기 마음의 강도(强度)를 서로 비교하고 있을 것이다. 젊은 혈기란 때로 뒤틀어지고 싶어하는 법이고, 그 비틀림을 용트림으로 곡해하게도 만드는 법이다. 잿빛이리도 그러지는 않을까―보통 사람들은, 신에 대한 외경심을 가장한, 자기 목숨을 아까워하는 마음 덕분에 그 비틀림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만.
 문제는, 내가 알기로는 잿빛이리는 그것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아직 명확하게는 모르겠지만, 그는 신을 깊이 경외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점만은 단언할 수 있다. 나로서는 두려운 일이지만, 그는 신과 초록반디 가운데에서 초록반디를 선택하고 싶다는 유혹을 강하게―아마도 옛이야기의 주인공들보다도 강하게 받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상황은 이제, 그의 인내심에 달린 셈이다. 지켜보아야 할 것이었다.

 제전이 끝나고 다시 며칠간이 흘렀다.
 잿빛이리와 나는 여느 때와 매한가지로 일용(日用)할 양식을 찾아 들에서 헤매다 집으로 돌아왔다. 먹을 수 있는 들풀 약간에 메뚜기 쉰 마리 가량이 오늘 우리가 구한 먹을거리의 전부였다. 약간 모아 놓은 말린 메뚜기도 곁들여서, 우리는 메뚜기를 모두 구워서 들풀을 곁들여 먹었다. 배부르지는 않은 저녁 식사였지만, 메뚜기 고기로도 내일 아침까지는 기운이 날 것이다.
 먹는 내내 잿빛이리는 얼굴이 굳어 있었다. 저 표정은 어제 제전의 끝무렵부터 거의 그대로였다. 아마도 초록반디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가슴이 찢어진다는 표현이야말로 지금 잿빛이리가 되새길 법한 단 한 마디였다.
 그러나 나는 그의 마음을 달래려 헛된 시도를 하지는 않았다. 나도 이미 잿빛이리의 나이대에 가슴을 찢겨 본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남자의 가슴이란, 이런 식으로 손쓸 수 없이 허망하게 찢겼을 때는 아무도 붙여 줄 수 없는 법이다. 잿빛이리는 반드시 그가 그 스스로를 달래야 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마음이 누더기가 되더라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의 굳은 얼굴 가운데에는 어쩌면 원망 한 자락이 배어 나오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문득 생각했다. 그것은 나도 희미하게나마, 잿빛이리와 같은 이유에서는 아니었지만 겪어 본 것이었다. 자기가 부족의 용사였더라면―그래서 신관 앞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더라면, 그리고 적어도 제례 당시 수확물과 노예의 배분에 자기의 몫을 바랄 수 있었더라면 어떻게든지 초록반디를 얻을 수 있었으리라고 여기고 있을 것이다, 지금의 잿빛이리는.
 하지만 그러한 상상은 의미가 없다. ‘했었더면’이라는 말이 팍팍한 삶에서 힘을 북돋우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지나간 일은, 아마도 우리 부족의 강대하신 신들조차 물릴 수 없을 터이다. 아쉬움―그리고 잿빛이리의 경우에는 비탄도 섞어서―을 곱씹다 보면 알아서 배우게 되는 교훈은 단 하나, 그것이 생각보다도 훨씬 무용(無用)한 감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잿빛이리의 나이에 배웠었고……믿건대, 그리고 또한 바라건대는 잿빛이리도 그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아마도 그 배움의 방식까지도 나와 같아질 것이다.
 그것을 아는 만큼, 적어도 나는 그가 스스로 그 점을 깨우치기 전까지의 허망한 넋두리를 들어 줄 수 있을 정도로는 귀를 열어 두고 있었다. 조금만 더 얼굴이 굳어지면, 그때쯤이면 잿빛이리는 자기의 가슴이 아프다고, 털어놓게 될 것이다……내가 산중턱의 흰 바위 앞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그리고 지금 잿빛이리는 아마도 그때의 내가 느꼈던 만큼은 얼굴의 살갗이 딱딱해져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이내 나를 향해 말문을 열었다.
 “형.”
 “……음.”
 “형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은데, 나.”
 “……?"
 잿빛이리는 말했다. “형은, 내가 초록반디 생각 때문에 이렇게 시무룩하니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
 “그야, 물론이다.”
 “그리고 형은, 내가 용사가 아니어서 초록반디를 신관들한테 요구하지 못한 걸 내가 안타까워하고 있을 거라고도 생각하고 있지?”
 “……아무래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겠나.”
 “그리고 또 형은, 내가 언젠가는 이런 생각을 다 쓸모없다고 생각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형도 겪어 봐서 안다고.”
 “…….”
 나의 아우는 아무래도 점술을 배웠어야 할 모양이다.
 “그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말했다. 말하며 잿빛이리를 보았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할까? “내가 생각한 것과는 많이 달랐나?”
 “그런 생각도 했지만.”
 잿빛이리는 굳은 얼굴을 조금 풀며 대답했다. “그보다는……다른 생각이 더 들어.”
 “다른 생각?”
 다른 생각이라.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이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약간 더 굳은 표정으로 동생을 바라보았다.
 “난, 팍팍하게 살면서 지렁이만큼도 못 꿈틀거리는 게 옳다는 것이 마음에 안 들어. 우리 부족의 신은……관대하지 않은 것 같아.”
 “…….” 순간 나는 얼굴의 살점이 얼어붙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렇지 않아?” 잿빛이리가 물었다.
 그렇게 생각될 수도 있을 것이다……소나무 부족도, 땅너구리 부족도 그리고 파란바위 부족도, 그러니까 우리 부족을 제외한 그 어느 부족도, 수확물의 절반을 공물로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공물은 그 부족의 신의 뜻보다는, 그 부족이 얼마나 배가 부르냐에 따라서 양이 종종 바뀔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부족과 달리, 다른 부족의 신들은 그 어떤 강제력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에,” 내가 말했다. “기껏해야 부정을 탄다거나, 급살을 맞는다는 금언(禁言) 말고는 그들이 힘을 내보일 도리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이야.”
 그 어느 부족의 신과도 달리, 우리의 신께서는 실제로 힘을 주신다─부족전쟁에서, 직접 적의 용사를 신이(神異)한 위력으로써 무너뜨리신 바는 오직 우리의 신만이 보이신 이적(異蹟)이다. 우리 신의 검은 마술 막대는 어느 용사라도 무너뜨릴 수 있었다. 자주 이적을 보이시지는 않으셨으되, 우리의 신의 권능은 그 어느 부족의 신과도 달리, 의심의 여지가 없이 실재(實在)하는 것이다. 그러한 위대한 힘을 빌리고 그 가호를 받음에, 다른 미약한 부족의 신에게 드리는 것보다 훨씬 성대히 치성을 드려야 함에는, 과연 이견(異見)의 여지가 존재할 틈이 있기나 한 것인가?
 나는 동생의 얼굴을 응시했다. 지금 내가 생각하는 바를, 그의 젊은 혈기는 ‘간과하라’고 마음 속에서 그더러 부추긴 것일까? 그런 것이기를 바란다. 그것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지금 그의 말은 진정 우리의 신을 향한 반기(反旗)이다─그리고 그 말로(末路)는, 내 생각엔 상수리나무골의 스무 젊은이와 그다지 다를 것이 없을 듯하다.
 “하지만,”
 ―동생은 역시나 반기를 들고 있었다. “우리 신들의 강제력은 널리 미치지 않잖아. 언제나 그 검은빛 마술 막대를 쓸 뿐이야. 그래서 우리 부족에는, 신들이 사람을 빚어냈다거나 하는 이야기도 없잖아. 우린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조차도 잘 몰라.”
 그의 말대로다. 우리의 신들이 지닌 권능은 파괴를 빚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 앞에서 그 어떤 것도 생성해낸 적이 없다……. 동생은 그 점을 지적하고 있었다.
 푸른나무님을 섬기는 부족의 전승에 따르면, 돌님과 나무등걸님이 연을 맺어 새싹님이 나오고 새싹님이 흙님과 연을 맺어 푸른나무님이 나오고 푸른나무님이 하늘님의 아들 소나기님과 연을 맺어 그 가지에 영글도록 한 첫 열매가 최초의 사람의 씨앗이었다고 한다. 그 열매를 따 줄 사람이 없어, 열매는 바람에 날려 땅에 떨어지고 이내 썩었는데, 그 열매의 큰 씨 자리에서는 씨앗 대신 한 아기가 나왔다고 한다. 그 아기가 사람의 시조라는 것이다. ……대체로 여러 부족들이 믿는, 사람의 기원이란 이런 식이다. 그래서 그 어느 부족이든지, 만물에 깃든 여러 정(精) 가운데에서 특히 무엇을 우러르느냐는 것은 차이가 있더라도 아무튼 자기네의 신을 자기들의 최초의 조상으로서 모신다는 점만은 매한가지이다.
 반면에 우리 부족에는 그러한 전승이 없다. 신은 우리를 낳지 않았다고 한다. 신이 생명을 불어넣었던 것은 오직 단 하나의 사람, 우리 부족 제사장 가문의 시조뿐이었다. 그래서 제사장과 신관들의 혈통에는 신의 피가 면면히 흐르고 있다 한다. 그것이, 오로지 그 가문의 사람들만이 우리 부족의 일반민들과 신 사이를 이을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러면, 우리 일반민들은? 우리의 시조에 관해서는 언급된 바가 딱히 없다. 우리는 그저 어딘가에서 흘러와, 신의 뜻에 의해 제사장의 가문 사람들을 부족의 지도층으로 옹립하고 신의 뜻에 맞게 살아갈 따름이다. 이러한 탓에, 예전 소부족들과 우리 부족이 격렬히 투쟁하던 시대, 그들은 우리를 자기들의 사생아라고 불렀었다. 그리고 우리 부족은 그 말을 그다지 쉽? 그반박하지 못했다. 그저 러면, 그 말을 내뱉의 전에 러면 부족의 전생아라도륙할 뿐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우리의 혈통에 대하여 조금쯤은 꺼림칙함을 가지고 있다……그리고 아마도 따로 조금쯤은, 우리에게 그 신성한 혈통을 나누어 내려 주지 않은 우리의 신, 우리의 시조에 대한 그 어떤 미화도 하여 주지 않은 그들에 대한 아주 약간의 원망을, 생각의 영역 아래 깊숙이에 묻어 놓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원망의 무덤을 덮었던 잡다한 생각의 검불이, 잿빛이리의 뇌리에서는 아마도 초록반디에 대한 생각에 쓸려나가 버렸을 것이다.
 나는 잿빛이리를 바라보았고, 잿빛이리는 계속, 드문드문, 그러나 점점 더 어기를 강하게 하며 자꾸만 신을 향한 반감을 내비쳤다……아마도 내가 잠들기 전 잿빛이리가 되뇌었던 마지막 말은, 이것이었던 것 같았다: “……초록반디.”
 그 밤 이후로, 잿빛이리는 위험한 줄타기를 시작했다.
 가을 제전으로부터 사흘 뒤 초록반디는, 아마도 그 미모 덕분만은 아닐 것이지만, 그녀를 노예로 삼아 데려간 신관 ‘더부살이’의 측실로 들어갔다. 신분 탓에, 엄밀히 말해 그녀는 잉첩이라기보다는 그저 신관의 잠자리 시중을 드는 여인에 불과할 것이겠으되, 그래도 들리는 말에 따르면 신관은 다른 종이나 노예들, 또는 자기의 처첩들이 그녀를 구박하지 못하도록 엄포를 놓아 두었다고 했다. 그것은 뒤집어서 말하자면, 신관의 권위라는 울타리 안에 그녀가 옴짝달싹 못하도록 갇혀 버린 것이나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잿빛이리는 그것을 뚫으려고 했고……짐작컨대는, 뚫은 모양이었다.
 아마도 초록반디가 더부살이의 여인 가운데에서 가장 순결한 처녀라는 점이 주효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더부살이가 기존에 거느리고 있던 여인들로서는 초록반디가 ‘외간 남자의 손을 탄’, 말하자면 ‘헌 계집’이 되도록 하는 것이 실로 쾌감을 빚는 일이었을 것이다. 더부살이 본인의 권위에 도전할 수는 없었던 그 여인들로서는, 정히 초록반디를 괴롭힐 수조차 없다면, 차라리 초록반디가 제3의 인물에 의해 ‘흠집 난’―더부살이의 입장에서 본다면 말이다―존재로 격하되는 것이라도 보고팠을 것이다. 특히나 그것이 더부살이가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져, 더부살이가 자기도 모르는 틈에 오쟁이를 지는 모욕을 지도록 해 주는 일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을 것이다. 그들로서는 바라마지 않는 바를, 필경은 잿빛이리가 이루어 주었을 터이다. 잿빛이리는 초록반디와의 밀회를 통해 더부살이가 오쟁이를 지도록 할 수 있었고, 초록반디가 그를 반겼다면 그것은 더부살이가 남자로서 무능력하다는 것에 대한 반증처럼 작용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누구나 아는 이야기이지만, 다른 남자가 제공할 수 있는 것을 자기는 제공할 수 없다는 생각은 남자에겐 상당히 괴로운 노릇이다―. 초록반디를 맞은 더부살이에 대한 원망이 이러한 병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필연이었을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런 식의 움직임이란, 꼭 더부살이의 경우가 아니라도, 여러 여인을 거느린 남자라면 알게 모르게 겪기 쉬운 상황이니까. 그러한 원망을 지닌 처첩들의 묵인 덕에, 잿빛이리는 월담을 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잿빛이리가, 나보다 먼저 잠들지 않는 밤이 반복될 때마다 가슴을 졸이기 시작했다. 위험했다. 연정(戀情)에 눈이 멀어 버린, 더구나 과단성 있기까지 한 남자에게라면 흔한 일이지만, 그는 위험을 잊고 있었다. 무엇보다 나쁜 것은, 사랑에 매몰되어버리고 만 이들이 너무 쉽게 거쳐가는 과정대로, 자기가 하는 일이 위험한 짓거리라는 점을 ‘안다고 믿어 놓기만’ 한다는 점이었다. 위험의 존재쯤 가볍게 망각의 벽 너머로 내튕겨버릴 정도로 들뜬 가슴을 지닌 이는, 자기가 위험의 존재를 아는 것만으로도―시시각각 그것을 의식하지도 않으면서!―이미 충분히, ‘현명한 대처’를 해 두고 있는 셈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 우스운 색안경은 애정행각의 끄트머리에서 그 스스로가 덫 속으로 뛰어들고 난 다음에서야 비로소 눈에서 벗겨진다. 앞뒤를 가리지 않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로는 본 적이 없는데도 그것을 모르다가, 덜컥!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나는 잿빛이리에게 진심으로 충고했다. 그녀를 잊어야 한다고. 그러나 잿빛이리는 내 말을 전혀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는 젊은이들이 으레 그러듯 나의 말을 ‘케케묵다’ 여길 따름이었다. 휘발성이 극도로 강한 ‘말(言)’이라는 것이 어떻게 케케묵을 정도로 오래 남을 수 있는가는 되새기지 않았다. 그것이야말로 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그 위험하게 타오르는 눈빛을 통해서 그 사실을 통찰했고, 그래서, 절망했다. 더부살이를 잊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겨울이 다가왔다.
 신들에게 마지막 공양을 올려야 하여, 제사장의 가문 사람들은 다들 바빠졌다. 겨울 문턱에서의 이번 공양으로 올해의 공양은 모두 끝나며, 이제 다음 해의 봄까지는 모두가 사람의 세상 일만을 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 고로 겨울 공양은 신들을 향한 고별사와도 같이 대체로 인식되었고, 때문에 가을 제전보다도 더 신선한 공양물을 올리는 것이 관습이었다.
 사실 마지막 공양의 경우, 제사장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진두지휘하게 되어 있다. 공양을 올릴 때면 늘 그렇지만, 특히 마지막 공양을 할 때는 그가 신들의 동굴로 들어가 있는 시간이 유난히 길어지게 마련이어서, 그 동안 신들의 분노를 사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는 공양물을 각별히 엄선했다. 때문에 이 공양 때는, 부족의 보통 사람들로부터 시시한 곡물을 걷어들인다거나 하는 일이 없었고, 해서 부족 사람들은 이럴 때는 그저, 죄만 저지르지 않고―까딱하면 잡혀들어갈 것이므로―있으면 그뿐이라 언제나 마지막 공양 때를 가장 선호했다. 그것은 대체로 나도 마찬가지였었다. 그러나 올해는 좀 달랐다. 잿빛이리 때문이었다.
 잿빛이리가 나보다 일찍 잠드는 날이란 이미 존재하지 않게 된 지가 오래였다. 그러나 이즈음 들어서, 그의 그러한 늦은 수면은 은밀한 외출 때문이기보다 그의 불면증 탓으로 변모해 버렸다. 그 까닭을 그에게서 직접 캐내지는 않았으나, 나는 이미 상황의 흐름을 알아채고 있었다.
 더부살이는 강한 남자였다. 그는 쉽게 오쟁이를 져 줄 만한 남자도 아니었고, 쉽게 바보가 되어 줄 남자도 아니었다. 자존심 이전에 그의 통찰력이 그것을 거부했다. 더구나, 어릴 적의 친분으로 이미 나는 알고 있었지만, 그는 남의 머리 위에 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을 뿐,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었다.
 더부살이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적어도 두 번째의 만남부터는 알았을 것이다. 잿빛이리가 그의 영역 어디까지를 침범하고 있었던지를 그는 명확하게 꿰뚫고 있었을 것이다. 잿빛이리가 침범한 영역이 어느 여인의 가장 은밀한 곳까지였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것은 권력을 지닌 남자라면 묵인할 수 없어야 할 것이었음도 누구보다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동안은 그것을 묵인했다.
 그의 묵인은, 단언컨대 그가 오쟁이 진 남자임을, 잠자리 시중 노예조차 온전히 점유하지 못하는 쭉정이임을 암묵적으로 공인하고자 하였던 탓은 아니다. 도리어 그것은 상상 이상으로 질긴 감정에서 기인한다. 그것은 그가 잿빛이리와 공유했던 감정이다―초록반디를 향한 연정.
 초록반디를 차지했다고 생각한 순간은 그로서도 큰 행복이었을 것이지만, 그것은 길지 않았을 터이다. 초록반디의 눈이 그를 향한 적이 없었음은 이미 오래 전부터 나조차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초록반디의 몸만을 점유하는 행위가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공허에, 적어도 한동안은 만족했을 것이다―아니면 최소한 만족해 보려고 애를 썼을 것이다. 초록반디를 끝내 차지한 것이 그라고 하는 체면을 차린 이상, 그는 잿빛이리를 초록반디가 받아들이는 것쯤은 눈감아 주려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질투를 억누르는 마음이라는 것은 기형적이지만, 그것이 초록반디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했을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도 사람이며, 따라서 그러한 마음에는 필시 ‘한도(限度)’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도 잿빛이리가, 그리고 더불어 초록반디가 잊어버렸었다는 것이다. 잿빛이리가 초록반디와의 밀회를 더부살이에게 목격당한 그 순간이 아마도 더부살이가 그 한도를 넘어 버린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 순간 더부살이는 그의 마음을 추스르는 데에 성공하고, 그의 통찰력을 부활시켰을 것이다: 더는 오쟁이를 져 줄 수 없으며, 이제는 그것을 벗어버릴 때가 왔음을.
 필요가 없어진 사랑이라면 버릴 수 있는 것이 그의 강인함의 일익(一翼)이다. 그리고 그는 내 상상보다도 훨씬 더 강하고, 질긴 사람이었다. 그는 선을 넘어섰던 그 밤에도, 모두를 함구(緘口)하도록 하고, 잿빛이리를 온전한 몸으로 돌려보냈다.
 그렇게 해서 잿빛이리의 불면(不眠)이 시작되었다. 그를 살려서 보낸 것은 무엇을 위함일까. 다른 이의 여노예와 간통하는 것은, 그 여노예가 잠자리 시중까지 드는 존재였을 경우 특히 그렇겠지만, 중벌을 받을 수 있었다. 여노예의 주인의 명예를 심각하게 더럽힌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리 그가 오쟁이를 졌었음을 외부로 퍼뜨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 해도 더부살이는 너무도 조용히, 단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잿빛이리를 그대로 집으로 돌려보냈다. 잿빛이리도 불안해하는 바이지만, 내가 알기로도, 더부살이는 문제를 ‘조용히 덮는’ 것이 충분한 해결이 될 수 있다고는 결코 여기지 않는 사람이었다. 더구나 이미 초록반디와 잿빛이리는 그들이 선을 넘었음을 더부살이의 눈앞에서 발각당했다. 더부살이는 필시, 그가 어떤 식으로 모욕을 되갚아줄 수 있는지를 가늠하고 있을 것이라고……나는, 그리고 아마도 불면증에 시달리는 동안의 잿빛이리도, 생각했다.
 그리고 그 짐작은 상당히 근사한―더부살이가 보기에―형태로 들어맞았다: 올해 마지막 공양의 아침, 더부살이는 공양물의 자리로 초록반디를 끌고 나왔던 것이다.
 “…….” 잿빛이리의 얼굴은 그녀를 보는 순간 해쓱해졌다.
 초록반디는, 기실 제사장이 이전에도 공양물로 삼아 보고 싶어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녀가 공양된 적은 없었다. 심지어 지난 가을 제전, 그녀가 노예로 전락한 순간에도 공양물로는 오직 상수리나무골의 건장한 남자들만이 선별되었었다. 그때는 아마도 더부살이의 입김이 작용했으리라고 짐작했었다. 초록반디가 더부살이의 노예가 되었던 것부터가 그의 입김 탓이었으리라고 여겨졌었다. 헌데 이제, 그는 명쾌하게―이것이 아마도 가장 정확한 꾸밈토일 것이라고 생각한다―그의 마음을 접어서, 잿빛이리에게 가장 근사한 형태로 내보이고 있었다.
 “…….”
 초록반디의 노모(老母)의 목을 쳐 받아낸 피로 공양의 시작을 선포하고, 더부살이는 손수 그녀를 이끌어 신성한 동굴로 향했다. 그리고 초저녁, 예의 제사장과 같은 모습으로, 더부살이는 피칠갑을 하고서 그곳에서 돌아나왔다. 그제서야 그의 모습은 비로소, 제사장의 맏아들답게 석양의 빛을 받을 수 있었다. 나는 그의 모습이 그 스스로에게 가장 잘 어울리게 변모했다고 생각했다.
 “…….”
 …….

 잿빛이리는 나에게 말했다:

 형, 나는 아주 어렸을 적에, 신성한 동굴에 들어간 적이 있었더랬어.―어떻게?―그건 나도 기억이 나지 않아. 아마도 길을 잃었었던 것 같아. 아무튼 어느 날, 아마도 그때도 지금이랑 비슷한 계절이었던 것 같은데, 난 신성한 동굴에 들어갔었어. 뭐, 어린애답게, 애들이랑 놀다가 숨바꼭질이라도 하려고 했다거나 뭐……. 그랬겠지. 그래서 동굴로 들어갔는데, 난 그 안쪽 깊은 곳으로 달려들어갔었어. 입구에서만 얼쩡얼쩡거리거나 하지 않고 말이야.―누가 말리지는 않았나.―아무도 안 말렸어. 말릴 필요가 없었겠지……사실 지금도 사람들이 신성한 동굴 앞을 늘상 지키고 있는다거나 하지는 않잖아? 어차피 가까이 가려고들 하지조차도 않으니까 말야. 그 시절에도 그러기는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래서 그랬을 거야, 날 동굴에 못 들어가게 막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건.―그랬군.―그래. 그래서 난 아주 깊숙이까지 들어갔어. 내 생각엔 암만 해도 10분 정도는 계속 걸어들어갔었던 것 같아. 그 동굴 입구가 난 언덕은 크지도 않았으니까, 그만하면 난 아마 갈 데까진 갔을 거라고 생각이 들어. 신성한 동굴이 있는 언덕의 꼭대기, 그러니까 그 딱 중간지점쯤이었을까, 아마도 그쯤이었을 거라고 생각해. 감으로는 말야.
 그런데 말이지, 보통 동굴이라고 하면, 한쪽 입구로 들어가서 한참을 걷다 보면 또 다른 입구가 있다거나, 아니면 적어도 반대편이라는 개념을 갖다붙일 만한 무슨 구멍 정도는 있잖아? 이도저도 아니면 완전히 호주머니처럼 틀어막혀서 금방 끝이 나든가. 아무튼, 동굴 안에 깎아지른 듯한 벽이 있는 경우는 없다고 봐야지.―그렇지. 동굴은 속에서 흙이 허물어지고 파이면서 생기는 것이지, 사람이 깎아서 만드는 건 아니니까.―내 말이 그 말이야. 아무튼, 한데, 동굴로 한참 들어가다 보니까 막혔더란 말이야. 그러면 아까도 말했다시피 무슨 우묵한 공간이 있다거나 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았어……돌로 쳐도 우그러지지도 않는, 믿지도 못하게 단단하고 무척 차가운 느낌이 나는 무언가로 된 벽이 서 있었어.
 그리고 그 벽에는 틈이 있었어……일자로, 동굴 천장에 가까운 데에서부터 거의 바닥까지, 가위로 옷감을 한번 모아쥐고 썰면 나는 것 같이 곧은 선으로 된 그런 틈이었어. 거기서 빛이 희미하게 새어나오고 있는 거야, 보니까 말야. 이상했지. 그런 틈이 돌벽에 난다는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었거든. 그래서 호기심이 생겼어……난 그 틈을 잘 살펴 보았어. 그건 주9가위쥔선으 하나도 비집고 들어갈 만큼 폭이 좀 됐어. 물론 그때는 내가 어려서 손도 작았으니까, 지금으로 치자면 아마 그건 내 검지 길이쯤일 거야. 그래도, 안쪽을 들여다보기엔 충분했어, 빛도 있었고―

거기서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러다가, 목울대를 울리며 마른 침을 한 번 삼키고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그 안에는……신이 있었어. 노랗게 빛이 나는 머리에, 하얀 살갗에, 눈이 하늘빛이고 우리보다 머리 하나씩은 큰 그들이. 갈색 머리에 짙은 살갗에 눈도 밤색이고 키도 작은 우리와는 다른 그들이 있었어. 난, 그러니까 신성한 동굴 깊숙이에 있었던, 신들의 보금자리를 들여다본 거야.
 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 내가 그 동굴에 들어갔던 그날은, 신들을 위한 공양과 제전이 열리고 난 그 바로 다음날이었어. 바로 전날에 제사장이 들여보냈던, 공양물로 간 그 사람들이 그 안에 있었어, 신들이랑 같이. 그래, 형, 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누구나 대강은 알지 않나. 신들은 사람에게 쌓인 자연의 기운을 빨아내 자기들의 갈증을 해소하고, 사람의 잔해만을 남겨서 내보낸다. 신들에게 바쳐진 그들의 혼은 지옥으로 가겠지.―
 지옥! 하하하, 물론 지옥이지. 그런데 그 공물들의 혼 같은 건 전혀 없었어. 신들이 손수 지옥을 공물들 앞에 펼쳐 주었거든. 내 말을 알겠어? 난 그걸 봤어……신들은, 신들은 공물들을, 그 바쳐진 사람들을……죽였어.―물론 죽였겠지. 이승에 남겨 두었을 리가 없―아냐! 아니야! 신의 은총다운 죽음 같은 게 아니었단 말이야.
 신들은 사람들을 먹고 있었어. 매번 신성한 동굴에서 되돌아 나오던 제사장이 들고 있었던 것은, 말하자면 신들의 식사 뒤 찌꺼기야. 신들은 사람들을, 마치 야생 토끼를 잡아다 처리하는 양 가죽을 벗기고 살을 발라서 이리저리로 가져가고……그리고 무엇보다도, 웃고 있었어.
 열다섯이 넘은 뒤로는 나도 간혹 부족전쟁에 끼였었지, 그리고 아주 가끔은 신들도 봤어. 하지만 신들은 우리가 부족전쟁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했을 때조차도 웃었던 적이 없어, 언제나 무언가 굉장히 허허로운 표정만 지었을 뿐이지. 그런데 그들은, 사람을 먹으면서는 더할 나위가 없도록 만족스럽게 웃었단 말이야.

잿빛이리의 말이 갈수록 격해졌다. 나는 그를 제지했다. 그는 과연 그의 기억에 대하여서 정확히 술회를 하고 있는 것일까? 새빨간 허풍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으나,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그의 눈에서 초록반디를 보았다. 그는 그에게로 다시는 돌아올 수 없게 된―그리고 내가 확인한 바로는, 또다시 잔해만이 남아서 제사장의 자루에 담겨 동굴에서 돌아나오고, 그리고 며칠 뒤엔 흙에 묻혀서 사라지고 만―그녀를 그리는 옥생각 탓으로 신들을 폄하하는 것일까?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로도 우리 부족의 신들은 사람을 이미 잡아먹고 있었다……우리의 전쟁이 그들의 영광을 위하는 것으로 포장되고, 우리의 축제가 그들을 위한 공양이 되면서부터 우리는 그들을 위하여서 사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러한 우리의 예속만으로도, 이미 신들은 우리를 그들의 먹잇감으로 삼았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잿빛이리의 이야기는 조금 뒤에 끝났고, 그것으로 마지막이었다. 날이 밝자마자 그는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나는 그를 하루 뒤에야, 상수리나무골의 폐허, 초록반디의 옛 집에서 찾아냈다. 그는 그곳에서, 흑요석으로 가슴팍을 꿰뚫어 자살했다. 그의 주검을 나는 그곳에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땅에 묻혀서 초록반디처럼 사라져가는 것보다는, 풍상에 쓸려서 허공으로 흩어지는 것이 그에게는 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신들은 땅에서 나왔으니까.
 적어도 내가 그의 주검을 보고 깨달은 것은, 어릴 적 신들을 목격한 순간부터 그에게 신은 사람보다 조금도 아름답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나도 그들이 아름답다고 여기기 힘들어질 것 같았다. 그들을 위한 공양이라는 빌미 탓에 내 곁의 사람들이 죽어갔으니.

 봄이 돌아왔다.
 제사장에 따르면 신들은 올해, 공양을 퍽 신경써야 하리라고 명을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우리 부족의 젊은이들은, 긴 돌을 갈아 칼을 만들고 흑요석을 쪼개어 도끼날을 꾸며야 했다. 제사장과 신관들의 가문에서 차출한 젊은 노예나, 흉악한 죄를 저지른―사실 소매치기 이상이면 다 흉악범으로 낙인찍어 버리지만―작자들만을 가지고는 신들의 바람을 다 채워 드리기가 어려웠던 모양인지, 제사장이 결국 어려운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즉, 소부족 가운데 하나를 치자는 것이었다―즉, 부족전쟁이다. 상대 부족의 젊은이들을 데려다 공양물로 삼으면 된다는 이야기였다. 제 부족 사람만 아니라면 편한 대로 잡아다 써도 된다는 이야기인가―싶었지만, 나도 또한 사람이지, 신은 아니다. 그런 생각은 어디까지나,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다―하는 생각 다음에만 따라나오게 마련이고, 이번에도 그러했다. 그것이 내가 기운차게 칼을 갈 수 있었던 까닭일 것이다.
 물론 칼에 날을 세우고 흑요석 도끼날을 다듬는 일을 달가워하지 않는 젊은이들도 더러 있었다. 신관들이나 제사장 앞에서야 내색하지 못 하겠으되, 죽 맞는 이들끼리라면 이런 일에 대해서 마뜩찮아하며 서로 쑥덕거리는 경우도 간간이 보였다. 그럴 것이다. 속절없이 공양물이 되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어쨌거나 목숨을 내걸고, 그것도 시비를 걸$마뜩른 부족젊은카는 것이다. 그런 것을 도덕률로서 배워온 젊은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아마도 제사장과 신관들은 그러한 속셈들을 충분히 읽었으리라고 생각되었다. 지금의 부족전쟁이 결코 용사의 일이 아니지 않음을 역설하기 위한 연설을 거듭 하는 것으로 보건대 분명 그러했다. 그들은, 신을 위한 이 봉사야말로 그 어느 평소의 전쟁보다도 고귀한 전쟁이라고 말하며, 심지어는 이 전쟁이 ‘꽃 같다’고까지 외쳐댔다. 꽃처럼 생명을 아름답게 지도록 하여, 그 마무리는 거룩한 공양으로 맺도록 하는 행위라는 것이었다. 글쎄, 이번 부족전쟁이 ‘꽃 전쟁’이라면 아마도 그 꽃은 포포나무꽃 정도밖에는 되지 않을 것 같다.
 우리는 전쟁 준비를 마치자마자 진군했다. 그리고 잔솔나무 부족을 쳤다. 그 부족은 남자가 적은 부족이었기에 전쟁에서는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우리는 그들 부족의 남자들의 목을 베고 여자들을 사로잡아 신들에게로 데려갔다. 신성한 동굴로 우리의 포로들은 일제히 끌려들어갔고, 그리고 다시는 돌아나오지 않았다.
 문제는 신을 위한 공양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봄이어서일까? 겨우내 아무런 공양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어느 쪽이든 그들은 지난 가을 이전까지보다도 훨씬 강한 갈증을 내보였고, 제사장은 그들의 바람을 받들어 우리에게 명하였다: 계속해서 꽃 전쟁을 하라. 명을 받든 이상,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자주 돌칼을 갈고 흑요석을 쪼개야 했다. 그러고는 이번엔 독수리 부족을 쳤다. 그들은 잔솔나무 부족과 다를 것이 없이 쉽게 우리에게 패배했다. 그들이 보내온 전사들은 나이가 이미 서른이 넘은 자들과 열다섯도 채 되지 않은 어린것들뿐이었다. 우리는 그들을 모조리 도륙하고, 그들의 시신과 그 부족의 아름다운 여인들을 신성한 동굴로 밀어넣었다. 이미 신들은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다시 내보내는 사람의 잔해가 뼈와 머리카락, 가죽 조각뿐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었다. 잿빛이리의 말이 옳았을까? 모르겠다. 그의 말이 맞았다면, 우리 부족의 젊은 전사들은 지금 신을 살찌우고 있었다.
 흰바위 부족과 검은새매 부족까지도 우리는 쳐서 무너뜨렸다. 그리고 그들의 나약한 전사들과 여인들을 잡아다 신들에게 먹였다. 신들은 매우 만족한 듯, 굳이 공양 제전을 열지 않아도 이러한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애초에 끝을 모를 듯해 보이는 전쟁을 통해 공양물을 받고 있으면서, 번거롭고 가식적인 제전 따위가 덤으로 필요했을 턱이 없다. 그래서 우리 부족의 젊은이들 가운데 아무도 그러한 공표에 감사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미 연이은 부족전쟁만으로도 지쳤고, 소부족들이 꿈틀거릴까가 두려워 매일 스스로를 단련해 두어야만 했다.
 어느 하루였다. 나를 비롯하여 우리 부족의 전사들은 돌칼을 갈고 있었다. 곧 노란메기 부족을 쳐서 다시금 공양물을 확보해야만 했다. 노란메기의 전사들은 이전부터, 그들 부족이 사는 거친 터전의 기운을 물려받아 성정이 거칠고 끈질겨서, 우리는 그들의 목울대를 단 한 번의 칼질만으로도 벨 수 있을 만치 칼을 예리하게 갈아 두어야만 했다.
 “아름드리.”
 날 세운 칼을 엄지로 쓸어 검수하는 나의 등 뒤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돌아보니 제사장이 서 있었다. 더부살이가 그의 옆에 있었다.
 “잠시 이리 와 보아라.”
 무슨 일인가, 하며 나는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나 외에도 몇 명, 비록 용사는 아니지만 부족전쟁에서 칼이나 도끼를 잘 쓰는 것으로 평이 난 젊은이들이 이미 한곳에 모여 있었다. 나를 비롯한 젊은이들을 향해, 제사장은 말했다. “너희에게 분부할 바가 있다.”
 우리는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번 싸움부터는, 너희는 칼의 날을 세우지 마라.”
 무슨 소리인가, 싶어 우리는 어안이벙벙해하며 제사장을 바라보았다. 돌칼의 날을 세워 두지 말라니, 그렇게 되면 우리의 돌칼은 칼이 아니라 돌몽둥이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런 것으로는 아무리 거세게 휘둘러도 적을 일격에 죽이거나 무력화하기가 쉽지 않다. 정수리를 노려 치는 것은 어지럽게 전사들이 섞여 싸우는 틈에서는 노리기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결국, 칼에 날을 세우지 말라는 것은 우리가 적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닌가―나의 물음에, 제사장은 도리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바로 알아들었다.”
 그는 우리의 적을 단번에 죽이지 말고, 한 곳으로 몰아넣으라 일렀다. 이번 싸움부터는 신들이 우리를 거들어 전쟁에 나오리라는 것이었다. 신의 검은 마술 막대의 권능을 볼 수 있을지니 기대하여도 좋으리라는 소리도 섞어서 그는 우리에게 말했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그런 권능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더구나 신이 전쟁에 나온다면, 아예 적들을 대번에 연달아 죽이거나, 아니면 적의 우수한 용사만을 골라서 죽이거나, 하면 될 일이었다. 그 이상의 도움을 바라지도 않았다. 한데 왜, 도리어 전쟁을 굳이 어렵게 수행해야만 한다는 것인가. 우리는 그 점을 재차 질문했다. 그리고 제사장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의 어조를 바꾸었다:
 “너희는 고기를 얻기 위해, 들로 토끼를 찾아 나가 본 바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토끼를 죽일 때, 너희는 언제나 열과 성을 다해서 그 놈을 단번에 때려잡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물을 쳐 두고 몰아넣어 보기도 했을 것이거니와―” 그는 말했다. “토끼가 펄떡거리며 너희로부터 도망치는 것을 쫓아가는 것 자체가 재미나다고 여겨 굳이 오래도록 놈을 몰아댄 적도 있을 것이다.”
 ……먹고 살 것이 내 손에 달리게 되기 전까지는 그런 기분을 겪어 봤었다. 어릴 적, 아이들끼리 모여서 사냥을 반쯤은 놀이삼아 하던, 성과는 한나절이 지나도록 없기가 일쑤이던 그 시절의 토끼몰이에서라면 그런 식으로 행동을 해 보았던 적도 물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목구멍이 맹수의 이빨보다도 무섭다는 것을 알게 될 나이가 된 이후로 우리에게서는 잊혀져버린 놀이이다. 우리의 사냥은 하루하루가 생활을 위한 투쟁이므로. 그러나, 저 말투만 보아도 알 수 있지만, 제사장은 그렇게 투쟁적으로 사냥을 해 본 적이 없는 모양이다. 받아먹기만 해서일 테지.
 그리고 그의 말을 통해 비로소 우리는 알 수 있었다: 신들은 바로 저 제사장만큼, 아니 필시 제사장보다도 더―배가 부른 것이다. 그래서 사냥을 저렇게 즐길거리로 삼아 보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위하여 토끼몰이를 해 주어야 한다. 사람을 가지고서.
 “나의 뜻은 곧 신의 뜻을 내비친다.”
 제사장이 말했다. “이 뜻을 알아들었느냐?”
 우리는 모두 고개를 끄덕였고, 목울대로 마른 침을 삼켰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의 기분은 중요치 않은 일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우리는 제사장의 명을 따랐고, 그로써 신들의 뜻을 받들었으며, 신들은 그들의 모습을 내보였다. 우리는 노란메기 부족의 터를 들이쳤고, 우리의 오랜 수탈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생각보다도 용사를 훨씬 적게 내보내 끝내는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박살나 버린 그들 부족의 젊은이들을 병든 토끼 쫓듯 몰아서 어느 벼랑에 세웠다. 신들은 그들을 향해 검은 마술 막대를 들었고, 그들의 권능이 노란메기의 아이들에게서 피보라를 뽑아냈다. 신들은 하얀 얼굴에 미소를 띠었고, 나는 우리 부족의 가장 아름다운 처녀와 가장 늠름한 젊은이들보다도 그 얼굴의 곡선이 유려한 그들의 미모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거기에 전혀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나는 잿빛이리를 닮아가기 시작했던 모양이다.
 신들은 우리의 공양물을 받아들일 때도 저렇게 웃었을까? 그들의 얼굴은, 부족전쟁이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한없이 새하얄 뿐 그 무엇도 내보이지 않는 극도로 담담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하얀 가면과도 같은 권태는 피보라가 노란메기 부족 젊은이들의 가슴을 뚫고 치솟던 순간 일시에 사라지고, 환한 미소로 바뀌었다. 이제야 잿빛이리에게 진심으로 찬동하는 바이지만, 나는 초록반디도 아마 신들의 미소 아래서 주검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들은 그 젊은이들의 주검을 모아서 어디론가 가져갔고, 얼마 뒤 마치 신성한 동굴에서 되돌아나올 때의 제사장과 같이 붉은 칠 투성이가 되어서 나타났다. 그리고 우리를 치하한 다음 그들의 터, 동굴 안쪽으로 사라졌다. 그들이 젊은이들의 주검을 어디로 가져갔었는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노란메기 부족의 터전 한구석, 으슥한 곳에 사람의 뼈가 무더기로 널려 있는 것을 우리는 얼마 뒤 볼 수 있었다. 우리는 그 오싹한 광경보다도 먼저 드는 생각에 우선 전율했다: 신들은 아마도 이 사냥 ‘놀이’에 큰 기쁨을 느꼇을 것이며, 보다 자주 이 놀이를 하고 싶어할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전율을 동반한 생각은 맞아들어갔다. 신들은 다음 부족을, 또 다음 소부족을, 계속 칠 것을 명했다. 그리하여 소부족들을 치는 그 ‘꽃 전쟁’이 세 번 더 반복되었다. 이미 우리 부족의 지배는 그들의 과오를 요구하지 않았다. 시비가 필요하다면, 이제는 우리가 그들에게 그것을 걸고 있었다. 신의 뜻으로.

 ─그러나 우리 부족의 ‘꽃’ 전쟁은 아주 새로운 방식으로 그 값을 치르게 되었다.
 지금까지 겪어 본 바가 없는 일이지만, 소부족들이 일제히 연합했다. 그들은 힘을 합쳐서 전사들을 모았다. 과거 우리의 통치 아래에서 우리에게 깔리면서도 동시에 자기들끼리도 다투던 시절을 일소하고, 그들은 우리를 향해 칼을 겨누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에게 이미 충분히 많은 용사가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까닭을 그들과의 첫 교전에서 비로소 알아낼 수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연이어서 소부족을 들이치기 시작한 뒤로, 미리 부족 최고의 전사들을 빼돌려 두고, 당장 크게 힘이 되지 않는 쭉정이 전사들이나 늙은이들만을 내보냈었던 것이다. 요컨대 그들은 우리를 향한 칼을 이미 아주 오래 전부터 갈고 있었던 셈이다.
 그들의 분노가 강하다는 것을 우리는 아주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우리 부족의 전사들은, 첫번의 교전에서 완전히 패배해 버렸던 것이다. 크게 놀라서, 다음 번에는 제사장의 말을 무시하고 돌칼을 예리하게 갈아 지니고 나갔는데도 마찬가지였다. 우리의 용사들은 그들의 독기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많은 전사들이 포로가 되어 그들에게 끌려갔고, 그들은 곧 목만 남아서 우리에게로 돌아왔다.
 제사장은 신들에게 탄원했다: 나서 주기를. 신들은 우리의 용사들을 밀어내고 앞장을 섰다. 그들은 적들의 용사를 향해 일제히 검은 마술 막대를 들었다. 그러나 이번엔 그들의 권능이 생각보다 강하게 않았다. 적은 너무도 많았고, 마술 막대는 그들을 단번에 쓰러뜨릴 수 없었다. 한 번에 고작 대여섯 명만을 쓰러뜨릴 수 있는 권능을 검은 마술 막대는 다섯 번 내보였다.
 신들은 당황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저 소부족 연합의 옛 신들이 큰 힘을 얻어서 돌아왔기 때문일까? 아닐 것이다. 그들은 실체로서의 힘을 준 적이 없으니 돌아오더라도 도움은 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신들의 문제였다. 신들은 검은 마술 막대를 자주 사용하지 않았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검은 마술 막대가 쉰 명의 적 전사들을 쓰러뜨린 뒤 전장에서 물러났다. 무언가 제사장에게 고하고서 그들은 신성한 동굴로 다시 들어갔다. 제사장의 표정으로 보건대 그것은 횡설수설 이상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신성한 동굴에서 신들이 다시 나왔을 때는 재차 우리와 소부족 연합의 교전이 벌어진 다음이었다. 난전이었다. 소부족의 용사들은 우리의 전사들을 거침없이 쓰러뜨렸고, 우리의 용사들은 이미 연이은 지난 승리의 기간 동안 먹고 마신 단 음식과 술 탓에 나약해져 있었다. 젊은 전사들만이 간신히 저들 소부족의 물결을 막아내고, 다시금 신을 불렀다. 그러나 두번째의 신의 도움도 다시 고작 수십에 이르는 저들의 전사들을 도륙했을 따름이었다. 저들의 전사는 이미 천이 넘는 수를 헤아리고 있었음에도. 신들의 행태에서 우리는 알았다. 검은 마술 막대는 오직 수가 적은 적들만을 쉽사리 무너뜨릴 수 있다. 그것이 부릴 수 있는 권능은 한없지가 않다.
 신들은 그들이 부리는 부족이 패배해 멸망할 경우 그들 또한 제때에 공양을 받지 못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고뇌했다. 그들의 검은 마술 막대는 한없는 물건이 아니었는데, 적들은 한없이 많기라도 한 듯이 물밀듯 몰려들어 우리의 전사들을 살육했다. 더군다나 어느 순간부터는, 검은 마술 막대를 들고 나서는 신들의 수조차 차츰 줄어들었다. 검은 마술 막대의 힘도 끝없는 것이 아니었다. 나를 비롯한 전사들은, 어느새 신들의 대부분이 우리들 뒤의 후방 진영으로 물러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신의 가호’ 자체부터가, 무한한 힘을 지닌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전황은 우리 쪽에 절망적이었다.
 그날 저녁, 우리 쪽 전사들이 세 명 가운데 두 명 꼴로 죽어나가 주검으로 벽을 쌓고서야 우리는 소부족 연합을 밀어내고 전투가 소강 상태로 잠시나마 접어들도록 할 수 있었다.
 제사장은 두려움에 젖어서 미치기 직전인 듯해 보였다. 그의 아들인 신관들 가운데에서도 이미 두 명이 혈기를 못 이기고 싸움터로 뛰쳐나갔다가 맞아죽었다. 더부살이는 오른팔이 부러져 아내들의 간호를 받고 있는 차였다. 상황을 뒤집는 것은 우리 사람 전사들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했고, ……이제는 우리의 신들의 가호를 받더라도 불가능해 보였다. 다른 부족의 신들이 한때 우리 앞에서 그러했듯이, 우리의 신들도 이제 무력한 존재로 격하될 시간을 맞이한 것이다. 나를 비롯하여, 모든 전사들은 그 점을 깨달았다. 그리고 우리가 그 점을 깨달았다는 점을 제사장도 깨달았다. 더불어, 우리가 그 사실을 깨달았다는 사실을 제사장도 깨달아 버렸다는 사실을 신들 역시도 깨달았다. 그들의 핏기 없는 얼굴은 한층 더 해쓱해졌다.
 신들은, 그러나 우리의 경외를 박탈당하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 어쩌면 우리가, 그 옛날 우리 앞에 무너진 기억 속 소부족들 가운데 몇몇이 그러하였듯 멸망 직전 그들의 신과 신앙을 스스로 모두 무너뜨려 없앤 것처럼 그들, 우리의 신들 또한 절대적으로 부정해 버리는 것을 ‘두려워했는지도’ 모른다. 신들이 사람을 두려워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전에는 해 본 적이 없었지만, 지금은 분명하게 그것이 떠오르고 있었다. 아마도……신들도 붉은 피를 흘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도.
 이런 ‘불경한’ 생각을 하는 것이 나뿐만은 아닐 것이었다. 나와 눈빛을 교환하는 모든 전사들은 서로 비슷한 눈초리들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각조차 똑같은 것으로 볼 때, 필시 나 역시도 그들과 똑같은 눈초리를 하고 있을 것이다. ……전사들 가운데, 나와 다른 눈을 하고 있는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우리의 생각은 점점 더 음험한 쪽으로 흘러갔다. 우리는, 꼭 죽는 순간에 이르러서만 신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지금 당장이라도……!
 “……!”
 그 생각을 한 것 또한 나뿐만이 아니었다. 한순간 신들의 추레해진 검은 옷 위로 우리들의 시선이 비 오듯 쏟아졌다. 우리의 눈길이 그들에게는 무형(無形)의 화살이었음을 그들의 움찔거림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마치 시위라도 하듯 신들 가운데 일부는 검은 마술 막대를 들고 흔들어 보였다. 그러나 그러는 이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날 밤에는 심지어, 검은 마술 막대를 패대기치고서 있는 대로 소리를 질러 대다가 어딘가로 달려가 버리는 신도 보였다. 그들의 무표정하던 얼굴에 차츰 두려움이 스미고 있었다. 그것은 제사장에게는 악몽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들, 회의를 품기 시작한 전사들에게는 어쩐지 새로운 미래에 대한 기약처럼 보이고 있었다. 우리를 선천적으로 압도한다고 생각했던 존재가 나약해져가는 모습은 우리에게 미묘한 쾌감을 가져다주었다. 흠칫, 놀라며 나는 문득, 우리가 지녀왔던 외경심이란 단지 언제라도 저열한 우월감, 약자로 전락한 이를 짓밟을 때 느끼는 그 아랫배에서부터 올라오는 낯간지러운 유쾌함의 반댓말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순간에, 드디어 시위가 당겨졌다.
 “……?!”
 어디선가 들려온 파열음에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신의 권능이 발현될 때 나는 그 파열음이었다. 소리의 근원은 어느 한 신의 검은 마술 막대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십여 길쯤 떨어진 곳에, 다른 한 신이 가슴을 부여잡고 숨을 헐떡거리며 쓰러져 있었다. 다른 신들은 놀란 눈으로 멍하니 각자 제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신들이 서로 싸운 것이다─빈틈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우리는 일제히 신들에게로 덤벼들었다.
 “……!”
 신들은 경악하며 튕겨일어났지만 이미 늦었다. 우리의 돌칼이 그들의 손목을 치고, 때로는 검은 마술 막대로 후려쳤다. 놀랍게도 그 막대는 우리의 칼질 단 한 번만으로 휘어지고 깨졌다. 그리고 단 한 번의 손상만으로도 신들은 미련 없이 그 막대를 버렸다─그 정도로 쉽게 쓸모없어지는 것이었다니─.
 나는 신들 가운데 하나, 유난히 키가 큰 자에게 덤벼들어 그의 목울대를 돌칼로 노려 찔렀다. 그는 운 좋게도 검은 마술 막대로 내 일격을 받아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의 힘은 소부족의 전사들이 내게 보여주던 것의 반의 반도 되지 않았다. 막대는 힘없이 부서졌고, 나는 씨익 웃었다. 돌칼조차도 버리고 그의 멱살을 잡았다. 한 방만으로 끝내기는 싫어졌던 것이다.
 나는 잿빛이리를 생각했다. 내가 한때 거쳐왔던 그 모든 생각의 길을 똑같이 거쳐오다 그만 단 한 순간에 비틀려 비명으로 가버린 그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와는 다르게 설욕의 기회를 잡는 데 성공한 나를 그에 비겨 보았다. 그가 나보다 어리석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보다, 나는 이미 한 번 실패했고 그는 성공을 겪어 보았기에, 때가 오는 날까지 도리어 더 오래 견디지 못했던 것이었다─잿빛이리에게 나는 이미 패배해 보았던 것이다, 초록반디를 걸고서. 그래서 나는 초록반디의 공양을 견딜 수 있었지만, 그, 잿빛이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처음 맞는 실패를 견디지 못하는 자는 위쪽의 목표로 튕겨오르지 못한다. 그 실패가, 그 자신이라고 하는 용수철을 누르는 힘이 됨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단 한번 튕겨오르기만 하면, 천장까지 뚫어버릴 수 있는데도─사실, 이 점은 나조차도 조금 전에서야 직시할 수 있었던 것이지만.
 더부살이와 제사장이 우리에게로 덤벼왔다. 그러나 그들의 싸움 실력이 좋을 리가 없었다. 우리는 금방 그들을 두들겨 놓고, 다시 신에게로의 도전을 계속했다. 더부살이의 어금니가 땅에 나뒹구는 것을 보며 나는 풀었던 신의 멱살을 다시 잡아채 그를 끌어당겼다.
 신은 분노했다. 그러나 그의 분노는 마치 어른의 손에 팔목을 잡힌 어린아이의 발버둥만큼이나 무력했다. 그는 눈빛만으로 나를 태워 죽일 수도, 말소리만으로 나를 찢어 죽일 수도 없었다. 검은 마술 막대가 없는 그의 권능은 나에게 닥쳐오지 못했다. 나는 미소를 지었고, 주먹을 쥐었고, 그의 왼쪽 관자놀이를 힘주어 갈겼다. 그는 멍한 표정을 지으며 단번에 나가떨어졌다. 그의 큰 몸집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가 팔을 휘둘러 댔지만, 그의 주먹은 너무도 나약했다. 잘 먹어서 기름져지기만 한 그의 몸뚱이가 박한 것을 먹으며 기름기 없이 굳도록 키운 내 몸을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그의 팔뚝은 심지어 늙은 제사장의 주먹보다도 나약했다. 나는 미소를 잃지 않으며 그의 얼굴을 후려치고, 두 손으로 짓이겼다. 그도 나와 마찬가지로 맞으면 피를 흘렸다. 그리고 아픔으로 표정이 일그러질 수도 있었고, 공포로 눈동자가 커질 수도 있었다. 턱을 걷어차서 부수는 순간에 그가 내뱉은 말은 외마디 비명이었다. ‘-타앙!’
 그때 무언가 친숙하고 날카로운 파열음이 들렸다. 그리고 비로소 나의 가슴팍에서 피보라가 솟았다. 신의 한 검은 마술 막대가 뒤에서 나를 겨누었던 것이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둔해지는 몸으로도 나는 땅에서 큰 돌을 하나 들어올릴 수 있었고, 땅에 널브러져서 버르적거리는 신에게 나는 그것을 나의 몸무게를 실어서 내리찍을 수 있었다. 그 한 번의 타격으로 신은 버르적거리기를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흐르는 피와 함께 나의 움직임도 멈추었다. 더는 움직일 힘이 없었다―그러나 나는 스스로 미소할 수 있었다. 나는 드디어 해답을 찾았다.
 신은 인간의 높이로 내려올 수 있다……아니면, 사람이 신의 높이로 올라갈 수 있는 것일 터이다. ……어느 쪽이든, 신의 격노는 필연코 그 경이를 잃는 쪽으로 흐른다―그렇다면, 믿음은 오로지 종복(從僕)의 도덕이다. ……오늘, 신은 죽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유쾌하다.
누구나 알 것이다시피, 기억은 아주 쉽게 흐트러지거니와, 휘발성이다; 그리고 특히나 무언가 하나의 생각 덩어리에 살을 붙이고자 이리저리 굴리다 보면 그 휘발성은, 뜻하는 바와는 정반대로 자꾸만 위험스레 커져만 간다. 그것은 비단 나와 같은 풋내기에게뿐만 아니라 그 어떤 류의 어떤 글을 쓰는 누구라도 크게든 작게든 견뎌야 할 문제일 것이다. 바로 그 점이 매번 글을 쓰는 동안의 우리의 부담에 가중(加重)한다. 단 한 절(節)을 쓰더라도 누구이든지, 과연 자기가 뇌리에서 굴리고 있던 그 뒷맛 짜릿하던 생각의 덩어리가 온전히 글로 옮겨졌는가를 회의할 수밖에 없으며, 그 자문의 대답은 특히나 매번 회의적이다. 더욱이 대개의 글은 단가(短歌)가 아니다. 단편소설만 되더라도 이미, 우려하던 왜곡은 가시화(可視化)된다. 그러므로 언제나 자기 글의 ‘질’에 대한 글쓴이의 자평은 회의로 흐르게 마련이다.
따라서 글에 대한 타인의 평은 언제나 귀중한 거울이며, 특히나 그것이 일말의 긍정을 말한다면 그것은 가없는 기쁨일 수밖에 없다. 이 졸고(拙稿)의 주인에 그러한 기꺼움을 베푼 이번의 수상에, 나는 진심으로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