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 <세 자매> 속 서사시 <루슬란과 류드밀라>

기자명 이은지 기자 (kafkaesk@skku.edu)

동결은 했다지만 여전히 무시무시한 등록금 액수 앞에 한숨짓는 대학생들. 대학의 독립성과 학문의 자유는 △수익 △효율 △경쟁 등 시장의 논리에 묶여 시대착오적인 담론으로 치부된 지 오래입니다. 졸업만 하면 벗어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게 웬일인가요. 청년 실업으로 졸업을 유예하는 ‘대학 5학년생’이 넘쳐나는 것이 냉혹한 현실. 우리의 의지와는 다르게 돌아가는, 탈출구도 없는 난장 속에서 삶과 실존에 대해 절로 의문이 듭니다.

이렇듯 답답한 대학가 표정처럼 안톤 체호프의 희곡 <세자매>의 인간 군상 또한 울상입니다. 이 극은 러시아 지방 도시를 배경으로, 꿈과 현실이 충돌하는 세 자매의 삶을 그리고 있는데요. 특히 둘째인 마샤는 어린 나이에 결혼했지만 지금의 남편에 질려 만족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인물입니다. 냉소적이면서도 무엇인가 항상 불안하고 위태로워 보이는 그녀가 줄곧 읊는 구절이 있습니다. “외딴 바닷가에 푸르른 떡갈나무 한 그루 있네. 황금빛 사슬 그 둥치에 매어져…… 내가 왜 이럴까? 오늘 아침부터 이 구절이 머릿속에 달라붙어 떠나지 않는군요”

마샤를 사로잡은 이 구절은 러시아의 국민 시인이라 일컬어지는 푸쉬킨의 서사시 <루슬란과 류드밀라>의 처음 부분입니다. 갓 결혼한 왕자 루슬란과 공주 류드밀라의 첫날밤에 난쟁이 괴물이 공주를 납치해가자, 그녀를 찾아 험난한 여정에 오르는 왕자의 모험담이 주된 줄거리이지요. 악마의 소굴에 갇혀 자살을 결심할 정도로 슬퍼하면서도, 한 줄기 희망을 버리지 않고 구원을 기다리는 류드밀라. 마샤는 어쩌면 비운의 공주와 자신의 외로운 처지를 동일시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체호프가 마샤의 입을 빌어 푸쉬킨의 시를 외게 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닙니다. 그녀의 대사 외에도 작품 곳곳에서 푸쉬킨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극단 드림플레이의 김연민 연출가는 “체호프는 시를 인용했을 뿐 아니라 등장인물의 죽음을 통해 결투로 죽은 푸쉬킨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고 덧붙입니다. <세자매>에 나타난 작가의 세계관 또한 푸쉬킨과 밀접한 연관이 보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톨스토이는 체호프를 ‘산문에서의 푸쉬킨’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이를 더러 문학평론가 김영걸은 그의 저서 『문예사조, 그리고 세계의 작가들』에서 ‘체호프가 푸쉬킨의 시에 나타난 극단적인 간결성과 절제를 산문의 영역에서 계승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두 대문호의 교집합인 간결성은 단순히 문장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삶을 관조하는 담담함으로 이어집니다. 현실이 어렵고 알 수 없는 것이더라도 언젠가 지금 이 고통의 의미는 분명해질 것이라는 믿음. 결국 <세자매>의 마샤도 자신에게 드리워진 불행의 그늘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만들어가야 할 인생을 똑똑히 마주하게 됩니다. 이처럼 불행한 인간 생활에 대해서 허황된 꿈을 꾸거나 절규하기보다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는 것 아닐까요. 푸쉬킨의 시 <삶>에서 말하는 것처럼 말이죠.

올해는 체호프가 탄생한 지 1백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푸쉬킨에서 유래한 체호프의 세계관은 그가 살아가던 1880년대 러시아의 염세주의를 한바탕 꼬집었습니다. 자신의 인생에서조차 주체로 서지 못하고 소외된 채 심한 고독감과 무기력함을 느끼는, 흐릿한 회색 분자들. 두 작가는 그들로 하여금 다시 삶에 대한 희망과 기대로 물들게 한 것이죠. 오늘날 다시 읽는 체호프와 푸쉬킨이 우리에게는 또 어떤 울림을 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