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조은혜 기자 (amy0636@skku.edu)

공연에 대해 생각해보라. 웅장한 음악과 눈에 확 들어오는 배우들의 동작 그리고 조용히 무대를 관람하는 공연을 상상했다면 아직 공연 ‘배우가 읽어주는 소설’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배우가 읽어주는 소설’은 한 사람의 배우가 단편소설을 그 만의 목소리로 읽어주는 공연이다. 공연이 갖는 틀을 깬 새로운 형식의 향기를 느껴보자.



지난 11일 뜻밖의 추위가 다가온 정오 무렵, 선돌극장에는 ‘배우가 읽어주는 소설’을 보기 위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차차 관객이 자리에 앉자 바리스타 홍성주 씨는 정성스럽게 커피를 내리기 시작한다. 관객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전해진 커피와 함께 ‘배우가 읽어주는 소설’은 막을 올렸다. 어수선한 관객석을 차분하게 만드는 잔잔한 조명이 단 한 곳을 비춘다.  그 날의 소설 박완서 작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을 읽는 배우 천정하 씨와 그의 소박한 나무 책상만을 향하고 있었다. 배우의 짤막한 인사로 시작한 공연. 관객과 같은 커피 한 잔을 들고 배우와 관객 간의 긴밀한 소통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편안한 음성 중간 중간 배우의 연기력까지 더해져 극의 분위기를 더해간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이야기를 나누는 듯한 배우의 목소리와 잔잔한 커피 향만이 남는다. 어느 순간 깊어진 공연은 중간 중간 시대적 배경에 맞는 50, 60년대 배경을 담은 사진과 당시 유행했던 음악으로 인해 배우 주변의 느낌을 모두 바꿔놓고, 그렇게 흘러간 극은 역시나 그렇듯 배우의 목소리로 끝을 맺는다. 이 공연을 관람한 관객 김정미(26) 씨는 “알고 있던 소설이였는데 어떻게 낭독할지 궁금해서 왔다”며 “낭독만으로도 감정이입이 돼 좋았다”고 말했다.

배우가 낭독하는 공연. ‘배우가 읽어주는 소설’은 어느 곳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파격적이면서도 실험적인 형식의 극이다. 특히나 연기력을 갖춘 배우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소설을 읽어줌으로써 눈으로 보는 소설이 아닌 목소리로 듣는 철저히 청각에 의존한 소설로 탈바꿈한다. 이 공연의 연출가인 성기웅 씨는 “낭독을 통해 듣기만하는 공연은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좋다”며 여백의 미를 강조했다. 현재 대부분의 공연은 도구와 배우의 분장 등 모든 요소를 보여주며 관객의 감정을 더 깊어지게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성 연출가는 “작품을 통해 감정을 자극하고 싶지는 않았다”며 “기본적인 정서를 관객 스스로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고자 했다”고 말했다. 복잡하고 다양한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전달하기 보다는 배우 외의 다른 소리나 연출 없이 여백의 미를 강조하고 한 것이다.

공연 중간중간 조용히 들리는 음악과 몇 장의 사진을 제외하고 나면 결국 ‘배우가 읽어주는 소설’은 배우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 어떤 공연보다도 배우에게 맡겨진 극인 것이다. 실제로도 많은 연출을 하려하지 않고 배우를 통해 소설을 전달하는데 큰 초점을 두고 있다. 천 배우는 “사실 1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공연을 이끌어간 다는 것이 몹시 힘들기도 하다”며 “공연을 할 때마다 감정을 이입하고 그 캐릭터에 맞게 읽을 수 있도록 노력한다”고 말했다. 또한 책을 낭독하는 중간에 배우가 관객에게 각본에 없는 이런 저런 얘기를 건네는 일도 배우의 역량 중 하나이다.

‘배우가 읽어주는 소설’에서 제공하는 커피 또한 이 공연의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커피 반입이 일반적으로 금지돼있는 다른 공연장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성 연출가는 “공연이라고 해서 꼭 엄숙해야 할 필요는 없고, 꽉 짜인 형식도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며 커피를 제공한 계기를 밝혔다. 또한 문학과 함께하는 커피는 관객에게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하며 소설의 풍미를 더해주는 역할을 한다.

화려한 볼거리가 있는 곳도 아니고, 엄청난 재미가 있는 곳도 아니다. 하지만 눈보다는 귀를 통해, 머리보다는 마음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공연장과 소리로 전해질 소설이 있는 공연장. 바리스타 손으로 직접 내린 쌉싸름한 커피와 한 켠에 놓은 나무책상이 이야기를 전해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