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품화된 오늘날 웃음… 시대 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

기자명 고두리 기자 (doori0914@skku.edu)

인생은 희로애락(喜怒哀樂)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 중 ‘희’와 ‘락’의 필수요소는 바로 웃음이다. ‘희’와 ‘락’의 전제조건은 웃음이며, 웃음이 없다면 우리는 정녕 우울한 삶을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웃음’은 과연 무엇일까? 단순하고도 명쾌하게 정의되지 않은, 가벼워 보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웃음. 본 기사에서는 현대사회에서 나타난 웃음에 대해 고찰해 보려 한다. 


다양한 학문에서 논의
우리는 무언가 재밌는 것을 보고, 읽고, 듣게 될 때 ‘우스꽝스럽다’, ‘코믹하다’ 또는 ‘해학적이다’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개념들을 모두 내포하는 용어, 즉 웃음을 일으키게 하는 모든 것은 ‘희극적’이라는 용어로 포괄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웃음을 일으키게 하는 모든 것은 희극적인 것이다.
웃음은 △인류학 △철학 △미학 △문예학 △심리학 △사회학 △생리학 등 전반적인 학문에 걸쳐 논의되고 있는 주제다. 우리는 웃음의 원인을 주로 생리학적 관점에서만 보는 경향이 있는데, 이른바 ‘웃음 생리학’에서는 재밌는 상황이나 행동에 대해 본능적으로 웃음이 발생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웃음은 앞서 말했듯이 다양한 학문에서 연구되기 때문에 생리학만으로 웃음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 평소 우리가 ‘웃음’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미학 이전의 현상인 일상생활의 다양한 원인에서 유래하기에 아직까지 웃음의 모든 현상을 아우르는 이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웃음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만큼 메마른 현대사회에 오아시스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현대인은 답답한 사회에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일탈’을 꿈꾼다. 그러나 그들이 직접 일탈을 하기엔 위험변수가 너무 많다. 직장에서 해고될 수도 있으며, 사람들에게 부정적으로 낙인찍힐 수도 있다. 또한, 웃음마저 직접 어떠한 행위를 통해 얻어야 한다면 현대인들의 어깨는 점점 더 무거워지고 지쳐버릴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직접 일탈을 꿈꾸기보다는 누군가에 의해서 일탈의 느낌을 얻고 싶어한다. 즉, 누군가의 일탈적인 행동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고, 그것을 통해 웃음을 얻는다. 그 누군가는 가령 오늘날 코미디언이나 연예인 정도가 될 수 있겠다. 

‘상품화’된 웃음 소비하는 현대인
최근 방송에서는 개그 프로그램과 더불어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그러나 오늘날 개그ㆍ연예 프로그램에서 보이는 웃음은 어딘가 모르게 직조되고 짜여진 각본같은 느낌이 든다. 프로그램에 출연한 연예인은 자신을 한없이 낮춰 자기비하하거나 우스꽝스러운 분장을 서슴지 않는다. 몸 개그를 의미하는 슬랩스틱 역시 오늘날 웃음 소재에 빠져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다. 뿐만 아니라 상대방 비하를 해 함부로 말을 하거나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소재를 통해 우리에게 웃음을 강요하고 있다. 내면의 진정한 웃음보다는 작위적으로 웃음을 ‘소비’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하지만 개그ㆍ연예 프로그램에서 보이는 웃음 역시 웃음의 한 종류이며, 이러한 웃음이 현대인에게 ‘희’와 ‘락’을 제공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시대가 변하면서 웃음의 의미가 변하는 것은 당연하며, 이러한 웃음을 원하는 현대인들이 존재한 이상 한 사회에서 웃음의 유형은 쉽게 변할 리 만무하다. 웃음은 우리가 생활하는 △사회 △문화 △역사적인 전통 등에 대한 하나의 반응이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우리가 생활하는 시간적ㆍ공간적 공간에서 요구되는 ‘규범’의 일탈이 웃음이다. 이는 키케로(Cicero)의 ‘무해한 규범의 일탈이론’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다. 키케로의 『웅변가론』 제2권 255장에서는 “코믹의 가장 잘 알려진 형태는 우리가 기대한 것과 무언가 다른 것이 말해질 때”라고 설명돼 있다. 여기서 ‘기대한 것과 무언가 다른 것’이란 바로 ‘기대규범의 일탈’을 의미한다.

위에서 언급한 현대사회에서 보이는 웃음은 고전 학자들의 이론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17세기 홉스(Hobbes)는 웃음에 대해 ‘우월이론’을 주장했는데, 사람들은 타인의 결함 또는 자신이 이전에 갖고 있던 결함으로 인해 웃음이 발생한다고 한다. 홉스에게 있어서 웃음은 비웃음, 그것도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고 기뻐하는 마음에서 유리한 비웃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희극적인 것은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환원되기 때문에 그의 웃음에 대한 정의는 아주 제한적인 의미에서만 유효하다. 따라서 홉스가 희극적인 것을 우스꽝스러운 것에만 한정짓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웃는 이유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웃음이론과도 연결된다. 그의 우스꽝스러움에 대한 정의는 고통도 주지 않고 감정도 손상되지 않은 실수나 결점, 즉 무해한 실수나 결점으로 귀결된다. 웃는 대상이나 실수로 말미암아 웃음의 대상이 된 사람이 전혀 손상을 입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개그맨들은 웃기는 사람이란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의도적인 실수는 일상생활에서 실수의 행위와 달리 항상 ‘무해성(無害性)’을 담보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을 보면서 우리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생산 주체는 바로 ‘자신’
그렇다면 오늘날 작위적인 웃음에 대해 우리는 TV프로그램만을 탓할 수 있을까? 오히려 우리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보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장 파울(Jean Paul)은 희극적인 것을 관찰하는 사람의 관점, 즉 주체의 관점을 중요하게 본다. 사람들의 나이와 교육수준에 따라 웃음의 반응은 각각 다르다. 다시 말하면 그에게 있어서는 주관적인 계기가 희극적인 효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사람이나 사물 자체가 우스꽝스러운 것이 아니라, 관찰자의 입장에서 우스꽝스럽다는 의미다. 따라서 장 파울은 “희극적인 것은 숭고한 것과 같이 결코 객체에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에 거주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현대사회는 이러한 웃음을 원하고 있고, 그러한 웃음에 반응하는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따라서 오늘날 생산되는 웃음 자체를 부정하거나 비난할 필요는 없다. 웃고 있는 사람도 ‘우리’며, 웃게 하는 사람도 ‘우리’다. 우리가 변한다면, 우리의 사회가 변한다면, 현재의 웃음도 자연스레 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