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륜동 토박이 상점 주인 인터뷰

기자명 박하나 기자 (melissa12@skku.edu)

아름답고 세련된 건물이 많거나 차가 다니기 편하면 도시로서 최상의 가치를 지니는 것일까. 오래된 건물에는 그곳에서 지내온 사람들의 흔적이 묻는다. 그 장소에 관한 그들의 추억은 그곳을 영원히 존재하게 만들고 도시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그렇다면 우리 학교 근처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숨어 있을까. 우리 학교가 생긴 이후부터 지금까지 많은 시간이 흘러왔고 수많은 사람이 지나쳐갔다. 우리 학교의 정문 앞, 성대생들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오랜 시간 함께 해온 상점의 주인들을 만나 그들의 기억을 들어봤다.

■‘G-마트’ 신운식 씨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여기 살았으니까, 이 지역 토박이지. 여기서 장사를 시작한 지는 30년 됐어. 그동안 주점, 카페, 오락실 등 여러 가지 했지. 오락실을 할 때는 고시생들이 많이 왔는데, 만날 오락하러 오던 학생이 어느 날 갑자기 고시에 붙었다고 하더니, 지금은 변호사가 됐어. 지금까지 알고 지내는 학생들도 있지. 요 근처에 졸업생들이 하는 상점도 많잖아. 옛날이랑 지금은 정말 많이 변했지. 학교 앞에 도로를 깔아서 버스도 다니게 되고 또 학생들도 많이 달라졌어. 예전에는 술도 자주 먹었는데 특히 정문 근처에 있는 청동상에서 많이 먹었지. 근데 학교 주인이 바뀌면서 방침도 졸업 제도도 바뀌고 경제가 어려워서 취업도 힘들어졌잖아. 그러니까 대학 문화도 변한 거야. 지금의 학생들은 그때와는 천지차이야. 요새는 새 학기라고 신입생들의 모습이 자주 보이는데 그 학생들도 2학년만 되도 학점에 취업에 공부하느라 다들 바쁠걸. 옛날에 있던 야간식당들도 요새는 다 없어졌어. 왜 20명 넘는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가서 감자탕 같은 메뉴에 저렴하게 밤새 술 마시던 식당들 말이야. 아마 옛날이랑은 다르게 요새는 대학을 나와도 취업하기 어려워서 그런가봐”

■‘유림복사’ 성현옥 씨
“여기서 장사한 지는 이제 22년이 됐어. 그동안 이 근처도 정말 많이 바뀌었지. 요기 앞에 있는 공터에 원래 상점이 세 개나 있었어. 복사 집이랑 문방구, 식당이었는데 건물 주인 아저씨가 암에 걸리시는 바람에 수술비도 많이 들고 그래서 얼결에 팔았거든. 그 건물을 학교가 사들여서 저렇게 공터를 만들었지. 또 우리 상점 앞에는 공중전화가 하나 있었는데, 그때는 학생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데모를 했어. 최루탄도 던지고 난리라서 공중전화를 쓸 수가 없었지. 셔터도 내려야 할 상황이었으니까. 한 번은 공중전화를 쓰다가 최루가스를 마신 적도 있는데, 정말 데굴데굴 구르고 말도 아니었어. 그래도 옛날에는 다들 허리띠 졸라매고 어렵게 살 때라서 대학원 야간반을 다니는 친구들이 상점에 들릴 때면 밤늦게까지 배도 고프고 고생하는 것 같아 이것저것 먹여 보내기도 하고 학생들은 내게 ‘이모, 이모’하며 농담도 곧잘 주고받았어. 내 큰아들이 지금 31살이고, 막내가 29살인데 그래선지 학생들이 다 내 자식 같고 내 새끼 같아. 또 어디 어디 과라고 말하면 그 과를 나온 선배들이 생각나기도 하고. 여기서 장사한 지 20년이 넘어가다 보니, 옛날에는 학부생이었는데 지금은 교수가 돼서 찾아와 인사해주고 할 때면 정말 보람을 느껴”

■‘형제갈비’ 이성근 씨
“우리는 학교 앞에서 정말 오래 장사를 했고 그만큼 성대생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해. 돈을 크게 번 건 아니지만 먹고 살 만해졌으니까 우리도 뭔가 도움을 주고 베풀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어. 마침 기회가 돼서 성균패밀리를 하게 됐지. 이 장사를 시작한 지는 30년 정도 됐는데, 지금 있는 장소가 세 번째로 옮긴 곳이야. 여기로는 96년도에 옮겼지. 맨 처음에는 예전에 버거킹이 있던 곳, 성균관대 입구 교차로에 있는 허름한 한옥에서 시작했어. 근데 그때만 해도 학생 운동이 매일같이 일어나고 백골단(8~90년대 시위를 진압했던 사복경찰관으로 구성된 경찰부대)이 진압하러 다니는 그런 상황이었거든. 학생들이 도망다니고 맞고 이러는 게 너무 안타까워서 골목골목 다니면서 돕기도 했지. 그때부터 인연이 닿아서 지금까지 찾아오는 학생들도 있어. 우리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상호를 그대로 쓰고 있거든. 50대 중반이 다 된 졸업생들도 찾아오는데, 결혼하고 자제를 둔 사람들이 찾아와서 아이들에게 아빠, 엄마의 학창시절 추억이 담긴 곳이라면서 반가워해. 그런 모습을 보면 우리도 정말 반갑고 상호를 지키며 이 자리에 오래 있는 게 의미 있게 느껴지곤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