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훈(경제06)

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지난 2월, 헌법재판소가 형법의 사형제도에 대한 위헌법률심판에서 합헌결정을 내렸다. 1996년 합헌결정 이후 13년만의 일이다. 하지만 합헌이라는 결론과 별개로 다수의 재판관들이 사형제도 운영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 점은 의미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사형제도를 바라보는 시각은 종교, 철학, 경제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그에 따른 논리들은 팽팽한 입장차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공감대가 형성된다. 생각건대 헌법재판소에서까지 거론되는 사안에 대해 양측의 논리는 오죽 정교할까?

그런데 우리들은 보통 이런 시대적 사건을 바라볼 때 일차적으로 어떤 논리보다는 개인의 가치관이 반영된 ‘직관’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인다. 논리는 그 후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조금 양보해서 이 점을 인정하고 나면 너무나 순수한 것 같은 다음의 문구는 어떠한 말보다 설득력을 갖는다.

“살인 현장을 목격한 사람은 사형제 존치론자가 되고, 사형 현장을 목격한 사람은 사형제 폐지론자가 된다.” 지난 2005년 출간되어 젊은 사형수와 세 번의 자살을 시도했던 여교수의 사랑을 그린 공지영 작가의 장편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한 대목이다.

선택적으로나마 영화나 도서 등의 매체를 통해 사형수들의 잔혹한 교정현장을 접하게 되면  한번쯤은 사형제 폐지론자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들의 행복한 저녁 9시에 방영되는 각종 흉악 범죄자들의 실상에 다시금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다. 위에서 언급한 순수한 논리대로라면 사형제도에 대한 균형 잡힌 사고는 애초에 불가능한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극악 살인사건의 현장검증까지 보도되는 현대사회에서는 그렇다. 이런 상황에서 법이 말하는 사형제도의 존폐의 이유 중 ‘국민의 정의관념’, ‘그 시대의 건전한 사회통념’ 같은 고상한 단어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50년이 넘은 형법역사에서 인간의 죄를 법리에 따라 정죄(定罪)하기는 쉬워도 단죄(斷罪)의 방법론에는 어려움이 따르기 마련이다. 한번 뇌리에 각인된 직관은 잘 바뀌지 않는다. 생각해보자. 단순히 직관에 의한 사고를 산만한 논리로 포장하고 있지는 않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