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예가 배방남 명인

기자명 김영인 기자 (youngin09@skku.edu)

배방남 씨 앞에선 금속과 나무, 돌 모두 수줍게 차례를 기다린다. 그의 손을 거치면 무엇이라도 큰 꿈을 품고 새롭게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장승 조각가나 석재상감공예가로 알려진 그지만, 어떤 수식어도 그의 장인 정신을 담아내기엔 모자람이 느껴진다. 68년의 인생 동안 민속 문화를 후세에게 전한다는 사명을 갖고 살아온 그는 오늘도 작품에 그 뜻을 담고 있었다.

김영인 기자(이하:김)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공예와 인연이 깊다고 들었다
배방남 공예가(이하:배) 할아버지는 석공예를 하셨고, 아버지는 금속공예를 하셨다. 5살 때부터 할아버지와 함께 아치형 다리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기도 했고, 일본과의 교류가 많았던 아버지 덕분에 일본에 전해진 수많은 우리 전통문화를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 공예를 죽기보다 싫어하던 때가 있는데, 내 몸에도 공예의 피가 흐르나 보다. 지금 나의 꼴을 보면(웃음).

김 작품 창작시 민속이나 전통, 역사를 가장 중요시한다고
배 집안 대대로 그랬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재산을 처분해 독립운동 자금을 댔고, 아버지 역시 그 뜻을 따랐다. 결국 아버지가 물려준 것은 그가 사용하던 조각칼이나 자와 같은 도구뿐이지만 내겐 무엇보다 값지다. 민족의 혼을 이어가라는 ‘사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에 전해진 백제문화는 체계적인 연구를 통해 융성하게 발전된 반면,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그렇지 못하다는 점에서 백제문화에 관심이 많다. 백제가 역사적 패배자라는 이유로 흔적도 찾기 어려워졌는데 사라져가는 백제문화를 다시 찾아 후세에 제대로 전하고 싶다. 

사라져가는 우리 문화를 되찾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
배 경제적 어려움이 있다. 하루 일해 재료를 사고 생활을 하는데, 형편이 어려울 때라도 작품 활동을 중단할 수는 없어 일주일 동안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난방이 되지 않는 방에서 자며 밥값, 기름 값을 아껴 작품 활동을 했다. 물론 아직도 어려운 부분이 있지만 피눈물나게 고생을 하면서도 내 뜻을 꺾지 않다 보니 결국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적어도 요새는 밥을 굶지는 않는다(웃음).

민속 문화 전승을 위해 하나의 장르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활동을 하는 것인가
배 사람들이 가끔 내게 ‘당신은 무엇 하는 사람이요?’라고 묻는다. 내가 한 가지 길을 걷지 않고 이것저것 정신없이 한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돌을 재료로 삼으면 ‘석공예’, 나무를 재료로 삼으면 ‘목공예’라는 식으로 규정짓는데, 그것은 썩어빠진 정신이다. 무엇을 담는가가 중요한 것이지 돌을 만지는 사람이 나무를 만지고, 금속을 만진다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후손들에게 전통문화를 올바르게 물려줄 수 있다면 언제라도 새로운 도전을 할 것이다.

작품 중 ‘눈높이 장승’이라고 불리는 장승이나, 돌로 만든 장승이 특이한데
배 장승이 토속신앙을 대표한다는 점이 매력 있어 꾸준히 장승을 만들어 오던 중 한 아이가 “장승은 너무 커서 목이 아프고 무섭다”고 말했다. 그때 생각했다. ‘아이의 눈높이를 맞추자’고. 누구에게나 친근한 장승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한 돌장승은 나무보다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 역할에 적합하다 여겨져 옛날부터 있었다. 나는 그저 사라졌던 문화를 찾아낸 것이다. 이를 보다 제대로 전하고 싶어 2000년 2월 제1회 장승축제를 시작으로 6회까지 매년 장승축제를 개최했다. 돌쟁이가 뭔 장승을 안다고 축제를 여느냐며 욕도 실컷 들었지만, 내가 어릴 때부터 장승을 만져보며 느껴왔던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도 전하고 싶었기에 포기하지 않았다. 점점 많은 사람과 함께하는 축제가 됐지만, 4년 전 교통사고를 당한 후 후유증으로 인해 아직 7회를 개최하지는 못했다.

김 사고 후 석재에 상감기법을 활용한 작품 창작에 힘을 쏟게 됐다고
배 ‘돌’로 다시 돌아온 거다. 불의의 사고가 작품 활동의 전환점이 됐다. 사실 삼국시대부터 조상들은 금속이나 목재의 표면에 여러 무늬를 새겨서 그 속에 같은 모양의 금ㆍ은ㆍ보석ㆍ뼈ㆍ자개 따위 다른 재료를 박아 넣는 공예기법인 ‘상감’기법을 이용해왔다. 이 기술은 세계적으로도 찾아볼 수 없는 훌륭한 우리만의 것이지만, 아버지 대에서 나로 넘어오면서 이 기법을 제대로 구사하는 사람이 급격히 사라졌다. 이를 되찾고 싶었다. 현재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나만이 다양한 상감기법을 구현할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 이를 널리 전수하기 위해 체계적으로 정리 중이다.

사비를 털어 민속 문화 전승을 위한 공간인 ‘민학전가’를 운영하고 있는데
배 민학전가는 ‘백성이 배우고 전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이름 그대로 많은 이들이 와서 민속 문화와 조상들의 정신을 배울 수 있다. 이곳에는 나의 작품과 그동안 틈틈이 모아온 수많은 민속자료가 보관돼 있다. 삶의 애환과 손때가 배어나는 서민의 토속문화유산을 발굴하고 보존하여 후세에 전하고 싶어 직접 만들게 됐다. 부족한 공간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통해 옛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갖기 바란다.

또 어떤 활동을 이어나갈지 기대가 된다
배 우선 보다 많은 사람들과 공간을 나누기에는 규모면에서 한계를 느껴 민속 보존관을 확대하고 싶다. 이곳에서 일본을 비롯한 외국인보다 우리 민족이 우리 것을 더욱 소중히 여기게 되길 바란다. 또한 탈 제작이나 충무공 백의종군 비를 세우기 위해 준비 중인데, 이렇게 제작되는 것들이 후세에게 우리 민속 문화를 제대로 전하는 도구로 사용되길 바란다.

대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배 우선 뜻을 굽히지 말고 올바른 정신을 후세에 꼭 전해주길 바란다. 내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옳다고 믿고 끝까지 추진했기 때문이다. 또한 결과만을 중시하지도 말길 바란다. 같이 작품 활동을 하는 사람 중 완성된 작품 자체만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과정 하나하나가 문화이자 후세에게 전할 단계이기 때문이다. 이것처럼 결과보다 과정을 중요시하며 제대로 된 성장을 이루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