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 레이와 그의 친구들의 사진展』 스케치

기자명 고두리 기자 (doori0914@skku.edu)

유난히 무더웠던 7월의 어느 날, 습한 공기와 마주하며 덕수궁 옆 돌담길을 지나 서울시립미술관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열리고 있는 『만 레이와 그의 친구들의 사진展』에서는 만 레이와 그의 예술적 위업을 이어받은 국내외 현대 예술가들 50여 명의 다양한 사진이 전시되고 있었다.

사진전을 찾은 이유는 사진을 정말 제대로 감상하고 싶어서였다. 사진은 그림과 달리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존재했던 것’을 카메라에 담는 것이기 때문에 자칫 그림감상보다 쉬울 거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나날이 화려해지고 있는 사진기술로 인해 오늘날 사진은 존재하지 않는 것마저 표현할 수 있게 됐다. 전문가가 아닌 사람으로서 사진의 본질을 이해하기란 더욱이 어려워졌다. 변명을 해보자면 이런 이유로 사진을 감상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게 됐고, 사진 보는 법이 점점 서툴러졌다.

만약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다면 사진 읽기는 좀 더 나아질 수 있지 않을까. 롤랑 바르트는 사진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스투디움과 푼크툼’을 제시했다. 푼크툼은 사진을 보는 순간 보는 이에게 다가오는 어떤 강렬한 자극으로 이는 외부의 도움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따라서 남는 건 스투디움인데, 이는 사회적으로 공유된 의미를 읽는 것이므로 내가 몰랐던 부분을 남에게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이러한 도움을 쉽게 받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사진전이었다. 그곳에는 문화 자원봉사자, 도슨트(docent)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사진전을 보러 온 관객에게 사진에 내제된 작가의 의도 또는 사진의 정치적ㆍ사회적 의미 등을 설명함으로써 이해를 돕는다. 바로 도슨트 안내 시간에 맞춰 사진전을 방문한 이유가 더욱 풍부한 스투디움을 이해하기 위함이라. 그렇다면 수백 개의 사진 속에서 나에게 ‘찌르는 듯한’ 푼크툼을 안겨줄 작품은 과연 어떤 것일까.

만 레이는 과학적인 기록의 도구로 인식되던 사진의 고정관념을 깨트리고, 예술과는 대척됐던 사진 분야를 독립된 예술 매체로 격상시킨다. 그는 사진작가 이전에 화가로도 예술 활동의 반경을 넓혀왔다. 그래서 그런지 만 레이의 사진을 보고 있자면 회화의 느낌이 물씬 풍긴다. ‘그림을 그리듯이 사진을 찍겠다’라는 그의 사진 철학이 표현된 것일까. 그의 대표작 『앵그르의 바이올린』에 찍힌 만 레이의 여인인 키키의 뒷모습은 바이올린을 연상시킨다. 현대작가 권순평의 『나의 비밀의 정원 시리즈』도 나의 걸음을 잠시 멈추게 했다. 뿌리까지 뽑힌 나무가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진 속 나무는 사실 실제 큰 나무가 아니라 분재였다. 삶과 죽음이 빠르게 순환되는 분재를 통해 자연의 선순환을 표현하자는 것이 이 사진의 스투디움이다.

사진전을 돌아본 후 나는 여전히 ‘나의 푼크툼’ 고민에 빠지게 된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푼크툼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롤랑 바르트가 그러지 않았던가. 푼크툼은 말로 표현될 수 없으며, 말로 표현하는 순간 푼크툼이 아닌 스투디움이라고. 그러니 나의 푼크툼에 대해 묻지 말길. 이건 나만이 알 수 있는 비밀이니까.

유민아 기자 mayu1989@skkuw.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