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조은혜 편집장 (amy0636@skkuw.com)

#1. “넌 반에서 몇 등이니?” - “저 3등이요”
#2. “넌 대학 어디갔니?” - “저 성균관대학교요”
#3. “학점 몇 점이니?” - “...... 학사경고받았어요”.

짧고도 익숙한 위의 대화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자, 1분 정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겠다. 이제 답을 공개하겠다. 바로, ‘결과’를 물어보는 질문과 ‘결과’를 답하는 대답이었다는 점이다.

실망이라고? 필자야말로 실망스럽다. 그대가 잠시도 답을 생각해보지 않고 그대로 이 글을 읽어내려가는 모습이 그대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물론 1분 이상 생각한 사람이 필자의 답을 비난한다면 문제를 앞으로 더 잘 만들도록 노력하겠다. 메일을 보내주기 바란다.)
본론으로 들어가자. 저 짧은 대화 세 편은 순수하면서도 평온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결과’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극악무도한 성격을 지녔다.
반에서 몇 등 한 것이 왜 그리 중요할까.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을 배웠는가 일 수도 있다. 혹은 왜 배웠는지 일 수도 있다. 우리는 공부하는 상황, 과정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물어볼 수는 없을까.
학벌도 마찬가지다. 한국에서 학벌은 한 사람을 판단하는 엄청 귀중하고도 중요한 잣대라는 명성은 여전하다. 그럼에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대학교를 물어본다. 고3 졸업만해도 어떤 대학 갔는지를 궁금해한다. 여기에 어떻게 공부했는지 얼마나 힘들었는지에 대한 물음은 대부분 배제된다. 저 멀고도 높이 있는 대학들을 간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똑같이 노력했지만 결과가 다른 많은 대학교 학생들은 자신의 대학교에 대해 말하기가 절대 쉽지 않다.
학점은 따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엄청 열심히 학기를 보내도 이수한 학점수의 차이에 따라서 들은 과목의 난이도, 함께 수업을 들은 학생, 교수님 등에 따라 학점은 많이 달라진다. 학점만으로 한 학기를 전부 평가하기에는 고려해야 하는 것이 너무나 다양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궁금한 것은 결국 또 한 가지다. ‘그래서 학점이 얼마라는 거야?’

여기 결과를 궁금해 하는 우리의 요구 때문에 요즘 힘든 또 한 사람이 있다. 바로 오은선 산악대장이다.
오 산악대장이 산을 하나 하나 오를 때마다 우리는 어서 14좌를 완등하길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가 어떤 목적으로 어떠한 철학을 가지고 그 힘든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지에 관한 질문은 결과보다 앞서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이 말이다. 14좌 완등을 해내자마자 나라는 온통 들썩이며 세계 최초라는 자부심을 있는 대로 알렸다.

하지만 온갖 논란에 휩싸인 지금에 와서는 최고라고 침이 마르도록 칭찬해대던 우리가 잘못된 결과에 분개하며 비난하고 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14좌 완등이란 결과 뿐이였는데, 그것이 아닐 수 있다니 비난을 안하고 싶어도 안할 수 없을 것이다.
실제 오 산악대장이 완등을 했는지 아닌지는 확신할 수 없다. 만약 정말 완등을 한 것이 아니라면 그의 도덕성을 의심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 논란의 책임 중 절반은 우리의 몫이다.  그동안 우리는 결과를 빠르게 내놓을 것을 개인에게 재촉해왔고, 세계 1위라는 명예를 행여나 타국에게 빼앗길까 온갖 부담을 일개 개인에게 주었다. 마치 다니고 있는 대학교 이름에 따라 어떤 직업을 가진지에 따라 사람을 판단하듯 오 산악대장이 14좌 완등을 해야만 진정한 산악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정말 안타깝다. 만약 우리가 그의 도전에 박수를 쳐주고, 과정에 보다 관심을 가졌다면 그리고 완등을 부가적인 것으로 생각했다면 지금쯤 얘기는 달라지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