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민우(법학04)

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나는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했다. 초등학생들이 학교생활부의 취미 란에 흔히 자동적으로 ‘독서’라고 적어 넣는 것과 같은 그런 식의 말이 아니다. 책에 미쳤다거나, 밥 먹듯이, 심할 경우 숨 쉬듯이 읽었다고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책을 좋아하고 또 많이 읽어왔다. 집에 있는 책들은 암기할 정도로 읽었고, 초등학교 3학년 때 친구와 친구 부모님과 함께 도서관이란 곳을 처음 가서 그 경이로운, 또 다른 세계를 알게 되고부터는 규칙적으로 빠짐없이 가서, 항상 대출 허용 권수를 꽉 채워서 빌려다 읽었다. 그 넓은 공간이 책으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몸이 굳어져 버릴 지경이었고, 감당할 수 없는 행복이었다. 그곳에 있는 모든 책을 다 빌려 보리라는 생각에, 내가 읽기에는 터무니없이 어려운 책이라 해도 상관 않고 무조건 가장 앞의 책장의 맨 위에 꽂인 책부터 차례대로 빌린 일도 있다. 다른 엄마들은 자식들에게 제발 책 좀 읽으라고 빌다시피 한다는데, 나의 엄마는 책은 공부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내가 책 읽는 것을 좋게 보지 않았다. 그래서 마음 같아서는 매일 가고 싶었지만, 대출 기간이 온전히 찬 후에야 다시 도서관에 가서 새 책을 빌릴 수 있었기 때문에 빌린 책들 역시 한 번만 읽고 반납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토요일은 아예 아침을 먹고 집을 나와 하루 종일 도서관과 서점에 죽 치고 앉아 책을 읽다가 문 닫을 때 나와 집에 들어갔다. 이런 생활은 중학생 때도 그대로 유지되었고, 고등학생 시절에도 클럽 활동에서 도서부에 가입하여 수업 시간 외에는 언제나 도서관 사서 자리에 앉아 도서관을 관리하고, 자습 시간이나 심지어 여유가 있는 수업 시간에도 공부보다는 책을 읽는 날이 많았다. 교내 대출 순위의 상위권을 도맡아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대학에 와서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내가 가장 감탄한 것은 중앙 도서관이었다. 이전까지 이용해온 도서관들보다 더 많은 새 책들을 보유하고 있고, 정리도 잘 되어 있으며, 시설도 깨끗하고 훌륭했다. 처음 발을 들인 순간, 딱 10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이 도서관에 있는 책도 다 내 머리 속에 담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고, 이번에는 그저 꿈이 아니라 정말, 대학생이라는 신분을 유지하고 있을 동안에 일부러 책만을 위한 시간을 따로 내어 최대한, 내가 가장 읽고 싶은 한 분야의 책들이라도 온전히 읽고 졸업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 희망은 결국 이루어져서, 그런 목적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학교의 최대 휴학 가능 기간인 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휴학을 하고 내가 원하던 대로 원 없이 읽을 수 있었다. 이 글을 쓰며 다시 돌아보니 몸이 떨릴 정도로 믿기 힘든 일이다. 4년 만에 복학하여 졸업을 일 년 앞두고 4학년 1학기 생활을 마친 지금까지도, 책은 나의 가장 중요한 동반자이자 친구 중의 하나이다. 어딜 가든 다른 건 없이 빈손이어도, 책 한 권은 반드시 손에 들고 다니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컴퓨터 옆에 휴대전화, 지갑과 함께 놓여 있는 책을 곁눈질해 보니, 내가 한 말이지만 실감이 나고, 웃음이 지어진다.
내가 처음 왜 책에 빠지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이렇게 책을 좋아하는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아버지가 안 계셔서 아빠처럼 따랐던 형이 한 때 즐겨 읽던 추리소설의 영향이 클 것이다. 『뒤마 클럽』의 한 구절처럼 ‘이 세상에 인쇄물의 형태로 되어 있는 것은 모두 닥치는 대로 읽어 내리는’ 유형의 사람들 중 한 명이라 자부하는 사람으로서, 가리지 않고 읽어 왔지만 특히 애정을 가진 장르가 추리소설이고,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아가사 크리스티이기도 하다. 지식이 많아지는 것, 생각하는 것, 한 차원 높은 것을 탐구하는 것,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것 등등을 즐기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책이 내 인생에 왜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한 마디로 답하기는 쉽지가 않다.
하여간, 책을 읽으면서 다양한 간접경험을 했고, 사고의 깊이와 넓이가 성장했으며 인격도 상승하고, 나만의 가치관과 기준도 정립해 왔다. 단순히 재미난 이야깃거리를 즐기는 것에서부터 주인공과 등장인물들의 심리와 상태를 느끼고 분석하며, 배경과 상황에 대한 이해도 늘었다. 책과 소통하고 교감을 나누며, 한 권의 책을 끝내면, 책을 읽은 독자가 아니라, 책 속에 등장하는 한 인물로 동화되고, 새로운 책을 읽으면 또 새로운 인물로, 또 새로운 책의 새로운 인물로, 나 자신이라는 캐릭터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변신했다. 예전에 쓰인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의 한 줄 한 줄이 나를 하나씩 하나씩 만들어가는 것처럼 의도적으로 읽었다. 눈과 머리로만 읽은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 읽은 것이다. 물론 부작용도 있었다. 판단력이 어릴 때에는 무턱대고 마구잡이로 받아들이고 흡수해서 탈선의 선을 넘어 범죄에 이를 정도까지 나아간 적도 있지만, 당시에는 내가 분해되는 것처럼 힘들고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일들도 지금 생각해보면 다 하나의 과정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책을 읽으면서, 특히 대학에 와서 독서를 하며 커지는 유일한 의문이자 걱정은, 정말 독서가 유익한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독서가, ‘좋은 것’인가?, ‘필요한 것’인가?, ‘도움이 되는 것’인가? 의 물음이 아니라, ‘유익한 것’인가? 라는 물음. 여기에는 위의 세 가지를 포함해 몇 가지 질문이 담겨 있겠지만, 직접적인 것으로는, 실제적으로 나에게 효용이 있는가 하는 것을 들 수 있겠다. 쉽게 말해서 요즘 유행하는 용어인 ‘스펙 쌓기’에 도움이 되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물질보다는 정신이 우월하다는 말이나, 인간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는 고전의 글귀에서부터, 다수에 휩쓸리지 말고 너만의 세계를 만들라는 등의 자기 계발 서적들의 외침은 무수히 들어왔지만, 난 별로 그런 것들에 귀를 열지 않고 살아왔다. 꼭 그런 말들을 듣고 실천해서가 아니라, 그런 말을 모를 때도 나 스스로 그렇게 실행해왔다. 하지만 몸이 자라면서 머리도 성장하고, 아는 것이 늘어난 만큼 겸손해지기도 했기에, 주변에 떠도는 풍문들도 한 번쯤은 생각해 볼 여유가 생겼다. 더구나 대학생의 신분으로서 진로와 미래를 계획하고 개척할 준비를 하는 시기에 특정한 목적 없이 책을 읽는다는 건 다른 귀중한 것들의 낭비가 될 수 있다는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이미 내가 어느 정도 내린 결론을 확인하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학교 교수님들을 비롯해 몇몇 분께 의논하고 상담도 받아 보았다. 내가 예상한 답변도 많이 나왔고, 그것들도 명심했지만, “유형적인 것으로 남진 않더라도 그게 다 너의 재산이고 능력이 된다”고 말씀하신 한 교수님의 말씀이 가장 새겨졌고, 한 편으로 위안도 되었다.
전공 공부가 내가 바라던 방향과 너무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전공은 해야 하는 정도만 공부하고, 교양 과목을 되도록 문학 관련 강의로 채워서 온 힘을 쏟았던 지난 학기들이 떠오른다. 막연하기도 한 불안감 때문에 그마저도 내가 흡족할 만큼 해내지는 못한 아쉬움이 있지만, 그것 역시 하나의 배움이라 생각한다. 대학생이라는 신분은, 20대라는 나이는, 젊음이라는 것은, 무언가를 이룰 나이가 아니라, 최대한 많은 것을 경험해 볼 나이라는 말대로 살아보고 싶다. 취업 준비니, 자격증 획득이니, 아르바이트니, 대학 졸업반으로서 손을 대자면 이것저것 건드릴 게 많지만, 나는 그러니만큼 읽고 배우고, 더 나아가 내가 가진 것을 내가 바라는 곳에 활용하는 데에 끝까지 몰두해 볼 생각이다. 한 권의 책을 읽더라도 전공 서적이니까, 과제를 해야 해서, 학점을 잘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수한 바람에서. 졸업 후에 펼쳐질 내 미래가 지금은 백지이지만, 책을 지금보다 많이 읽게 되건 적게 읽게 되건 책에 대한 애정만큼은 갈수록 커져갈 것이라 예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