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승(교육06)

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얼마 전 우연히 어린 시절(이라고 해봤자 5년전쯤) 글로 치열하게 토론했던 한 인터넷 홈페이지 게시판을 다시 찾게 됐다. ‘치열하게 토론했던’이라고 하기에는 지금 보기에 그저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모여서 ‘어리고 유치한 싸움을 했던’으로 표현하는 게 나을, 앞뒤 안 맞는 감정적인 글들이 난무했다. 그렇지만 그 속에 무언가 우리가 ‘토론이란 걸 하고 있다’라는 자못 진지한 자세가 엿보여 귀여웠단 생각이 들어 ‘치열하게 토론했던’이라고 해둔다.
그 동안 교육학과에 입학한 것에 대해 그 전에 딱히 ‘진지하다’라고 할 만한 고민은 없었다고 생각해왔는데, 5년 전의 나는 참 이상적 교육관을 가지고 한 게시판에서 열렬히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적어도 그 당시에 내가 생각을 좀 하긴 하면서 살았구나 하는 뿌듯함과, 불과 5년밖에 되지 않은 나의 모습을 왜 지금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을까 하는 어처구니없는 마음이 동시에 섞여 소름이 돋은 것 같다.
게시판의 글들은 참 보잘 것 없는 내용들이었다. ‘교원평가제나 3%엘리트교육, 성형수술’같은, 논술학원에서 ‘쪽집게 강사’ 운운하고 으스대며 던져놓았던 그 시답잖은 주제들에 대해 저마다 ‘논리’라는 것을 갖추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듯 보였다. 그렇지만 어리면 어릴수록 이상적일 수밖에 없으며 극단적일 수밖에 없듯이 (깨끗하고 순수한 어린아이의 생각이 반드시 ‘좋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을까. 그건 그냥 ‘어린아이’의 생각일 뿐, ‘변화의 힘’을 가지지 못하기에 우리는 그저 ‘깨끗하고 순수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보기 좋게 포장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극히 원론적인 얘기들만 하고 있었다. 가령, ‘3% 엘리트교육’ 문제를 놓고 엘리트들을 교육시키는 것이 국가경쟁력을 높이겠느냐, 전체를 위한 교육을 강화하여 평균적인 엘리트 수를 늘리는 것이 좋겠느냐’와 같은 이분법적인 사고의 틀에 갇혀 서로를 이겨보겠다고 노력하고 있었다.
  하나의 사건에도 찬성과 반대 두 가지 논리만 존재하지 않고 찬성에도 다양한 찬성이 있을 수 있으며 반대에도 다양한 반대가 있을 수 있다는, 모든 일이 참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긍정적으로 보이는 일들에도 수없이 많은 부정적인 일들이 동시에 맞물려 일어나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지난 5년간 배워온 게 아닌가 싶다. 어쩌면 우리들이 ‘어른들은 보수적이야.’, ‘그 시대 분들은 그렇게 생각하시지.’라고 말하는 것들은, ‘그 시대 분들’이 내가 5년간 배워온 것들을 수십년동안 더 배우다보니 ‘변화’라는 것이 반드시 항상 옳은 것은 아니며 만만치 않은 일이란 걸 몸으로 체득했기 때문일 수 있다. 항상 옳은 것은 아님에도, 만만치 않은 일임에도, 그래도 필요한 것이 ‘변화’겠지만, 아이처럼 이상적이며 극단적인 것은 위험하다. 현실을 정확히 바라보고 이해해서(혹은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 안에서 변화의 ‘연결고리’를 찾아내 이어가는 것이 현명하다. 현실을 완전히 ‘부정’하고 얻을 수 있는 변화는 없다. 종종 이런 말을 듣기도 한다. ‘한겨레신문이야 젊은 애들이 읽는 거지, 너무 공격적이라 별 도움이 안 돼. 조중동 읽으면서 보수적이겠거니 생각하면서 읽으면 되지’ 하는. 종종 이런 말도 듣는다. ‘조중동을 읽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어. 그렇게 세뇌당하고 싶은가. 생각을 좀 하고 살아야 하지 않겠어?’ 하는. 참 어려운 세상이다. 그렇지만 분명한 건 누구든, 어떤 사회에서든, ‘극단적’인 것은 화를 부르며 혹 그것이 제대로 된 변화를 꿈꾼다 하더라도 ‘치기어린 반항’ 정도로 치부되고 마는 불리함을 가진다.
영리해져야 자기의 주장을 펼 수 있는 때다. 이상적인 걸 ‘어리다’라고 말하는 그들이나, ‘어리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극단적으로 행동한 그들이나 결국은 똑같은 거다. 우리, 좀 영리해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