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조은혜 편집장 (amy0636@skkuw.com)

텔레비전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이별은 언제나 ‘쿨(Cool)’하다. 필자가 어렸을 적에 대학생 언니, 오빠들의 이별은 언제나 쿨하며, 쿨하지 않으며 안되는 줄로만 알았다. 어린 시절부터 주변에 존재하고 있던 ‘쿨’한 정신은 대학생이 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아니, 오히려 더욱 큰 흐름이 된 것만 같다. 소주 광고를 비롯한 드라마, 영화 등 주변의 다양한 매체에서 이 쿨한 자세를 잊지 않는 것을 보니 말이다. 이곳저곳에서 ‘쿨’하게 살아야 한다고 하면 나 역시 여기서 빠질 수 없다. ‘쿨’하게 살아볼까 한다.

이왕 ‘쿨’하게 살기로 한 마당에 ‘쿨’의 정체를 좀 더 들여다보자. 첫 번째 경우다. 누군가를 나를 매우 싫어하는 것만 같다. 나를 향한 미움의 시선 그리고 나쁜 말들이 들려온다. ‘쿨’하게 넘어간다. 나에 관한 그 사람의 오해 때문에 내가 마음 졸일 일은 없다. 그저 ‘쿨’하게 넘기면 그만이다. 그 사람이 나를 다시 호의적으로 생각하게 된다면? 그 때 역시 ‘쿨’하게 받아주면 된다. 편하다.

두 번째 경우다. 요즘은 취업을 능가할 만한 어떤 관심 항목이 있을 수 없다. 오로지 취업 뿐이다. 학교에서 다음 10년을 위한 어떤 계획을 세우든지 내가 졸업한 후다. 관심을 가질 여유도 없고 솔직히 흥미롭지도 않다. ‘쿨’하게 지나친다.

‘쿨’하게 한 번 살아보겠다고 ‘쿨’함을 살펴보니 이것 참 오묘하다. 대체 어디까지가 ‘쿨’한 것이고 어디까지가 무관심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두 번째 경우까지 ‘쿨’함이라고 치부한다면 그런 ‘쿨’함은 당장 그만 두는 것이 좋겠다. 자신이 속한 곳이자 자신의 정체정이 될뿐더러 일부일 수 밖에 없는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이다. 자신의 일이 결정되기도 하며, 앞으로 자신의 모습이 될 수 있는 곳에 대한 무관심을 ‘쿨’함이라는 이유로 미화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얼마나 모순된 일인가. 아주 작은 차이일지라고 ‘쿨’함이 조금만 어긋나면 자신에 대한 무관심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안타까운 점은 실제 그대들 중에 그대가 속한 사회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무관심을 ‘쿨’함이란 용어아래 정당화하고 세련된 것으로 보이게 한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다면 대체 왜 우리가 ‘쿨’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36.5°로 본래 뜨거운 우리가 ‘쿨’에 빠져 왜 이런 모순된 상황에 빠져 있어야 할까. 여기저기서 외쳐대는 ‘쿨’에 휩쓸려 무엇인지도 모른 채 ‘쿨’해지진 말자. 그대가 생각하는 ‘쿨’의 정체가 어떤 것인지 먼저 따져보아야 할 시기가 오래전에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