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자 출신 영화배우 강방식 씨

기자명 양명지 기자 (ymj1657@skkuw.com)

소년은 전라도의 땅끝마을 해남에서 태어났다. 꽁보리밥뿐인 도시락이 창피해 뚜껑을 거의 덮은 채 밥을 먹을 만큼 가난했다. 고3 시절, 학원에서 용접 기술을 배워 컨테이너 회사에 들어갔다. 그렇게 노동자로서의 삶을 이어가던 그가 함께 일하던 선배들을 따라 노동 운동을 하기 시작했고 우연한 계기에 노동자 역할로 영화까지 찍게 됐다. 그는 바로 노동자 출신 영화배우 강방식 씨. 그를 만나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다.

■ 노동자 출신 영화배우, 또한 노동자 역할 전문 배우. 이력이 특이하다. 영화에 입문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정말 우연한 계기였다. 함께 노동 운동을 했던 선배한테 갑자기 전화가 왔다. 영화를 해보지 않겠느냐고. 그때는 영화에 관심도 없었을 뿐더러 나와는 동떨어진 세계라고 생각해 농담 삼아 ‘주인공 아니면 안 한다’고 했다. 그런데 진짜 주인공이 된 거다. 그게 첫 영화 <00 씨의 하루>다. 첫 영화를 찍은 후에도 여전히 영화는 나와 인연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첫 영화를 함께 했던 연출자가 날 유심히 보고 같이 일하자 제안했다. 그래서 찍게 된 영화가 박미희 감독의 <불온한 젊은피>다. 어쩌다 보니 영화를 두 편이나 찍게 됐다. 그렇게 2년 동안 약 14편의 영화를 찍었다.
■ 단편 영화계에서는 노동자의 삶을 잘 재현해 내는 배우라 알려져 있는데 연기할 때 특별히 중점을 두는 부분이 있나
고마운 평가다. 나는 카메라 앞에 서면 행복하다. 이렇게 느끼는 것이 생생한 연기의 원동력이 아닐까 싶다. 처음에는 연기를 배운 적도 없고 경험도 없었기 때문에 촬영장의 수많은 스텝이 나한테만 주목하는 것이 떨리고 부끄러웠다. 그렇게 완성된 영화를 보면 스스로도 연기를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 힘들었다. 그래서 어떤 부분에 특별히 중점을 두고 연기를 한다기보다는 그저 내가 맡은 역할에 몰입하려 노력한다.
■ 짧은 기간 동안 다작했다. 가장 애착이 가는 영화는
아무래도 첫 영화 <00 씨의 하루>가 가장 애착이 간다. 독립 영화로서는 드물게 DVD가 2천 장 이상 팔렸다. 두 번째 작품 <불온한 젊은피>도 기억에 남는다. 대종상영화제, 미장센 단편영화제 등 여러 영화제에서 상을 받아 여러모로 화제가 되기도 했고 노동자의 삶을 가장 일상적으로 다뤘다는 점에서도 인상 깊다.
■ 노동자로서의 삶을 살던 시절, 노동 운동도 열심히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노동 운동에 투신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고3 때 용접 기술을 배워 친구 둘과 컨테이너 공장에 들어갔다. 12시간씩 주야 맞교대를 해가며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이 간 친구 중 한 명이 크레인에 발이 껴 크게 다쳤다. 멀리 계신 부모님이 걱정하실까 알리지 않았더니 일과 간호를 병행하게 됐다. 그때는 힘들어도 어린 나이에 고생을 해서 그런가 보다고만 느낄 뿐 내가 겪은 사회 현실이 부당하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친구가 다쳤을 때 회사에서 치료해 준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여겼으니 세상을 한참 몰랐던 거다. 어느 날은 초겨울 달이 너무 밝았는데 공장 화장실 거울에 비친 나를 보고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뚝 흘렀다. 그길로 서울에 올라왔다. 그런데 일자리를 구하는 게 정말 어렵더라. 그렇게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만난 선배들한테서 사회과학에 대해 배웠다. 어릴 적부터 반골(反骨)적 사고관을 갖고 있긴 했지만, 사회과학 서적을 많이 접하면서 투쟁 의식이 생긴 것 같다.
■ 노동 운동한 경험을 바탕으로 노동 분쟁 해결에도 힘썼다고 들었다
군 제대 후 한국 제지에서 일하던 시절, 전에 알던 선배들과 함께 노동조합 파업을 벌였다. 결국 해고됐지만 이것이 노동 운동의 시작이었다. 그 후 안양지역 금속 노조 활동을 하다가 안양 노동 청년회를 설립했다. 결혼 후에는 노무 관련 일도 했는데, 그때 외국인 노동자들은 무료로 상담해줬다. 그 후 문득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거의 2년간 신림동 고시원에 들어가 공부를 했다. 나와서는 강방식의 노동법 교실 인터넷 강의를 제작했다. 사실 노무 관련 일에 대한 염증도 조금은 있었다. 산업 재해 처리 문제 같은 경우 어떻게 처리되느냐에 따라 한 가족의 생존이 결정되는데, 이런 부담이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그때 파주 통일 동산 근처에서 운영한 게 곤충농장이다. 곤충은 나에게 적어도 스트레스는 주지 않겠다고 생각했다(웃음). 물론 곤충농장도 3~4년 정도 하다 그만두긴 했다. 
■ 노동 운동도 그렇고 독립 영화도 그렇고 모두 수입이 보장되는 일자리가 아니지 않나. 가족들의 지원이 필요 했을 텐데
아내도 여성 민우회 활동을 했었다. 롯데 본사에 다니던 시절에는 승진할 때 여자만 차별한다고 투쟁해서 승진은 물론이고 언론에 크게 실리기도 했다. 또 같이 청년회 활동을 했기 때문에 내 일을 많이 이해해 주는 편이다. 내가 하는 일을 잘 알고 또 그만큼 잘 이해해주는 아내가 있기에 운동도 연기도 가능한 것 같다.
■ 인생 대부분을 노동이란 단어와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연장선상에서 우리나라 노동법의 문제점은 무엇이라 보나
옛날에는 사업주가 당연히 노동법을 잘 지키려고 했다. 그런데 IMF를 거치면서 임금체불도 너무나 많아졌고 그러다 보니 처벌도 느슨해졌다. 전에는 우리나라의 사회복지제도 중 산재법이 제일 낫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산재법이 노동자에게 불리해졌다. 가령 예전에는 구조조정이 사회적으로 큰 문제였는데 요즘은 구조조정을 당연시하는 분위기다. 점점 노동자들이 설 자리가 없어지는 것이다.
■ 앞으로의 꿈은 무엇인가
궁극적인 목표를 굳이 하나 꼽자면 ‘영혼이 맑은’ 연기자가 되는 것이다. 늦어도 1년 안에 연극이나 영화를 다시 하기 위해 그 기반을 마련 중이다. 요즘도 영화 출연 제의가 오지만 가족도 있고 내 나이도 적지 않다 보니 고사하고 있다. 당장 연기를 할 수 없는 것은 아쉽지만 생계를 위해 연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지금은 연극을 하는 것이 나의 가장 큰 목표다. 깐족거리는 감초 역할을 해보고 싶다. 일단은 다양한 역할을 통해 연기자로서의 기반을 탄탄히 쌓을 생각이다. 그동안 이것저것 다양한 일을 한 것을 보면, 나는 참 많은 걸 하고 싶은 사람인 것 같다.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언제든 그게 무엇이든 꼭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