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민아 기자 (mayu1989@skkuw.com)

단 세 줄로 구성된 그 짧은 시에 대해 그렇게도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건 그 세 줄이 인터뷰를 준비하고 진행하고 정리하는 내내 끊임없이 나를 각인시켰기 때문이었을진대, 포털 사이트에 ‘안도현 시 추천’이라고 검색하면 대다수의 사이트가 그 세 줄을 지겹도록 보여준, 그 비결이 뭘까?
중고등학교 때 내가 내 아량껏 알던 그는 시 <우리가 눈발이라면>처럼 참 교과서에 실릴만한, 따뜻하고 감동적인, 어느 정도 교훈이 깃든 작품을 쓰는 ‘유명한’ 시인이었다. 대학생 들어서 뉴스로 이따금 접한 그는 사회 활동을 활발히 하는 신념 있는 문학인으로,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사실 인터뷰를 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누구나 좋아하는 그 시에서 ‘너’에게 훈계하는 듯한 매서움이 싫었다(뭐, 그건 마치 뜨겁지 않아서 찔리는 자가 도리어 성내는 이치였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다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그 시의 ‘너’가 시인 자신, 곧 ‘나’를 의미하는, 뜨겁게 살자는 다짐의 차원에서 지어졌음을 알게 됐다.
그걸 안 내가 그 시를 곱씹어 볼수록, 그 시가 나에게 주는 느낌은 기존과는 점점 각을 달리하였다. ‘너’에게 주변에 뜨겁게 헌신할 것을 다그치는 것이 단순한 위선이 아니었구나. 처절한 삶의 경험과 자기 성찰을 통해 어렵게, 정말로 어렵게 만들어진 것이었구나, 하는.
동시에 흔히 제목을 ‘연탄재’로 오해받곤 하는 그 시가 그렇게 많은 사람이 좋아하고 또 많은 곳에서 회자되는 이유를 그제야 알 것도 같았다. 그 시를 읽는 모든 이가 ‘너’를 ‘나’로, 깊숙이 감정이입해서 받아들인다는 것. 그것은 작가의 처절한 경험에서 내뿜어지는 깊고도 광범위한 공감대라는 것. 무엇보다 단 세 줄의 시에서 ‘뜨거움’이라는 단어가 지니는 강력한 진정성.
지금의 나는 그가 당신이 바라마지않아 왔던 대로 참 ‘뜨겁게’ 살아온 시인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뜨거움’. 그것은 ‘열정’과는 다른 말인 것 같고, 또 ‘따뜻함’과도 다른 말인 것도 같은데, 연탄재와 같은 뜨거움을 난 아직 겪어보지 못한 것 같다. 좀 더 뜨겁게, 고민하며 살다 보면 언젠가 알 수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