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르포 - 창신동 의류봉제단지를 가다

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이거 다 옷감인데, 다 시간에 맞춰 배달해야 하는 거에요. 바빠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가는 배달부. 원단을 실은 오토바이들이 바삐 골목을 누빈다. 하늘을 뒤덮을 듯 가로지르는 시커먼 전깃줄을 이곳 사람들은 핏줄이라고 부른다. 어둑하고 작달막한 상가건물의 창문 틈으로는 희미한 불빛과 뜨거운 수증기가 새어나온다. 상호도 안 보이는 소규모 의류단지 4천여 개가 밀집된 이곳은 창신동 의류봉제단지이다. 이곳에서 제조된 옷은 동대문 일대의 도매 상가에 납품된다.

‘전태일’이라는 틀 짓기
전태일 분신 40주년이 된 오늘날, 전태일의 이미지는 하나의 틀로서 봉제 산업을 포장하고 있었다. 의류봉제 산업은 매년 이맘때면 전태일을 기념해 언론에서 소나기처럼 조명되곤 하지만 많은 언론이 ‘전태일’ 혹은 ‘노동 조건’과 같은 키워드를 거치지 않고는 봉제 산업의 정확한 모습을 보려 하지 않는다.
창신동 의류봉제센터 차경남 본부장은 “현실의 봉제 산업은 전태일이라는 이미지와 하등의 상관이 없다”며 “직업에 대한 이미지 씌우기가 봉제 산업을 암흑지대로 만든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방송, 드라마에 나오는 디자이너들은 얼마나 멋있나. 그런데 옷 만드는 기술자는 마치 명령을 하면 물건 만드는 기계처럼 묘사한다. 힘든 장면만 계속 노출해 제조업을 3D로 몰아가는 거다” 아이러니하게도 전태일의 이미지가 이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 셈이다. “공무원들도 이런 이미지 때문에 디자인에는 엄청난 예산을 투입하면서 봉제 산업에는 제대로 된 지원도 없다” 숙녀복을 제작하는 H사에서 만난 한 사장도 “이것도 중요한 산업인데 젊은 사람들이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며 아쉬움을 표시했다.
물론 전태일 이후 의류봉제 산업의 근로조건 개선에 획기적인 분기점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SSMG’ 박성환 기획실장은 “노동사에서 전태일의 족적은 큰 의미를 갖는다”면서도 “봉제업이 패션업의 한 요소로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선 3D 이미지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재단사 등 근로하는 사람들의 처지는 아직도 먼지 날리는 좁은 사업장에서 하루 14시간 넘게 근무한다는 점에선 크게 다르지 않지만 40년 전에 비하면 격세지감이다. 우선 기술자들의 입지가 달라졌다. 현재 봉제 산업은 기술자가 모자라는 구조이기에 대부분 기술자가 객공제로 일한다. 업주가 일방적으로 요구조건을 강요하는 시대는 지난 것이다.

“우리 일은 사양산업이 아니다”
불쑥 찾아들어간 한 숙녀복 업체 사업장. 문을 열고 들어가자 다리미의 더운 김과 매캐한 먼지가 코를 감싼다. “임금이 10년 전하고 똑같아” 요즘 일하시기 어떻냐는 질문에 한 재단사가 바삐 옷감을 매만지며 짧게 내뱉는다. “절대 좋아지진 않지. 숙녀복 시장이 해마다 나빠지잖아” 봉제 산업은 미처 경쟁력을 갖출 기회도 갖지 못하고 개방돼 세계 시장에 내던져졌다. 해외 저가 의류가 수입되면서 가격경쟁력을 요구했다.
차 본부장은 봉제 산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의류 봉제 산업이 뒷받침이 돼줘야 패션산업도 유지되거든요. 그런데도 디자인은 멋있는데 봉제는 불쌍하고 열악하다? 이러다 보니 젊고 숙련된 인력이 들어오질 않아요” 한 건물 2층에 있는 숙녀복 제작업체 사장은 “우리 업체 같은 경우 일하는 사람들은 거의 40, 50대”라고 말했다. 요즘은 거의 15년 가까이 새로운 기술자들이 거의 양성되지 못하는 까닭에 30대 후반이면 재단사 중 젊은 축이라고 한다. 이곳의 많은 이들은 십수 년 전 세계적 의류시장이던 동대문시장이 저가 혹은 이미테이션 시장 이미지를 가지게 된 이유로 봉제가 사양 산업 취급을 당해 새로운 투자가 이루어지지 못한 점을 든다.
40년 전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라고 외쳤다면 지금 이곳 기술자들은 ‘우리의 산업을 무시하지 마라, 단순 노무직이 아닌 전문직으로 보라’고 외친다. 그러나 이 외침에도 일반인의 기억은 아직 70년대에 머물기에 창신동의 겨울은 춥기만 하다.

 사진│윤이삭 기자 hento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