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비(정외) 교수

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집으로 갈 때에나 학교로 올 때 보통 우리는 항상 다니는 길을 이용한다. 그런 길은 대개는 목적지로 가고 오는 가장 빠른 길이거나 혹은 예를 들어 지하철의 경우 앉을 자리가 잘 나는 안락한 길이다. 혼잡한 대중교통에 시달리는 것도 마땅치 않고 친구 만날 시간도 없을 때도 많은데 특별한 이유도 없이 항상 다니던 길을 놔두고 굳이 익숙하지도 않고 시간도 더 걸릴 다른 길로 돌아갈 이유가 딱히 없다. 그렇게 일 년, 또 일 년을 지내다 어느 날에 이르면 우리는 자신이 마치 쳇바퀴를 도는 다람쥐처럼 정해진 회로를 따라 매일 매일 움직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삶의 전체 영역이 그렇게 정해진 회로에 끼어져 돌아가는 것이 현대 사회에서 우리 앞에 놓인 운명이기도 하다.
물론 어떤 이들은 이러한 운명 전체를 거부하려고 한다. 그런 사람들은 우리가 이 운명에 순응하게 되는 순간 삶의 모든 창조성과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고사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흔히 그러한 운명을 강요하는 현대 문명 자체에 대한 염증을 드러내고 극단의 경우 현대 문명 자체를 거부하려고 한다.
그런데 내 생각에 이는 우리 대다수가 택할 수 있는 길도 택해야 하는 길도 아니다. 현대 문명에서 인간의 삶속으로 침투하는 루틴이 결코 반드시 나쁜 것도 아니다. 익숙함과 일상성이 주는 안락함은 사실 그 자체로는 유용한 것이요 고귀한 것이고, 미학적으로도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한 익숙함과 일상성은 하나의 문명이 시계안의 톱니바퀴처럼 정확히 작동하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다. 그런데 그러한 문명을 세우는 데에는 백만 개의 도미노를 세우는 따위의 것은 비교도 되지 않는 면밀한 계산이 필요하고 수십, 수백만의 잘 교육받는 사람들과 수십, 수백 년에 걸쳐 발달해온 기계장치들이 요구된다. 
현대인의 삶속에서 일상성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삶 전체를 덮어버리는 순간이다. 왜냐하면 적당한 정도의 낯섦은 인간의 창조성과 상상력을 자극하고 발휘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인간은 낯섦의 경험을 통해 익숙해져 있는 것들을 다시 보고 그 의미를 새롭게 깨닫는다. 돌아가는 길 위에서 종종 우리는 항상 다니는 길을 통해 얻는 편안함과 시간의 절약이라는 이익을 넘어서는 큰 의미들을 발견하곤 한다. 일상성에 매몰된 삶, 루틴에 묻힌 삶은 그러한 창조와 상상의 계기가 사라져버린 무미한 삶이 되기 십상이다.
나는 독일의 베를린에서 나의 삼십대의 거의 전부를 보냈다. 내가 이 유서 깊은 도시에서 두 번째로 얻은 기숙사는 아름다운 샤를로텐부르크 성과 그를 둘러싼 숲 옆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학교로 가려면 나는 그 숲을 언제나 살짝 지나쳐야 했는데 가끔은 유혹에 못 이겨 (특히 눈이라도 와서 백색의 장관이 연출되는 날이면) 발길을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오른쪽이 아니라 숲속으로 들어가는 왼쪽으로 돌리기도 했다. 가끔 그 때문에 다른 친구들로부터 ‘몇 살인데 아직 그런 감상을 찾아. 나이 덜 먹었군’하는 조롱 섞인 농담을 듣기도 했다. 그런 일은 베를린으로 가기 전 독일어 연수를 하기 위해 육 개월 정도 머물렀던 만하임에서도 종종 있었다. 내가 다니던 괴테 인스티투트는 라인강 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는데 그 주변에는 습지도 있고, 예쁜 집과 동네도 있고 숲도 있었다. 난 일부러 수업이 끝나고 전혀 다른 길을 찾아 빙 돌아 집으로 돌아오곤 했는데, 지금은 모 대학 법학교수로 중요한 보직을 맡아 일하고 있는 당시 한 친구는 그런 나를 가끔씩 ‘실용적이지 못하다’며 (물론 악의 없이) 놀리곤 했다. 그러나 지금 그 때를 돌이켜보면서 나는 그 때 좀 더 열심히 에둘러 다녔어야 했다고 후회하곤 한다. 돌아다니는 길에서 보았던 작지만 아름다운 풍경과 사람들, 가끔씩 올려보았던 (겨울의 독일 특유의 우중충한) 하늘, 이들을 보며 가졌던 작은 생각들과 감정들이 지금의 나에게, 그리고 나의 연구와 교육에 그만큼 소중하게 여겨지는 탓이다.
우리 모두는 때로 각자의 멋진 일탈을 찾아 그를 실천할 필요가 있다. 에둘러 갈 줄 아는 삶이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