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뮬라시옹

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영화 <매트릭스>에서 해커로 살아가는 주인공은 고객이 찾아오자 속이 비어 표지만 있는 책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에서 불법 소프트웨어를 찾아 건네준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으로 현실을 대체한 매트릭스 세계와 시뮬라시옹 이론은 서로 어떤 관계일까? 영화의 중요한 모티브가 된 시뮬라시옹에 대해 알아보자.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가 살았던 프랑스는 1960년대에 대량 소비 사회로 접어들었다. 그는 이 시기를 겪으면서 현대사회가 생산과 노동에 의해 발전되는 것이 아니라 소비에 의해 확장된다고 봤다. 이처럼 소비에 주목한 그는 시뮬라크르(Simulacre)와 시뮬라시옹(Simula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소비 행위가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해 고찰했다.

시뮬라크르는 한 사물의 원본에 담긴 기호나 이미지, 복제물 등을 뜻한다. 이를 동사화한 시뮬라시옹은 한 대상이 인위적인 대체물로 전환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이론을 현실에 적용해보면, 우리는 물건을 살 때 상품의 질뿐만 아니라 이미지 또한 중요하게 고려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상품이 가진 기호와 이미지는 시뮬라크르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기존의 값싼 생수를 두고 왜 사람들이 비싸더라도 기능성 생수를 선호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자. 몸에 좋은 영양소를 얻기 위함보다는 기능성 생수가 가진 스타일리시함과 세련미를 얻으려는 목적도 있다. 여기서 스타일리시함과 세련미는 시뮬라크르, 이 이미지가 상품에 덧입혀지는 과정은 시뮬라시옹에 해당한다.

보드리야르는 더 나아가 현대사회는 현실의 모사나 이미지인 시뮬라크르가 실재를 지배한다고 봤다. 수많은 복제물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실재와 모사를 구분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더 이상 원본을 구별할 수 없게된 사회에는 이미지가 원본만큼이나 각광받고 있다. 그 예로 1990년경에 스포츠용품 회사인 나이키는 농구 스타 마이클 조던의 이미지를 부각하고 그의 이름을 새긴 운동화를 출시했다. 미국에서는 청소년들이 조던처럼 농구를 잘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운동화를 산 친구를 살해하기도 했다. 이들은 단순한 상품에 불과한 운동화에 마이클 조던의 능력이 담겨 있다고 착각했다. 즉, 현실의 모사일 뿐인 이미지를 실재로 혼동한 것이다.

이처럼 시뮬라시옹을 통해 들여다본 현대사회는 앞서 말한 영화의 매트릭스 세계와 닮았다. 조작된 이미지에 노출돼 실재에 대한 감각을 서서히 상실해 가는 현대인은 매트릭스 세계와 같은 시뮬라크르에서 살고, 시뮬라크르를 먹고, 입는다. 경성대 배영달 교수는 책 『보드리야르와 시뮬라시옹』을 통해 보드리야르가 꿰뚫는 현대사회의 본질을 “근거 없는 기호가 실재를 대체하고 지배하는 우리 시대의 징후”라고 평가한다. 원본을 대변하는 하나의 이미지는 또 다른 이미지를 산출하고, 이렇게 생겨난 다른 이미지는 또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점점 더 실재보다 실제 같은 시뮬라크르가 생겨나는 상황이다. 쉽고 달콤한 기호와 이미지에 현혹된 당신, 본질은 무심히 스쳐 지나가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