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그림 <루시안 프로이트의 초상>

기자명 김영인 기자 (youngin@skkuw.com)

누군가를 만났을 때 우리는 으레 묻습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상대방은 자연스럽게 대답하겠죠, 자신의 이름을. 그리고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관계를 시작할 겁니다. 그 질서정연한 단계에서 하나라도 어긋나버리면 우리는 혼란에 빠질 테죠. 어쩌면 관계를 시작조차 하지 않으려 할지도 모릅니다.

영화의 중심에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이 있습니다. 그림 속 반라의 남자는 흰 셔츠만을 입고 오렌지색 매트리스 위에 비스듬히 누워 있습니다. 얼핏 멋진 콧수염을 지닌 것도 좋은 풍채를 가진 것도 같아 보이는 그럴싸한 신사는 그러나 누군지 알 수 없습니다. 눈과 코, 입이 있어야 할 얼굴 대신 짓이겨진 하나의 고깃덩어리만이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어진 화면에 남자 ‘폴’과 여자 ‘잔느’가 등장합니다. 분주히 시내를 오가는 그들은 몇 차례 스치기도 하지만 그뿐. 서로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다 만난 그들은 그림에서 본 듯한 오렌지색의 텅 빈 공간 속에서 서로의 신분도 모르는 채 격렬한 섹스를 나눕니다. 그리고 그것이 끝나자 이름도 주소도 공유하지 않은 그 둘은 원래부터 그랬듯 다시 서로가 서로를 모르는 사이로 돌아갑니다.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의 불안은 서서히 싹틉니다. 그들이 누구에게나 납득될 만한 인간관계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들은 우리를 비웃기라도 하듯 삶을 공유하기 시작합니다. 여전히 우리가 인간관계의 기본이라고 여기는 것들을 제외하고 말이죠. 호칭을 뭐라고 해야 할지, 자신의 이름이 궁금하지는 않은지. 여자의 질문에 남자는 이해할 수 없는 대답만을 늘어놓습니다. 난 이름이 없다고, 당신의 이름 따위는 궁금하지 않다고. 어떤 것도 그들 관계의 기본이 되지 못하죠.

폴은 유리 너머로 일그러진 모습을 보입니다. 그림 속 남성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죠. 그리고 말합니다. 진실은 되지만 이름은 안 된다고. 그의 뜻 모를 말에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것도 잠시 어쩌면 가장 옳을 수도 있는 그의 말을 이해하게 됩니다. 어느 곳에서도 진짜는 없기 때문이죠. 영화 속 사람들은 어느 하나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잔느의 남자친구는 그녀를 오롯이 사랑하기보다는 그가 만들어 놓은 틀로 그녀를 봅니다. 폴의 전 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를 사랑했다기보다는 그녀의 이상에 그를 맞췄을 뿐이죠.

우리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의 이름을 알고 사는 곳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안다고 생각하죠.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못함을 우리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글쎄요, 누가 쉬이 답할 수 있겠느냐 만은 나라는 존재는 스스로 존재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는 이미지 합산의 결과물일 수 있습니다. 결국 누군가를 아는 것은 단순히 누군가를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 예를 들어 ‘누군가를 존재하게끔 하는 것’일 수도 있죠.

“네 이름을 알고 싶어” 그의 마지막 말입니다. 그는 이름을 물어 일상적인 관계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녀의 대답은 “탕!” 허공에 울리는 총소리뿐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말하죠. “난 그를 몰라. 그의 이름도 몰라”라고. 그리고 여러분께 묻습니다. 당신은 당신을, 그리고 당신의 당신을 알고 계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