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화(철학96)

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진짜 같았다. 그가 묘사한 인체의 손, 발, 가슴, 다리 등은 조각이라 믿기지 않을 만큼 생동감이 넘쳤다. 물체를 움켜쥐는 손가락 관절의단단한 악력이 감상자에게 전달되었고, 뭔가를 걷어차는 형상의 종아리 근육에서는 핏줄이 돌며 피가 순환할 듯한 혈기가 느껴졌다. 작품에는 사람을 흡입하는 마력 같은 게 있었다. 쓸쓸한 정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단절되어 있는 인체의 팔 다리들은 마치 있었던 데로 돌아가길 바라듯 절실함이 묻어났다. 그가 형상화한 인체의 부분들을 연결하면 온전한 인간이 완성될 것 같았다. 여타 작가의 작품들에서 발견할 수 없는 이러한 완전성으로 그는 미술계를 비롯 대중들에게도 명성을 얻었다. 그의 작품은 세계 여러 미술관과의 전시 계약이 예정돼 있었고, 유수 매체들에서 인터뷰를 원했다. 영국 BBC 방송에 처음 얼굴을 드러낸 조각가는 생각보다 젊었고, 자신이 조각한 조각들처럼 단단한 육체를 갖고 있었다. 그는 날렵한 턱선을 쓰다듬으며 자신은 어려서부터 인체의 움직임과 모양에 관심이 많았고, 점토로 모양 빚는 걸 즐겼다고 말했다. 예민하게 빛나는 눈빛과 잘생긴 외모 탓에 누군가는 그와의 내밀한 섹스를 상상할지 몰랐다. 전시는 가는 곳마다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가히 전성기라 할 수 있었다. 몇 년 후 조각가는 경찰에게 연행됐다. 스위스행 비행기 티켓을 끊어놓은 상태였다. 경찰이 작업실 앞에 잠복해 있다가 새벽에 내린 비로 으스스해진 거리를 잰걸음으로 걷는 조각가의 코트 자락을 낚아챘다. 다음 날 그에 관한 기사가 전 세계 신문과 방송을 통해 보도되었다. 살해, 시체 유기 및 훼손 혐의였다. 조각가는 명성을 얻은 4년간 30구가 넘는 시체의 손과 발, 몸통을 절달했고, 잘라진 손과 발 등을 뼈대로 해 그 위에 석고를 붓거나 발랐다. 경찰이 조각가의 작업실을 수색했을 때, 그가 개조해 사용해왔던 내밀한 지하 창고에는 다섯 구의 시신이 일부는 잘리거나 일부는 훼손되지 않은 채 눕혀 있었다. 발빠른 기자들이 경찰서로 달려가 운 좋게 그의 얼굴을 카메라에 담았는데, 조각가는 얼굴을 가린다거나 죄스런 표정을 짓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를 응시하며 모두를 향해 웃었다. 리모컨을 누르자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가 꾹 사라졌다.
  기사는 거칠게 대학로에서 혜화로 핸들을 돌렸다. 지나치게 빨리 꺾는 바람에 오른쪽 바퀴가 들릴 지경이었다. 갓길로 바짝 붙어 차를 몰아댔으므로 누군가가 금 밖으로 발을 뻗고 있었다면 밟고 지나갔을 것 이다. 새벽 택시는 언제나 이렇다. 병은 택시를 탈 때마다 목숨을 내놓고 타는 기분이 들어 언제나 손아귀에 잔뜩 힘을 주곤 했다. 그러면서 병은 자신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했는데, 태우지 않은 일기와 편지 따위, 정리하지 않은 고지서와 저녁 약속. 혹은 죽지 못하고 병신이 된다거나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릴 것에 대한 두려움과 같은 대체로 시답잖은 것들이었다. 쉰내를 풍겨대며 게슴츠레한 눈을 치껴 뜨고 있는 기사와 죽음을 공유하고 싶지 않은 것도 한 가지 이유였다. 병은 적어도 죽음이 선택이었으면 했다.
  택시가 한성대 방향으로 접어들자 어디선가 오토바이가 나타났다. 신호가 붉게 바뀌자 차들이 일제히 브레이크를 밟았는데, 오토바이 한 대가 거친 엔진 소음을 내며 내달렸다. 흔한 경우였다. 오토바이는 언제나 신호를 잘 지키지 않았다. 차들이 멈춰선 차도를 오토바이는 보란 듯 달렸고, 택시를 잡기 위해 손을 흔들던 남자를 정면으로 들이받았다. 우웅, 오토바이의 육중한 엔진음이 순식간에 퍽, 소리와 함께 절멸했고, 아스팔트 바닥을 그어대는 쇳소리가 비명을 질러댔다. 저런!
기사가 탄성을 뱉었다. 주변이 일순 고요해졌다. 신호가 바뀌자 차들이 사고를 낸 오토바이를 피하며 지나갔고 거리는 다시 차들의 엔진소리로 더럽혀졌다. 병은 파편을 흐트러뜨리며 넘어져 있는 오토바이와 절룩거리며 일어나는 운전자, 그리고 고개가 꺾인 채 바닥에 엎드려 있는 남자를 유리창으로 살폈다. 기사는 좀전과 달리 기세가 꺾인 표정으로 차를 몰았다.  

  - 저거 백 퍼센트 저 사람 과실이야.
  - 누구요?
  - 누구긴? 죽었나 살았나 엎어져 있는 저 사람이지. 한 차선이나 넘어와 택시를 잡고 있었으니. 잔뜩 취해가지고 서는. 새벽엔 저런 인간들 천지예요.
  - 죽은 것 같아요. 고개가 왼쪽으로 꺾이고 양팔을 뒤로 젖힌 상태로 누워 있었어요.
  - 짧은 새 자세히도 보셨네. 다친 사람한텐 그렇지만, 개값 취급받겠죠. 며칠 있으면 현수막 붙겠네. 신고할 거유?
  - 글쎄요.
  - 가만 있어요. 아주 골치만 아파. 오늘 일진 영 안 좋네. 아까도 차 몰고 나오자마자 횡단보도에서 노인네랑 애를 칠 뻔했거든. 일찍 들어가야겠네. 감사합니다앙. 

  병을 내려준 택시는 처음과 같은 기세로 차를 빠르게 몰아 사라져버렸다. 병은 잔돈을 받아들으며 조만간 기사가 누군가를 치고 말 거라 생각했다. 새벽에 차를 탈 때마다 병은 적지 않은 사고를 목격해왔다.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들은 들이받고도 별 다른 조치 없이 그냥 지나쳤다. 매일 누군가가 차를 들이받고 가드레일을 치받고 허공에서 한 바퀴 돌거나 그대로 벼랑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사고를 접해도 차들은 질주를 멈추지 않았다. 사람들은 더 빨리 달리길 원했고, 그것과 비례하여 빠른 속도로 미쳐가고 있다고 병은 생각했다. 병도 새벽에 운전을 하다 차에 치여 널부러져 있는 개의 머리를 밟고 지나갈 뻔했다. 급하게 핸들을 틀어 가까스로 피했지만, 바퀴 아래로 본 공허하게 풀린개의 눈이 오래 남았다. 죽어 있는 개가 이유는 아니었지만, 병은 얼마 후 차를 팔아버렸고 이후 운전을 하지 않았다. 뭔가를 한 번 치고 나면 다시 들이받고 싶다는 욕망을 억누르지 못할 것 같았다. 병은 도로 바닥에 모로 고개가 꺾인 채 납작하게 누워 있던 육체를 잠시 생각했다. 병은 어두운 거리를 가로질러 작업실 안으로 들어갔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30여 명의 인부들이 일하고 있었다. 병은 그들 사이에서 군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병과 가까운 거리에서 청동 주조물을 정으로 쪼고 있던 인부 하나가 아는 체를 했다. 병은 인부가 누군지 몰랐지만 자기도 상대를 안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사무실 쪽에서 군이 나타났다. 군은 병을 봐도 무표정이었다. 어지간히 일에 시달린 모양이었다. 군이 나오자 작업자들이 잡담을 하며 하나 둘 용광로 주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버너의 소음이 시끄러워 인부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군이 용광로 주물 방출구 근처에 있는 인부에게 뭔가 지시를 했다. 군의 표정을 살피던 인부들이 모두 말을 멈췄다. 상의 전체가 땀에 젖어 있는 인부가 방출구와 연결된 줄을 손에 잡은 채 예리하게 입구 쪽을 살폈다. 잠시 후 군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줄을 잡아당겼고 방출구가 열리며 내화 벽돌로 제작된 훔을 따라 청동물이 주형 입구로 움직였다. 20초쯤 뒤엔 천 도가 넘는 뜨거운 청동물이 주형 안으로 전부 들어갈 테고, 두 주쯤 지나면 주조물이 완성될 것이다. 작업을 지켜보는 군이 이마의 땀을 소매로 대강 문질렀다. 청동물이 들어가는 걸 보니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모양이었다. 주조 과정은 언제나 긴장 속에서 이루어졌다. 군은 청동물이 주형에 온전히 들어간 걸 확인하고 난 뒤 피곤한 듯 눈을 끔벅이며 병에게 다가왔다. 군이 움직이자 인부들이 각자 작업대로 흩어졌다.

  - 웬일이냐?
  - 잠이 안 와서.
  - 들어가자.

  사무실 안도 작업실처럼 찜통이긴 마찬가지였다. 군의 책상엔 너저분한 서류들이 흩어져 있었고, 재떨이에는 군이 피워댄 담배꽁초가 수북하다 못해 책상 위까지 흩어져 있었다. 선풍기가 제멋대로 돌아가고 있었지만, 컨테이너 박스로 얼기설기 지은 사무실 열기를 식히기엔 부족했다. 정리되지 않은 사무실 자체가 군의 피곤한 일상을 보여줬다. 병이 창문을 열어젖히자 밤공기가 허겁지겁 실내로 들어왔다. 군이 봉지를 뜯어 가루커피를 타왔다. 병은 군이 내미는 종이컵을 받아들어 탁자에 내려놓았다. 프림이 들어간 커피를 마시자니 속이 거북했다. 군은 졸린 눈으로 마른세수를 거푸 해댔다. 

  - 대강 들었는데.
  - 뭘?
  - 운화공원에 작품 낸다며.
  - 생각 중이야.
  - 생각하고 자시고 뭐 있어.

  둘은 오래된 친구였다. 병은 군이 대학 때 여자 땜에 자살을 시도했을 때, 그 이유로 일찍 군대에 가기 위해 논산으로 떠났을 때도 옆에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 만난 첫 번째 부인 사이에 아이를 두 번 지웠고, 부인이 가난을 견디지 못한다는 군의 술추렴을 들어주었다. 한때는 군도 작품을 내놓던 조각가였다. 군은 결혼한 뒤부터 작가로서의 이름을 버리고 주조 공장을 차렸다. 의뢰받은 작품들은 몸집만 컸지 별볼일없는 것들이었다. 최근 병은 두 번째 부인 사이에서 딸을 낳았다. 자식이 생긴 군은 공장을 넓혔고, 인부를 충원했다. 청동 주조는 주문이 그리 많지 않았다. 이전보다 술을 많이 마셨고, 일도 많이 받았다. 그러는 사이 군의 얼굴은 검게 변하고 몸은 쪼그라들었다. 일을 많이 하는 군의 몸에선 땀냄새가 가시지 않았고, 술에 찌든 탓에 눈은 항상 충혈되어 있었다. 게다가 군의 피부는 악어가죽마냥 우툴두툴해졌다. 병은 며칠 전 자신의 작업실에 찾아온 군의 두 번째 부인을 떠올렸다. 병은 군이 자꾸 무리를 하는 게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아서일 거라 짐작했다. 군은 첫 번째 실수를 극복하기 위해 공장에서 먹고자며 돈을 버는 데 몰두하고 있었지만, 두 번째 부인이 외로움에 약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그의 부인은 군의 남성에 매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자신이 아니어도 군의 부인은 조만간 누군가와 바람을 필 거라고 병은 확신했다. 매사 그런 식이었다. 하나를 보충하면 다른 곳에서 문제가 생긴다. 병은 언제나 안 좋은 일을 미리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 생각은 대개 현실과 이어지곤 한다는 게 병의 습관을 부추겼다.   

  - 좀전에 사람이 죽었어.
  - 차가 치었냐?
  - 오토바이.
  - 둘 중 하나지. 다반사야.

  밖에서 누군가 휘파람을 불었다. 취객들의 왁자지껄한 잡담과 내달리는 차들의 소음이 이어졌다.  

  - 오늘도 밤 새나?
  - 납기를 맞춰야니까. 

  병은 책상 모서리에 기댄 채 담배를 피고 있는 군을 쳐다봤다.

  - 왜?
   
  공업도시 이미지에서 벗어나겠다는 일념으로 시에선 녹지를 내세웠다. 신도시 곳곳에 공원을 조성하여 전체 녹지 비율을 30퍼센트 이상 끌어올리겠다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엄청난 예산이 들어가는 사업이 지만, 시는 그동안 끌어모은 돈을 풀어 이미지를 개선하겠다는 쪽으로 정책을 잡았다. 녹지가 풍부해지면 신도시로 사람들이 몰려들 것이고, 그렇게 되면 시가 방출한 예산은 빠른 시일에 다시 보충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논란이 일고 있는 지하철 노선이 인근의 시와 경합을 벌이다 확정되면서 도시 활성화 계획은 활기를 띠었다. 더욱이 공장이 득실거리고 공기가 오염된 도시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시로선 일석삼조인 셈이었다. 공원뿐 아니라 예술성이 가미된 세련된 이미지도 덧붙이고자 시에선 지역 예술가들을 끌어모았다. 넉넉한 작품비를 제공하겠다는 조건으로 작품을 의뢰했고, 병에게도 괜찮은 조건을 걸었다. 병이야말로 시의 사업과 잘 어울리는 조각가였다. 병은 공장이 밀집해 있는 지대에서 조금 떨어졌지만 인근 후미진 빌라촌에서 살고 있는 지역 예술가였다. 최근 2년간 병은 작업을 하지 않았고, 생활은 극도로 궁핍해졌다. 병은 가끔 군에게 돈을 빌려다 집세를 내고 술을 사마셨다. 작품을 내놓지는 않았지만 군은 병이 작업에 애착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카드 독촉에 시달렸지만 병은 작업실 월세를 꼬박꼬박 군에게 빌려다 내고 있었다. 이번 작업이 병에겐 괜찮은 재기가 될 거라고 군은 확신하고 있었다. 시 관계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을 때 병은 자신을 추천한 이가 군이라 짐작했다. 2년 가까이 작업을 하지 않았고, 시가 알아주기에 병은 신인에 가까웠다. 지역예술가협회에도 등록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공원 조성에 대한 기사가 난 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시 공무원이 병에게 전화로 작품 의뢰를 했다는 건 누군가의 입김이 있었을게 뻔했다. 병의 동네에 오랫동안 방치된 넓은 공터를 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이라고 공무원은 설명했다.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냐고 묻자 그는 병과 같이 유명한 예술가의 연락처를 저희가 모를 수 있겠냐며 잿빛 담배 연기 같은 너털웃음을 뱉어냈다. 사시는 동네에 작품을 기증하신다는 건 꽤나 의미 있는 일이 아니겠냐고 공무원은 덧붙였다. 병은 생각해보겠다는 짧은 답을 하고 전화를 끊으려 했고 꽤나 집요한 공무원은 사례를 톡톡히 할 테니 작품을 꼭 좀 부탁하겠다며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전화를 끊은 병은 머릿속으로 잠시 공원을 그려보았다. 재미없었다. 나무를 심고 잔디를 조성할 것이고, 오솔길 주변에 화단을 꾸밀 것이다. 한쪽엔 주민들을 위한 체육시설을 마련해 놓을 것이고, 주민들이 길을 걸으며 띄엄띄엄 놓여진 작품들을 감상할 것이다. 터가 할애된다면 아이들을 위한 인라인 연습장이라든지 분수 따위가 들어설지 모른다. ‘운화공원’은 조선조 유명한 유학자의 호를 따서 지은 것이라 했다. 특별하달 것도, 새로울 것도 없는 평범한 공원이 될것이 뻔했다. 어느 동네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그런 공원이었다. 여인의 나체를 형상화한 조각품이 인기를 얻을 테고, 욕망의 대상이 된 누군가에 의해 가슴과 성기 부위가 닳아 반들거리거나 염료가 떨어져 나갈 것이다. 일부 조각품은 밤길을 떼로 몰려다니는 청소년들의 가방에서 꺼낸 붉고 푸른 락커에 희생될 것이고, 살림이 궁한 고철 수집가가 새벽에 흙을 파내 작품의 일부를 파손시켜가며 리어카에 일부를 몰래 담아갈 수도 있다. 도난이 잦아지면 지역 신문 기자가 취재해서는 사설란에  무분별한 작품 훼손의 심각한 우려를 표하며 지역문화개선에 힘쓰자는 당부의 기사를 자신의 덜 떨어진 증명사진과 함께 올릴 것이다. 그러나 병은 이 작업이 어쩌면 꽤 매력적일 수 있겠단 생각이 들기도 했다. 공원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자신의 작품이 ‘영원히’ 거기 놓일 수 있다는 것. 전시 공간의 일회성에서 벗어나 땅 위에 세월을 덧입힐 수 있다는 것. 그런 사소한 것보다 병을 사로잡는 건 은폐성에 있었다. 좀 더 자연스럽게 가둘 수 있다는 것. 무엇을? 양손을 펼쳐 지그시 바라보았다. 파르르 떨리는 손. 무엇도 만지지 않은 시간은 병의 손을 녹슬게 했다. 영원. 그런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잡히지 않는 것. 잡을 수 없는 것. 작품을 완성하려면 은밀해야 한다. 완강해야 한다. 눈을 감았다. 나른해졌다. 복잡한 생각들이 병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군은 병이 왜 3년 가까이 작업을 하지 않는지 알 수 없었다. 병이 작업을 그만둘 만큼 뭔가 의미심장한 사건은 근래 일어나지 않았다. 작가들에게는 누구나 휴지기가 있지만, 지금 시점에서 열정을 내려놓은 병이 군은 의아했다. 병에게 조각은 일상에 가까웠다. 학교 때부터 병은 누구보다 성실하게 작업했고, 한눈을 팔지 않았다. 병은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다. 삼촌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미술은 꿈도 못 꿨을 거라고 말했었다. 삼촌은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병을 아꼈다고 했다. 병 때문에 숙모와 말다툼을 심하게 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병은 작가가 되기 위해 꾸준히 작품전에 응모했다. 삼촌에게서 벗어나는 게 목적이라고 했다. 군은 병이 연애라는 걸 제대로 하는 걸 보지 못했다. 자신이 몇 명의 여자와 열애에 빠지는 동안에도 병은 작업에만 몰두했다. 병은 여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관심이 없다는 게 맞을지 몰랐다. 그렇다고 남자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 병은 사람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군이 기억하는 병은 언제나 병약하고 조용했으며, 느렸다. 병은 여성스러울 만큼 가냘픈 체형과 하얀 피부를 갖고 있었다. 한눈에도 병이매우 예민하고 감각적인 성격이라는 걸 드러내주는 외모였다. 술을 마시면서 병은 군대에 있을 때 자신의 성기를 주무르고 싶어 안달이 난 몇 명의 고참 얘기를 꺼내기도 했다. 살의를 느낄 만큼 저열한 고참의 느글느글한 눈빛을 견디느라 병의 심신은 무척 지쳐 있었고, 제대를 할 즈음에는 자신의 육체가 혐오스러울 지경에 이르기까지 했다. 병의 육체는 삼촌과의 관계와도 이어질지 몰랐다. 병은 욕망에 들뜬 고참의 눈빛에서 삼촌을 떠올렸다고 했다. 제대를 한 이후 병은 좀전과 다름없이 조용히 작업에 몰두했으므로, 군은 병의 경험이 작품을 이루는 하나의 선이 되었을 것이라 간주했다. 제대 후 병은 작업실에 틀어박혀 작품에 몰두했고, 원하던 대로 신진 작가로 이름을 알릴 수 있었다. 종종 현대작가전에 작품을 출품했고, 몇 년 전에는 군이 도움을 주긴했지만 본인 이름의 작업실도 가질 수 있었다. 작가가 된 이후 병의 삶은 여유가 생겼지만, 부쩍 활기를 잃어갔다. 병은 오히려 무명 때보다 맥을 못 추고 있었다. 군은 병의 보드랍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떠올렸다. 군은 병이 집착하는 게 물(物)이 아니라 짐작했다. 병이 공간에 집착하는 것인지, 형태에 집착하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기억에 집착하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군은 자신이 병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병의 첫 입선작은 만삭의 커다란 배였다. 병은 온갖 쓰레기를 떠서 채워넣은 거대한 석고 배를 만들었는데, 여인의 불록한 배 군데군데 쓰레기들이 튀어나와 있는 형태를 묘사했다. 병이 뜬 쓰레기에는 개나 고양이의 사체와 먹다 남은 닭의 뼈, 돼지 껍데기와 같은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느 배에는 남성의 성기를 형상화한 모양이 불쑥 튀어나와 있기도 했다. 작품의 제목은 ‘품’이었다. 병은 몇 개의 품 시리즈를 만들었고, 각각 다른 형태의 내용물들을 담아놓았다. 때로 체 게바라의 책이라든지 마틴 루터의 사진을 뜬 형상이 배 위로 튀어나와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그런 식의 명료한 주제는 관람자를 골탕먹이기 위한 속임수에 불과했다. 주제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건 병의 성향이 아니었다. 가장 최근 병이 뜬 내용물은 물음표였다. 뱃속에 뭐가 들었는지 작가 외에는 아무도 몰랐다. 군은 굳이 병에게 설명을 묻지 않았다. 병이 말하지 않아도 평론가가 병의 작품에 다양한 미학적 해석을 달아줄 것이다. 병의 품 시리즈는 미술계에서 조용하지만 주목할 만한 신예의 작품으로 인정받았다. 병이 배를 완벽하게 닫아버릴수록 더 좋은 평을 들었다. 무엇이 들어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는 배의 이미지는 신비로우면서 다양한 해석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병의 작품을 소장하고 싶어 하는 컬렉터도 늘었다. 개중엔 자신이 원하는 내용물을 넣어 주길 바라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이후 병은 더 이상 품 시리즈를 작업하지 않았다. 병은 사물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가끔 자신의 작업실에 들르는 것 외에 병은 외출을 하지 않는 듯했고, 더구나 타인과의 교류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군은 조각가로서 인정받는 것에 병이 관심이 없다면, 병이 삶을 사는 의미가 도대체 무엇에 있는지 궁금했다. 군은 병이 한시라도 빨리 작업에 몰두했으면 했다. 그래서라도 이번 운화공원건은 병이 꼭 작업했으면 싶었다.
  조각가의 살인 행각은 여타 장르에서도 매력적인 소재가 되고 있었다. 할리우드 감독의 최신작에서는 조각가의 행위를 모방하는 소재가 이야기를 이루었다. 내용인즉슨, 주인공의 직업은 조각가였는데 그는 날마다 여자를 유혹해 작업실에 데리고 간다. 잘생긴 외모와 매혹적인 말솜씨에 홀린 여자들은 대부분 그의 유혹에 넘어가곤 했고,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멜랑콜리한 음악과 향기 좋은 와인에 취한 여자들은 남자의 손에 이끌려 작업실로 들어간다. 조각가의 작업실은 꽤나 외진 산길에 있는 네모난 잿빛 석조 건물이었는데, 어디선가 부엉이가 음습하게 울어대며 이곳에서 일어날 좋지 않은 사건을 예고하고 있었다. 조각가가 차를 몰고 산길을 올라가 건물 앞에 여자를 내려놓으면, 술에 취한 여자는 깔깔거리며 그의 작업실이 매우 판타스틱하다고 소리를 질러댄다. 남자는 희미하지만 날카로운 미소를 지으며 여자의 손을 잡아 이끈다. 이윽고 묵직한 문을 열고 조각가의 작업실에 들어가게 되는데, 어두운 작업실에 희끄므레한 달빛이 들어오면서 두 사람의 실루엣에 먼지 가루가 흩날리며 분위기는 더욱 긴장된다. 남자는 어두운 조도에서 여자를 향해 다가가고 두 사람은 키스를 나눈다. 여자는 남자의 키스에 취해 만족스런 표정으로 눈을 감고, 남자는 여자의 옷을 남김없이 벗겨 어둠 속에서 여자의 부드러운 나체가 드러난다. 이윽고 여자는 작업실 바닥에 누워 있고 두 사람은 황홀에 가까운 정사를 즐기게 된다. 장면이 바뀌면 나른해진 여자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순간 머리 위로 뜨거운 무언가가 흘러내린다. 갑작스럽게 내려오는 정체 모를 액체는 여자의 살을 녹아내리게 하고, 여자는 괴기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양손으로 머리를 움켜쥔다. 뜨거운 액체는 계속 흘러내리고 여자의 절규가 담긴 육체는 조각가의 작품으로 완성된다. 한낮의 전시실, 조각가는 그의 작품을 구경하러 온 많은 인파들에 둘러싸여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샴페인을 마시고 있다. 곳곳에 전시된 인체를 형상화한 그의 작품들에는 각각의 제목이 지어져 있는데, 머리를 움켜쥐고 공포에 미쳐가고 있는 여인의 조각품에는 ‘공포’라는 작품명이 붙어 있었다. 날카로운 킬 힐을 신은 여자의 뒷모습이 조각품 앞에 멈춰 서 있고, 여자는 또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조각가에게 다가간다. 여자의 뒷모습이 조각가에게서 멈췄을 때 카메라는 줌을 끌어당겨 그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먹잇감이 손아귀에 들어온 조각가의 야비한 미소가 남김없이 화면에 잡힌다.
  로댕의 ‘청동시대’ 역시 실제 인물의 원형을 떴다는 의혹을 샀던 작품이었다. 물론 로댕은 작품을 위해 살인을 하지 않았고, 작품 역시 인체를 실제로 떠서 제작하지 않았다. 너무나도 완벽한 인체에 가까웠기에 오해를 받은 것뿐이었다. 애인의 영감을 낚아챌지언정 로댕은 살인자처럼 무모한 행동을 하진 않았다. 로댕은 자신의 손과 영감, 청동의 재료만으로도 충분히 완벽한 작품을 완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 로댕이나 살인자나 조각가로서의 열망은 같을 거라고 병은 생각했다. 병은 종신형을 선고받은 조각가가 운이 좋은지 나쁜지 알 수 없지만, 만약 영화를 볼 기회가 생겼다면 그의 표정이 어떨지 궁금했다. 삼류 공포물로 전락한 자신의 스토리를 비웃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감방 안에서 조각가가 꿈꾸고 있는 형상은 무엇일까. 비누나 작은 나무토막 따위를 깎으며 곤잘레스와 같이 허공의 삼차원 공간에 자신의 선을 드로잉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만지고 싶은 것은 눈에 보이는 것. 육중한 중량감과 흐물거리는 질감을 가진 고깃덩어리일 거라고 병은 생각했다. 죽어서 비로소 펄떡이는 육체를 자신만의 작품으로 재탄생시키고 싶은 유혹에 침을 삼킬 것이다. 떨리는 살인자의 손. 그의 손을 상상하는 병의 손에서 가렵다는 관념이 일어난다. 손이 가렵다. 미칠듯이 가렵다. 병은 자신의 양손을 번갈아가며 긁어댔다. 
  벨이 울렸다. 시의 공무원이었다. 생각을 좀 해보셨냐고 묻고 나서 그는 공원 조성 공사가 이미 진행되었다고 덧붙였다. 공사는 넉 달 정도 진행될 예정이므로 선생님은 그 안에만 작품을 완성해주시면 될 거라고 했다. 그에겐 공원을 짓는 데 필요한 잡다한 업무들이 쌓여 있을 것이다. 병이 시간을 끌수록 그의 업무량은 줄어들지 않을 테니 한시라도 빨리 병이 승낙했으면 하고 바랄 것이다. 병은 공무원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작품을 제멋대로 해석해왔던 비평가와 사람들을 떠올렸다. 병은 그와의 약속을 잡은 뒤 재킷을 걸쳤다. 종일 굶고 있었던 위가 쓰렸다. 병은 작업실 문을 걸어 잠그고 천천히 걸었다. 여자를 만나기로 했다. 병은 현관 문을 잠그고 난 뒤 군에게 전화를 걸었다. 군은 뭔가를 우걱우걱 씹고 있었다. 점심을 먹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 왜?

  군이 물었다. 왜?라고 묻는 건 군이 아주 바쁘다는 걸 의미했다.

  - 그냥.

  둘 사이의 그런 대화는 익숙했다. 군의 씹는 소리 너머로 망치질 소리가 들려왔다. 한쪽에선 구리, 주석, 아연, 납 등을 도가니에 집어넣고 엄청난 열을 가해 녹여대고 있을 것이고, 한쪽에선 정으로 주조물을 다듬고 있을 것이고, 한쪽에선 인부들이 담배를 피며 잡담을 늘어놓을 것이다. 군은 모든 과정을 총괄 지휘하며 바쁘게 오갈 것이다.

  - 작업 하려고.
  - 잘 생각했다. 이따 들러. 술이나 한잔 하자.

  목소리가 우렁찼다. 군이 살고 있는 세계는 언제나 시끄럽다. 군은 언제나처럼 성실하게 자기 몫의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병은 생각했다. 병은 오솔길을 걸었고, 공사가 진행 중인 운화공원 터를 한참 지켜보았다. 포크레인이 땅을 파헤치고 있었는데, 할머니 한 분이 분주하게 상추와 아욱, 쑥갓과 같은 작물들을 손으로 숭덩숭덩 뽑고 있었다. 공터 한켠에 텃밭을 일궈왔을 할머니는 결국 농사지을 땅을 잃어버린 셈이었다. 할머니가 작물을 다 거두기도 전에 포크레인이 거칠게 땅을 파대는 바람에 고추와 토마토대가 꺾이고 잎채소 일부가 헤집어져 흙투성이가 되어버렸다. 옆에서 삽을 들고 땅을 고르던 인부들이 그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병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다가 고개를 숙이고 그곳을 지나갔다. 도시란 이런 곳이다. 카페 문을 열었다. 병과 눈이 마주친 여자가 웃음을 흘렸다. 군의 여자였다.
  병의 작품은 미술품만을 취급하는 특급우편물 차량에 의해 군의 작업실로 보내졌다. 군은 병이 보내온 작품을 천천히 뜯어보았다. 이제껏 병이 작업했던 품 시리즈의 하나였지만 이번 것은 특별했다. 병은 기존 품 시리즈에서 쓰이지 않던 배를 감싸는 구조물의 청동 주조를 군에게 부탁했다. 병이 제작한 품이 군이 주조한 청동판에 얹혀지는 식이었다. 더욱이 병의 배는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철을 재료로 했으며, 이제껏 활용하지 않았던 용접 기법으로 꼼꼼하게 마감되어 있었다. 철로 감싸인 병의 품은 한층 단단하고 완강해보였다. 3년 만에 나온 병의 작품은 조각가인 병의 재기를 의미하는 것이자 군의 명성 또한 도와줄 것이다. 이번에 제작된 병의 작품은 운화 공원의 개장을 알리는 공식 행사 때 특별히 설치될 예정이었다. 그 자리에는 다큐멘터티 팀이 합류해 일련의 과정을 찍기로 했다. 병의 작품이 청동으로 주조되는 과정은 다큐멘터리로 방영될 예정이었다. 장인과 예술가의 긴밀한 관계, 세상의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는 배의 이미지들이 병의 작품에 어떻게 녹여 있는지를 구성작가의 자극적인 글발을 통해 시청자에게 전달할 계획이었다. 화면의 마무리는 물론 운화공원의 한적한 터에 자리한 병의 품이었다.
  병의 작품은 제1광장 축구장 옆 잔디에 놓여질 예정이었다. 축구는 병이 가장 싫어하는 운동이었다. 만일 병의 작품이 살아있는 유기체라면 평생 좋아하지도 않는 아마추어 운동선수들의 축구 경기를 지켜봐야만 할 것이다. 고개를 돌리면 도로 맞은편으로 전기를 먹어가며 억지로 물길을 내뿜고 있는 인공폭포를 보게 될 것이다. 공원 개장식이 시작되면 시의 유명인사들이 한 줄로 서서 멍청한 표정을 지은 채 테이프를 끊을 것이다. 모두는 행사가 빨리 끝나길 고대하며 억지웃음으로 다 같이 공원을 둘러볼 것이다. 이윽고 병과 군의 손길을 거쳐 완성된 청동 주조물이 모두에게 공개된다. 다음 사회를 맡은 이가 작가로서의 병의 이력을 간략히 소개한 다음, 병의 품 시리즈에 담긴 의미를 마치 시를 읊듯 감정을 잔뜩 실어 전한다. 

  - 생명을 잉태한 따스하고 평화로운 배 이미지는 영원한 노스텔지어와 같습니다. 작가의 ‘품’ 안에는 인류를 품어줄 희망적인 메시지가 들어있습니다.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어줄 운화공원의 이미지를 이 작품은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품’을 비롯하여 공원에 기증된 모든 작품들은 공원의 시작과 함께 영원히 이곳에 새겨질 것입니다.

  군은 여느 때처럼 작품을 마무리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 다음 인부들을 불러모았다. 먼저 구리와 주석 등을 녹이는 작업이 시작될 것이다. 한켠에서는 거푸집을 제작할 것이고, 세밀하게 측량된 온도와 타이밍에 맞추어 병의 석고본은 청동을 입고 탈바꿈될 것이다. 군은 병의 작품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병의 새로운 품은 이전 것보다 한층 강한 느낌이 들었다. 만삭의 거대한 배의 조화로운 선감은 어느 때보다 약동하는 생명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번에도 뱃속에 무엇이 떠 있는지 군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군은 어느 때보다 병의 작품에 강한 애착을 느꼈다. 병의 품에는 호기심과 환희, 슬픔과 절망이 공존해 있었다. 심지어 작품 자체가 병인 것만 같았다. 어느 때보다 신경을 써서 병의 작품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그러면서 군은 아내의 외박을 떠올렸다. 전화를 받지 않는 건 미안해서일 거라 생각했다. 또한 병의 이번 여행이 꽤나 길지 않을까 예상했다. 좀처럼 움직이지 않던 병이 여행을 간다는건 결단 후에나 가능할 일이었다. 여하튼 군은 작가로서의 병이 어리석지 않기를 바랐다.  
  병은 이번 다큐멘터리 촬영 인터뷰에 응했다. 미리 녹화된 병의 인터뷰는 행사 때 스크린을 통해 모두에게 공개될 예정이었다. 병은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작품에 대해 설명했다. 품을 통해 영원을 만지고 싶은 조각가의 어리석은 이기심에 대해. 가벼움, 투명에 가까운 언어, 유머를 상실한 오늘에 대해, 알 수 없다는 것만을 알 수밖에 없는 당신들에 대해. 이야기를 마치고 나서 병은 화면 정중앙을 쳐다보며 모두를 조소했다.


수상소감 - 이정화(철학96)
돌을 좋아한다. 바닷가에 가면 형형색색 돌 천지다. 돌을 들여다보고 온기를 느끼고 손으로 쓰다듬으면 이상한 생각이 든다. 돌을 통해 ‘전설’을 느낀다(라고 나는 단정한다). 돌의 돌의 돌의 돌의 돌의 돌. 눈 앞에 바다. 바다의 바다의 바다의 바다의 바다. 그 옆에 나무. 나무의 나무의 나무의 나무의 나무의 나무. 그 뒤에 바람. 바람의 바람의 바람의 바람의 바람…. 그런데 나는 안 된다. 나로는 도무지 들어가지지를 않는 것이다. 나의 나의 나의 아아 안 된다. 갑갑하다. 인간인 탓이라고 나는 다시 단정한다. 도통 모르겠다. 그리고 너. 너는 왜 거기 그러고 있는 거지? 이리 와. 너는 싫다고 고개를 젓는다. 이리 와. 너의 떨리는 어깨, 야윈 뺨, 휘청거리는 몸. 초점을 잃은 눈동자. 이리와. 우리 함께 건너가자. 이리와. 건너가자. 너는 그대로 주저앉아 무릎을 감싼 채 훌쩍인다. 나, 너, 건너감. 여기서부터 나의 글쓰기는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욱 성실히 글쓰기 하라 주시는 상이라 여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