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링 나이트 플리마켓

기자명 엄보람 기자 (maneky20@skkuw.com)

ⓒ오소연

음악 듣는 것을 좋아하나? 쇼핑은? 사람구경이나 술은? 넷 다 좋다는 사람도, 이 중 하나만 좋아하는 사람도 적적한 토요일 밤을 후회 없이 보낼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이름도 묻기 전에 인파 속으로 사라진 빨간 머리 여자는 소리쳤다. “좋아하는 게 다 있어 이곳이 좋다”고. 클럽문화와 플리마켓(Flea market)의 결합이라는 점을 제쳐두고 바라봐도 블링 나이트 플리마켓(이하:블링마켓)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논현동에 위치한 복합문화공간 플래툰 쿤스트할레는 매달 첫째 주 토요일이면 쇼핑과 음악을 즐기려는 젊은 심장고동으로 들썩인다. 흥겨운 디제잉, 센스와 난해함 사이를 오가는 저렴한 물건들과 눈이 즐거운 스타일로 무장한 사람들. 게다가 맛깔난 음식과 술도 여기 있다. 이번 달로 열일곱 번째 오픈을 맞은 블링마켓은 새로움을 좇는 사람들에게 회자되며 꾸준히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오후 7시. 오픈한지 한 시간쯤 지난 블링마켓은 차가운 입김을 달뜬 흥분으로 바꿔놓기에 충분했다. 재간 넘치는 DJ들이 3층 건물 전체의 공기를 디자인하기 시작하면 그 속에 유화물감을 흩뿌린 듯 형형색색 오만 질감의 옷가지들이 낡은 옷걸이에 제멋대로 걸린 채 눈썰미 좋은 주인을 갈망한다. 레코드판을 이용해 만든 벽걸이 시계, 세계 각국의 동전으로 만든 반지, 고르면 흑인 셀러(Seller)가 직접 손에 감아주는 구슬 팔찌 등 2층과 3층으로 통하는 계단과 통로에도 갖가지 장신구며 소품들이 이어져 두 걸음 떼다 멈추고, 세 걸음 걷고 쭈그려 앉기 일쑤다.
3층 한 켠에서 만난 황원정(23) 셀러는 고등학생 때부터 수집해 리폼한 안경을 자랑스럽게 내보였다. “쓰던 물건을 가져오는 다른 플리마켓과 달리 여긴 아티스트 개념이 강해요. 직접 만들어 하나뿐이지만 저렴하게 공유할 수 있다는 점이 매혹적이죠”라는 그의 말에서 블링마켓의 창조적인 색채를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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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박지은(28) 셀러는 수공예 장신구를 잔뜩 널어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동안 “사람과 생명에 대한 애정을 주제로 한다”는 확고한 작품관을 보여줬다. 건축모형을 만들 때 쓰는 사람 모형, 끊어지고 망가진 고물 목걸이 등을 이용해 만들어낸 빈티지 소품들은 그녀의 메시지를 대신 전해주고 있었다. 또 한 가지 반드시 명심해야할 블링마켓의 특별함은 바로 인생에 다시없을 단 한 번의 플리마켓이라는 점이다. 이미 참가한 셀러는 두 번 다시 블링마켓에서 물건을 팔 수 없는 규칙 때문에 ‘1월의 나’가 찾은 블링마켓에 ‘다음 달의 나’는 다신 갈 수 없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의 블링마켓은 모두 교집합 하나 없이 다양한 모습으로 다음을 기대하게 만들어왔다. 구매자의 입장에서는 매달 머리 끝 부터 발끝까지 새로워진 모습으로 만날 수 있어 좋고 판매자는 딱 한 번뿐인 기회를 누리려 더 열심히 물건을 팔고 주어진 시간을 즐긴다.
터는 있되 틀은 없어 당신 인생에 다시 찾아갈 수 없는 공간. 블링 나이트 플리마켓은 쾌락과 창조의 경계에 서서 젊은이들이 기성세대의 기우에 외치는 항변과도 같다. 다만 그 외침이 극단적이지 않다는 것, 숨 막힐 듯 즐거운 것이라는 데서 블링마켓은 특별하다. 2009년 첫 시작 이래로 재고를 처리하려는 옷가게 사장, 연예인 지망생과 기획사 사람들로 몸살을 앓기도 했던 블링마켓. 본래의 자유롭고 깨끗한 느낌을 되찾은 지금 그의 매력은 농익을 대로 농익어있다. 밤 10시, 순식간에 텅 빈 건물을 뒤로하며 아직 열기가 가시지 않은 이 터가 제 가치를 잃지 않길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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