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엄보람 기자 (maneky20@skkuw.com)

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의 남자 주인공 준세이를 기억하는지. 그의 직업은 미술 복원사다. 제 빛을 잃고 과거 언저리를 맴맴 돌던 물감자국에 다시 생명을 주는 일. 지나간 세월에 꽁꽁 묶여 있던 아오이와의 추억도 그의 손길 아래 새로운 사랑의 가능성으로 복원된다. 엄밀히 말해 미술 복원은 예술이 아니다. 예술을 지키는 기술일 뿐. 하지만 시간을 되돌리는 기술이란 점에서 이는 분명 꽤 매력적인 ‘마술’임에 틀림없다.

미술 복원을 말하다
미술 복원이 체계적인 학문으로 정립된 지 어언 3백 년이 흘렀지만 그를 일컫는 이름은 아직도 다양하다. △복원 미술 △수복 △미술 보존 등등. 그 이름만큼이나 규정하기 어려운 것이 미술 복원의 개념이다. 동서양 간에도 약간의 의미 차이를 보이는데다 시대에 따라 작품에 대한 인식이 변하면서 복원에서 중점을 두는 관점 또한 달라지기 때문이다. 미술 복원의 목적이 변화를 겪은 작품을 원래 모습으로 되돌려 놓는 일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는 지극히 이상적인 생각에 불과하다. 오랜 세월에 부대낀 미술품을 완성 직후의 상태로 복원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대의 미술 복원은 ‘작가의 의도를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상태로의 수정’을 주된 목표로 한다. 근래 들어 작가가 표현하고자 한 의도에 초점을 맞춰 가급적 처리를 최소화하는 쪽으로 미술 복원의 범주가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잘못된 복원의 안타까운 예로 꼽힌다. 수차례 공들인 복원 작업을 거치며 몇몇 성인들의 인상이 심하게 왜곡돼 본래 작품이 전달하려던 메시지를 알아보기 힘들어진 것이다.
작가의 의도를 재현하는 일 외에 △온도 △습도 △화재 및 사고 예방 장치 등 최적의 환경을 제공해 손상을 미리 예방하는 일도 점차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다. 현재 미술복원은 작가의 의도를 살리는 복원을 중심으로 사전예방을 통한 자연적인 복원이 그를 보완하는 추세다.

지우고 되살리는 과정


현재 미술 복원의 대상이 되는 작품은 16 ~ 19세기에 그려진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보다 이전의 작품은 이미 여러 번 복원을 거쳤거나 지나치게 훼손됐고 20세기 이후의 현대미술 작품은 전통 회화 복원에서 제외하기 때문이다.
복원작업은 미술품의 상태를 파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작품의 손상이유가 지나친 노화 때문인지, 화재와 같은 돌발적 사고 때문인지, 혹은 이전에 복원을 거친 적이 있는지 등을 면밀히 조사한다. 이때 작품상태 조사기록카드가 빛을 발한다. 처리에 사용된 재료와 기법 등 조사 중에 관찰된 모든 정보를 사진과 함께 기재한다는 점에서 병원의 진료카드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이 카드는 재복원을 맡게 될지도 모르는 미래의 복원사에게 도움을 줄 뿐 아니라 보관이나 취급상의 주의서 역할까지 담당한다.
손상의 원인과 상태 확인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복원 작업에 들어간다. 크게 구조복원과 화면복원으로 구분하는데 각각 지지대 층(서양화는 캔버스나 목판, 동양화는 한지나 비단)과 그림 층(채색된 안료)작업에 해당한다. 구조 복원은 △시간의 경과에 의한 섬유질 파열 △부식 △오염 △사고로 인한 기타 파손을 복구하는 작업으로 배접1)과 작은 천을 이용한 부분적인 보강을 병행한다. 화면 복원은 좀 더 많은 단계를 거친다. △작품 표면을 청소하는 클리닝 작업 △그림 층이 들뜨는 현상을 처리하는 접합 작업 △결손이 발생한 부분에 대한 메움 작업 △마지막으로 결손 부위를 감추는 색 맞춤 작업까지. 이 과정에는 온갖 화학약품과 아교 같은 천연 접착제, 붓 터치 효과를 내기 위한 수술용 칼과 치과용 소도구 등이 총동원된다.
복원에 사용되는 재료는 호환성과 가역성2)을 고려한 것이어야 한다. 지금 이 순간의 복원이 처음도 마지막도 아니기 때문이다. 앞서 사용한 복원 재료와의 공조를 고민하는 일, 미래의 복원사가 제거를 결정했을 때 깨끗이 클리닝되도록 미리 돕는 일. 이 두 가지를 위해 재료 선정에 기하는 신중함 또한 미술 복원 작업의 필수적 요소라 할 수 있다.

소양 갖춰 바로 보는 현 위치
이탈리아 국립 복원학교에 지원하는 학생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고 한다. 회화 전공생, 화학 전공생 그리고 미술사 전공생. 하지만 손재주와 역사적 지식, 그리고 과학적 실무 능력 밖에도 미술 복원을 위해 갖춰야 할 학문과 소양은 △고고학 △재료학 △보존 처리 과학 △작품 이해력 등으로 무궁무진하다. 미술품보존복원연구소 ‘Art C&R’의 김주삼 소장은 복원사가 되는 데 필요한 요소로 “전문지식을 비롯한 작품 해석력과 실무경험, 원형을 왜곡하지 않아야 한다는 마음가짐, 무엇보다 중요한 미술에 대한 애정”을 꼽았다.
과거와 달리 국내에도 회화의 보존과 복원에 대한 인식이 높아져 전문적으로 배우길 희망하는 젊은 세대가 늘어나고 있다. 이에 발맞춰 대학과 대학원에는 문화재보존학과나 보존처리학과 등 미술 복원 관련학과가 여럿 신설됐고 특히 동양화와 기타 유물 복원은 첨단 기자재를 바탕으로 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 중이다. 국립중앙박물관 복원팀 관계자는 “94년 이래로 유학파 복원사와 교수들이 미술 복원의 체계를 잡기 시작했으며 미술관과 문화재청에서도 2002년부터 전문직을 발굴, 양성해내고 있다”고 미술 복원의 현 위치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하지만 여전히 일부 회화와 서양화의 복원 분야는 이탈리아나 프랑스로의 유학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김 소장은 국내 미술복원의 현 위치가 과거에 비해 크게 도약한 것은 사실이지만 교육 시스템이 아직 미흡하다는 의견을 보였다. “커리큘럼 자체가 초기 단계 수준이에요. 고고 유물에 치중돼 회화 쪽은 개발이 빈약한데다 그나마 있는 학부과정들도 관광객 유치 방법을 가르치지 진정한 복원사를 길러 내고자 하는 것 같진 않아요”
그는 또한 복원사를 희망하는 학생들에게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이 직업은 생각만큼 낭만적이지도 고상하지도 않습니다. 소중한 문화재를 내 손으로 보존한다는 자긍심과 그림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꿈을 키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가치에 건네는 감사 인사
한국문화재회화복원연구소 박미례 교수는 미술복원이  “전시나 운반 등의 노출로 훼손이 불가피한 미술품에 영원성을 부여하고 원래의 목소리를 유지하도록 돕는 작업”이라고 명명하며 그것이 지니는 가치에 대해 역설한다.
한 점의 그림이 오늘날 미술관 벽면에 걸려 관람객을 맞이하기까지 수차례의 심폐소생술을 거쳤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지금은 초상화로만 만날 수 있는 화가가 남긴 몇 백 년 된 붓 터치가 아니라고 실망하지 말길. 미술 복원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과거의 감동이 후대에 이어지는 일은 아예 불가능했을 것이다. 자, 이제 앞에 놓인 그림을 통해 감사 인사를 건네 보자. 첫 번째는 세상에 그를 탄생시킨 화가에게. 그리고 오랜 세월 그 빛과 선을 지켜준 수십 명의 화가 아닌 화가들에게 한 번 더. 당신의 눈은 이미 한 차원 너머의 미술 작품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1) 배접:고서(古書)나 회화작품 뒤편에 종이나 천 등을 덧붙여 내구성과 보존성을 높이는 작업을 말한다.
2) 가역성:시간이 흐르는 동안 물체의 운동이 변화했을 때 시간을 거꾸로 되돌린다면 처음의 물체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는 성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