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영인 기자 (youngin@skkuw.com)

■ 생소하게 느껴지는 미술복원사. 무슨 일을 하나


아픈 작품을 치료한다. 예술가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해놓은 흔적인 미술품은 작가가 손을 떼는 순간부터 훼손이 시작된다. 캔버스는 누렇게 변질되고 유화는 금이 간다. 목조는 틈이 생기며 철은 녹이 슨다. 유리의 경우에는 깨지기도 한다. 이렇게 훼손된 작품을 최대한 원 상태로 돌려놓는 것이다. 우선 작품의 상태를 조사한다. 그 후 수술 및 처방의 단계로 볼 수 있는 보존처리와 작품의 주변 환경을 개선하고 정리하는 사후 관리를 한다. 이 모든 과정이 작품 특성에 맞게 이뤄져야 하며 직접보존과 간접보존을 병행해 진정으로 작품을 어루만지게 된다.

■ 어떤 이유로 이 길을 걷게 됐는지 궁금하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색채감도 있고 미술에 소질이 많았지만, 좋지 못한 가정형편 때문에 무작정 서울로 올라오게 됐다. 그리고 우연히 이 일을 만나게 됐다. 처음에는 무엇을 하는 것인지도 알지 못한 채 기술만을 연마했고 단순히 최고 기술자가 되자고 결심했다. 그 때가 16살이었다. 그리고 10년 후, 같은 일을 하는 친구들과 기술을 겨뤘고 이 직업에 대한 진정한 매력을 느끼게 됐다. 욕심도 생겨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20년, 이 일이 바로 천직임을 깨달았고 지금 이 순간까지 왔다.

■ 작품 치료를 통해 얻는 보람도 상당할 것 같은데
작품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 제일 큰 매력이다. 식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직접 보는 것만 아니라 만질 수도 있고, 심지어 내 손을 거쳐 다시 태어난다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 뿐만 아니라 최고의 사람들이 최선을 기울여서 만든 작품을 매일 수십 점씩 보다 보니 자연스레 더 넓은 세상을 사는 것 같다. 멋진 그림과 좋은 글귀, 그리고 역동적인 동상까지. 이보다 더 좋은 직업이 어디 있나.

■ 작업 과정에서 어려움이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열악한 상황이나 복원과정에 대한 인식 부족 등은 늘 안타깝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영정을 복원한 적이 있는데 보관상태가 너무나 좋지 못했다. 왜적에 의해 돌아가신 분인데 영정이 일본비단에 의해 쌓여 있었고 전두환 전 대통령 시절 폭탄물 검사 과정에서는 찢어지기도 했다. 뜨거운 조명 아래 수축과 팽창을 반복했고, 결국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작품에 대한 기본적인 인지조차 없었던 것이다. 복원코자 했지만 그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 당시만 해도 복원미술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설비 장비와 같은 환경 조건이 열악했기 때문이다. 말릴 곳이 없어서 낙엽 위에 담요를 깔고 말리고 도난 걱정에 이순신 장군 생가에서 혼자 잠을 자기도 했다. 지금에야 웃으며 말할 수 있지만 그 당시는 캄캄한 현실에 막막했다.

■ 미술복원 시 고려해야 할 점이 있다고
늘 어디까지 복원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무분별하고 계획성 없이 접근하면 사고가 난다. 손을 대지 않은 것만 못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복원은 기본적으로 더 이상의 훼손을 멈추는 것이기에 원형이 파괴돼서는 안 된다. 작품은 오랜 세월에 걸쳐 여러 차례의 복원 과정을 만나게 되는데 그렇게 고쳐지면서 역설적이게도, 작품은 영원히 존재하게 된다. 따라서 한 번에 끝내고자 하지 말고 몇십 년 후에 다음 사람이 만질 때도 괜찮도록 배려해야 한다. 복원이 한 명의 복원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 국내 미술복원.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단순히 10년 전과 비교해보더라도 우수한 발전을 이뤘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인 특유의 손재주 덕분인 것 같다. 그러나 이미 충분히 우리나라만의 문화와 기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무조건 해외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나라별로 부분적인 차이가 있을 수 있고 그에 따라 기술의 교류는 이뤄져야 하지만 그대로 답습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각자 나라의 특색을 살려서 동등하게 바라보도록 노력해야 할 것 같다. 우리는 충분히 자신을 가질 만하다. 이에 자부심을 가지고 향후 더욱발전시켜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