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바그다드 카페> 속 페르난도 보테로의 그림

기자명 김영인 기자 (youngin@skkuw.com)

〈창문 앞의 여인〉페르난도 보테로
사막 한복판에 작은 마을이 있었습니다. 그 마을에는 사막만큼이나 메말라 먼지 폴폴 날리는 바그다드 카페가 있었고요. 사고뭉치 남편을 쫓아낸 어느 아침, 가게 안주인 브렌다는 간판 아래 앉아 투박한 눈물을 훔치는 중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남편과 다투고 도로에 버려진 야스민이라는 여자가 양손에 짐을 한가득 들고 총총히 나타났지요. 한 사람은 땀범벅, 나머지 하나는 눈물범벅. 두 여자의 요상한 만남은 몸이 자아낼 수 있는 고통의 표식을 줄줄 흘리면서 시작됩니다.
바그다드 카페 사람들에겐 무언가가 하나씩 빠져 있습니다. 피아니스트를 꿈꾸는 미혼부(父)에겐 들어주는 이가 없고, 할 말 많은 사춘기 소녀에겐 친구가 없고, 무명화가에게는 모델이 없고, 빽빽 울어대는 갓난쟁이에겐 안아줄 이가 없지요. 모두 ‘자기 바깥 것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텅텅 빈 소리가 납니다. 그 끝없는 공허가 결국 자신에게 돌아온단 것도 모르고 말입니다. 마침내 이를 묵묵히 지켜보던 이방인 야스민이 팔을 둘둘 걷어붙이고 나섭니다.
야스민은 엉망진창 피아노 연주에 온 마음을 다해 귀를 기울입니다. 겉만 익은 소녀의 마음을 성심껏 어루만져 천진함을 되찾아주기도 하고요. 그녀가 베푸는 익살맞은 마술쇼와 따뜻한 관심은 바그다드 카페를 사람냄새 나는 공간으로 바꾸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녀를 통해 되찾은 행복은 발랄하고 끈끈한 인간관계망을 통해 마을 전체를 적셔나갑니다.
영화 속 콕스가 그린 야스민

그녀를 보세요. 터질 듯 통통한 몸집과 작은 터키석 두 알 같은 눈동자. 발갛게 상기된 뺨을 하고 가게를 누비는 모습. 뭔가와 닮았단 느낌이 꼬리를 물다가 무릎을 탁 치며 떠오르는 이름은 바로 페르난도 보테로입니다. 영화 속 야스민은 마치 보테로의 그림에서 몰래 뛰쳐나온 여자 같습니다. 심지어 단골손님 콕스가 그린 그녀의 초상화는 보테로가 그렸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의 작품과 흡사합니다. 이처럼 영화 구석구석을 떠도는 보테로식 이미지들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일까요.
인물의 양감을 풍선처럼 부풀린 보테로의 그림은 어딘지 우스꽝스럽고 맹한 구석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웃긴 그림’을 보다가 소위 명화라 불리는 보통 그림을 보는 순간 묘한 이질감에 사로잡힙니다. 그림 속 세상이 날카롭고 메말라 보이기 때문입니다. 풍성한 해학에 익숙해진 눈이 사실적 묘사에 섭섭함을 느끼게 된 것이지요. 마치 푹신한 소파에 몸을 묻어본 사람이 그제야 자신이 줄곧 앉아 있던 사무실 의자가 딱딱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야스민이 보테로의 여인을 똑 닮은 것은 바로 메마름의 각성이라는 공통점 때문입니다. 나날이 먹고 사는 데에 의의를 두던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만나고서야 이전의 삶이 황폐했다는 걸 깨달았으니까요.
하루하루를 외나무다리 빨리 건너기 하듯 살아가는 우리는 일상이 황폐해져 간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잘못됐다 여기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간편한 간과는 사라지지 않고 주변을 맴돌며 자잘한 행복을 망가뜨리거나 예기치 못한 곳에서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 내곤 합니다. 브렌다와 바그다드 카페의 손님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요. 우리는 야스민 같은 존재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너무 견고해서 해학이 끼어들 틈이 없는 삶에 보테로식 유머를 던져줄 무언가를. 그로 인해 찾아올 ‘내가 앉아있는 의자는 딱딱하다’는 각성을. 나도 누군가에게는 이미 각성자로 존재하는지도 모른다는 약간의 기대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