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엄보람 기자 (maneky20@skkuw.com)

또 인터뷰다. 이번 주도 꽤 큼지막한 두 녀석이 내 뒤를 줄줄 따라왔다. 다행히 컨텍이 잘 풀려 수요일 오후에 모든 약속이 잡혔다. 하나는 목요일 오후, 또 다른 하나는 금요일 오전. 날짜와 시간마저 맘에 쏙 드는 이번 인터뷰들, 왠지 예감이 좋았다.
근 몇 달 만에 조판 전날 집에 좀 가보나 했더니 이게 웬걸. 일찌감치 인터뷰를 다 마쳤는데도 엉뚱하게 부담감이 스멀스멀 목구멍을 조여오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너무나도 좋아해서 만나기 전날 잠도 설친 인터뷰이였다. 행여나 그 분의 주옥같은 말씀을 잘못 전달하면 어쩌나, 빼면 안 될 내용을 날리면 어쩌나 온갖 걱정에 무려 원고지 77매에 육박하는 녹취록에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었다. “기사 나오면 신문 한 부 보내주세요” 인사치레로 던진 인터뷰이의 무시무시한 한 마디는 왜 또 이럴 때 생각이 나는 건지. 죽이 되건 밥이 되건 가지치기가 시급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금주의 구세주는 기적도 아니요, 저 깊이 잠들어 있던 취사선택 능력도 아니요, 그냥 내 구닥다리 딕셔너리 플레이어였다. 몇 년 전인가 MP3 기능을 탑재하고 혜성처럼 등장한 바로 그 새하얀 전자사전. 일명 ‘딕플’ 말이다. 아이폰유저가 된 아빠가 토사구팽 격으로 버린 그 아이는 엉겁결에 나를 따라 상경한 참이었다.
녹음기만 믿었다가 피를 봤던 경험 때문일까. 그간 녹취를 해도 대부분의 기사는 그냥 받아 적은 내용으로 써왔다. 헌데 이번 기사는 크기가 약간 커서 보험 하나 드는 마음으로 딕플을 데려갔던 거였다. 녹취록을 작성하느라 이미 한 번 들었는데도, 편안하게 다시 접한 녹음 파일은 사뭇 새로웠다. 인터뷰이의 말을 무심코 컴퓨터로 옮겨 칠 땐 몰랐던 것들이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녹취의 마법이란 정말 놀라웠다. 내가 떨리는 마음으로 녹음 버튼을 누르던 순간부터 이루 말할 수 없이 뿌듯하게 인터뷰를 마칠 때까지의 모든 순간이 그 작은 기계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들었는데도 녹취록에 빠진 말도 꽤 많았다. 게다가 ‘소리’라는 요소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기억하게 했다. 이 때 인터뷰이가 물 마시러 갔었지, 이 얘기 할 땐 표정이 이랬는데 등등. 기특한 딕플은 지나가버린 내 소중한 시간을 재생해주고 있었다. 그렇게 몇 십 분이 흐르고 나니 대략의 방향이 잡혔다. 뭘 지면에 올리고, 빼야할지 딕플 속 인터뷰이가 모두 가르쳐준 덕분이었다.
이번 인터뷰 기사는 딕플이 썼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좋든 싫든 귓전을 파고드는 온갖 소리 중 우리는 얼마나 제대로 듣고 있을까. 심지어 한 마디 한 마디가 금같이 귀중한 취재원의 말도 흘려버리는 데 말이다. 일간지 기자들처럼 작고 세련된 녹음기 하나 장만하고픈 마음도 있다. 하지만 은혜로운 딕플에게 두 번 버림받는 상처를 줄 순 없지 않나.
금요일 오전 취재에서도 꼬물꼬물 녹음 준비를 하는 날 보며 다른 인터뷰이가 물었다. “그 하얀 앤 뭐에요?” 난 자랑스럽게 내 구세주를 그에게 소개했다. “얜 ‘딕플’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