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최근 우리 사회의 최대 화두, 사람들의 입에 가장 많이 회자되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소셜’일 것이다. ‘소셜 네트워크’, ‘소셜 미디어’, ‘소셜 커머스’라는 말들을 듣고 있노라면 이제 현대인의 학명(學名)을 ‘호모 소셜플(social+people)’로 바꿔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예전에도 ‘소셜’은 있어 왔다. 다만 오늘날과 달리 지역적으로 한계가 있었고 전파력에 있어 제약이 있었을 뿐이다. 오늘날의 ‘소셜’은 전자 매체와 통신의 발달이라는 날개를 달고 그 어느 때보다 세계 곳곳을 누비고 있다. ‘소셜’의 특정 영역 하나쯤은 자유롭게 이용하면서 관계를 맺어야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체모가 설 정도이다. 
그러나 ‘소셜’이라는 세련된 어감 뒤에서 따스한 사람 냄새가 왠지 풍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직 아날로그에 머무른 필자의 정신세계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필자는 ‘소셜’의 특성을 대량, 다수, 실리(實利)라는 단어와 연결 짓고 싶다. 블로그(Blog), 위키(Wiki), 사용자 제작 콘텐츠(UCC) 등의 ‘소셜 미디어’를 통해 사람들은 자신을 알리고 정보를 나눈다. 또한 자신의 실리를 위해선 누가 권하지 않아도 트위터, 페이스북 등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 자발적으로 정보를 확산시킨다. 굳이 사람을 만나지 않아도 네트워크가 형성되는 ‘소셜’의 시대. 특별한 감정이나 유대를 맺지 않아도 언제든지 의기투합이 되는 매체상의 사람들. 이런 ‘소셜’의 특성, 가상의 관계를 이제 한 번쯤은 따뜻한 피가 흐르는 심장으로 바라보라고 하고 싶다. 오늘의 젊은이들은 관심의 지속성보다는 일회성 호기심이 강하고 깊은 관계 형성보다는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손쉬운 연(緣)에 익숙해 있다. 단순한 친구는 물론이고 사랑이란 이름 앞에서도 마치 ‘소셜 쇼핑’을 하듯 필요에 따라 옮겨 다니는 것을 현명한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자신을 소위 ‘쿨하다’는 단어로 포장해 가면서. 
이것은 어쩌면 ‘소셜’로 특징지을 수 있는 오늘의 사회 변화에 그 원인이 일부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성장 과정 전체가 진화되는 전자 매체 앞에 고스란히 노출되는 요즘의 젊은이들에게 지금 암묵적으로 말하고 있는 ‘진지성’은 고리타분한 옛말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혹시 자신이 기계적 사고에 너무 물들어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쯤 생각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부자지간(父子之間), 사제지간(師弟之間)조차 단순한 ‘소셜 네트워크’의 하나 정도로 잠재의식이 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고 판단하면 미련 없이 다른 ‘팔로우’를 갈망하는 것은 아닌지. 
우리 조상들은 ‘묵은 것’에 대한 애정이 강했다. 된장, 고추장은 물론이고 김치마저 물러서 흐물거릴 때도 ‘묵은지’라는 애칭으로 맛있게 요리했다. 원하는 것을 얻기까지, 그것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예전의 사람들은 참 많은 공을 들여야 했다. 그렇게 얻은 것이기에 소중함은 자신 이상이었고 비록 그것이 자신의 욕구를 미흡하게 하더라도 함부로 내치지 않았다. 그들은 소유함의 가치를 알았다. 그것이 아니면 다른 팔로우가 없기에 함부로 언팔로우하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블로그를 통해 촌수를 맺을 수 없었기에 이미 맺은 인연들에 소홀하지 않았다. 시대를 거슬러 가라는 말은 아니다. 변화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거꾸로 가는 청춘은 의미가 없다. 최대한 변화를 즐기고 마음껏 활용하라. 그것이 당대를 사는 사람으로서 문명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으론 어떤 것을 끝까지 잃지 말아야 하는지, 무엇을 놓쳐서는 안 되는지 저 가슴 밑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그 소리의 울림을 ‘소셜’이라는 기계적 장치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따뜻한 감성을 통해서, 진지함이라는 깊이를 통해서. 그래야 밀란 쿤데라의 작품 이름을 피해갈 수 있지 않겠는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그 이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