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조은혜 편집장 (amy0636@skkuw.com)

카이스트의 이른바 징벌적 수업료가 연일 논란이 되고 있다. 짧은 기간 동안 4명의 학생이 극단적 선택을 했으며, 언론의 극찬을 받았던 카이스트의 학풍과 제도는 어느샌가 지탄의 대상이 됐다.

시작부터 위험했다. 학점 3.0에 미치지 못하면 0.01점당 6만 3천 원 씩 수업료를 더 내야만 하는 제도. 상대평가를 기반으로 하는 대학의 현실에서 ‘너’가 아니면 ‘내’가 반드시 수업료를 부담해야 한다. 이 제도의 가장 놀라운 것은 제도 자체가 잘못된 것임에도 그 책임은 모두 해당 학생이 져야 한다는 점이다. 추가로 금액을 부여하는 것이 모두 ‘네가 공부를 못했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합리화시킨다. 그리곤 학점, 과제, 시험과 관련한 요소 하나하나를 경쟁에 부치며 학생들을 궁지로 몰아가는 것이다.
아무리 대학이 취업 준비를 위한 곳으로 전락했다고 한들 이같이 가혹한 제도를 어떻게 생각해냈으며 어떻게 도입할 수 있었을까. 명문대 학생이 감내해야 하는 인내, 미래의 성공을 위한 과정 등 그 어떤 카이스트의 취지 설명에도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대학의 본분을 모조리 잊은 채 오로지 ‘승자독식’에만 매몰된 사회의 부정적 단면을 보여줄 뿐이다. 경쟁 자체가 나쁘다고 할 수는 없으나 공존할 수 없는 경쟁이 더 이상 어떤 의미가 있을지 참으로 의심스럽다.

사실 지금까지 유지된 것도 놀랍다. 시작했더라도 맨 처음 죽음을 택한 카이스트 학생이 나왔을 때 바로 그때 그만뒀어야만 했다. 한 명의 인재를 잃은 것조차도 정말 안타깝고 슬펐다. 그런데 놀랍게도 카이스트는 계속되는 극단적 상황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물론 자살을 결심한 4명의 학생이 그와 같은 결정을 한 이유가 전부 수업료를 부과하는 제도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언론의 과장된 보도나 추측이 컸겠지만 분명히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는 됐으리라고 생각한다. 개인의 문제에서 해결할 것이 아니라 제도 자체의 개선이 필요함이 분명해진 것이다.
4번 째 학생이 세상을 떠난 직후 카이스트의 한 학생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옆에 있는 친구를 더 잘 신경 써주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언론은 이를 카이스트 내부 자성 목소리라 풀어냈다. 명확히 이건 자성의 목소리가 아니다. 그 학생도 피해자이다. 진정한 자성은 총장을 비롯해 그 제도에 찬성표를 던졌던 교직원들이 반성하고 이를 개진하고자 하는 순간일 것이다. 카이스트 내부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부디 모두가 염원하는 반성과 쇄신이 있길 기다린다.

마지막으로 카이스트의 문제는 절대 카이스트만의 문제가 아니지 않을까. 전국 대다수의 대학교가 경쟁을 통해 명문대로 발돋움하기를 꿈꾸는 상황이 카이스트에서 더욱 과열된 제도로 드러난 것일 뿐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 학교를 비롯해 진정으로 학문을 위해 존재하는지 경쟁의 논리가 지나치게 캠퍼스를 지배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 자신부터 돌아보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