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영화

기자명 김영인 기자 (youngin@skkuw.com)

성인영화. 생각만으로도 얼굴이 벌게진다. 머릿속에서만 떠올렸을 뿐인데 괜히 잘못한 것처럼 가슴이 뛴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슬그머니 화가 나기도 한다. 성욕은 식욕, 수면욕과 함께 인간의 당연한 생리적 욕구에 포함된다고 배워놓고 생각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  때문에. 이런 당신, 대놓고 야해지고 싶지 않은가? 여러분을 위해 소개한다. 바로 ‘핑크영화)’다.

두근두근 핑크영화
핑크영화는 일본영화계만의 독특한 영화 장르 중 하나로 극장상영용 35mm 성인영화를 말한다. 제작비 3천만 원, 촬영기간 3~5일의 초저예산 소규모 영화인 핑크영화는 60분 정도의 상영시간 속에 베드신 4~5회가 들어가야 하는 규칙을 지키며 만들어진다.
1960년대 일본영화의 황금기, 메이저영화사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으려는 독립 프로덕션은 핑크영화 제작을 시작했다. 대규모 제작사의 물량공세와 ‘에로덕션’이라는 비아냥 속에서도, 핑크영화는 대단한 인기몰이를 했고 1965년에는 전체 개봉 영화의 45% 정도를 차지하기에 이른다. 어려운 제작환경 속에서도 현재까지 당당히 그 맥을 이어나가고 있다. 최근에는 관객의 대부분이 남성이었던 예전과는 달리 여성관객들도 핑크영화에 관심을 갖는 모습도 보인다.
사실 핑크영화라고 하면 성인용 비디오(Adult Video, 이하 : AV)가 먼저 떠오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핑크영화와 AV는 필름과 비디오라는 매체의 차이뿐 아니라 정사 장면의 연출방법에도 차이가 있다. 배우들의 연기로 채워지는 핑크영화와 달리 AV는 실제 성행위를 찍어 정사 장면을 만드는 것.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단순한 남성만을 위한 성행위를 보여주는 AV와 달리 핑크영화는 여성의 시각과 보편적인 이야기의 흐름을 통해 보는 이로 하여금 공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차이를 갖는다.

핑크영화, ‘핑크영화제’ 통해 국내서 꽃피다
핑크영화에 대한 국내의 관심이 높아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부담스럽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걱정도 잠시, 우리에게는 핑크영화에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통로가 있다. 바로 핑크영화제. 여성이 주체가 돼 자신의 성적 쾌락을 탐색해 나가고 성적 주체성을 가진 여성으로 진화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핑크영화들로 채워지는 이 영화제는 2007년 처음 시작된 후 지금까지 매번 색다른 주제를 가지고 다양한 분야로 나눠 진행된다.
영화제는 음지로만 숨어버릴 수도 있는 성을 공공의 대화소재로 끌어냈다. 실제로 4회 핑크영화제 서포터즈로 활동한 칼럼니스트 김현정 씨는 “영화제가 진행될수록 관객들의 연령대와 관람목적이 다양해짐을 발견할 수 있다”며 핑크영화제가 핑크영화에 대한 국내의 인식을 바꾸는데 기여했음을 밝혔다. 또한 “단순한 영화상영뿐 아니라 영화제와 함께 진행되는 다양한 부대행사들이 성에 대한 공개적 토론 자리를 만들었고 이는 성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키게 됐다”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 핑크영화제 프로그래머 주희 씨는 본지가 진행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답변을 전해왔다. 핑크영화의 국내 이식에 기여하고 있는 그녀를 만나보자.

■ 핑크영화제를 기획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한국에는 아직 본격적으로 소개 되지 않은 핑크영화를 알리고 싶은 영화사적인 의미가 가장 컸다. 또한 음성적, 이중적인 편협한 성 의식을 조금이나마 양지로 끌어올려 도가 지나치지 않은 성인들만의 놀이터로 정착시키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 핑크영화의 매력을 꼽자면
자극적인 노출이나 성행위는 핑크영화의 필수조건이지만 기본적으로 인간과 그를 둘러싼 사회의 모든 것을 주제로 삼아 이야기한다. 어쩌면 섹스라는 것은 부수적인 것처럼 보인다. 핑크영화는 성을 전면에 내세워 자신 있게 이야기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삶에 대해 공감할 수 있게 만든다.

■ 영화제에서 가장 중점을 두는 것은 무엇인가
아무래도 'only for women(온리 포 우먼)'이 아닐까? 성에 대한 보수적인 사회 관념 속에서 핑크영화를 어떻게 소개할지 고민하던 중 ‘남자들이 숨겨 놓고 보는 야동, 여자들은 핑크영화로 당당하게 극장에서 보자’고 생각했다. 여성들과 소통이 된다면 성을 삶의 일부분으로서, 양지로 끌어 올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남성시각으로 그려진 성적판타지와 행위 자체와 상황들이 주는 위화감은 있지만 그런 부분들도 안으로 속삭이지 말고 여성들끼리 담론화시켜보고자 했다.

■ 핑크영화제를 진행해 오면서 어려웠던 적이 있나
여성만을 관람 대상으로 제한한 형식을 잘못 인식해 핑크영화제를 페미니즘과 젠더의 틀로 규정지으려는 시선을 마주칠 때는 난감하다. 또한 핑크영화를 한 번도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남자들의 배설 도구인 영화를 왜 여성들이 봐야 하느냐고 무조건 부정할 때도 당황스럽다. 마치 서로 다른 종교에 관한 이야기를 하듯 이해시키기 어려운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영화제를 통해 관객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싶지 않다. 오히려 그 진행 방향을 지켜보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다.

■ 5회 핑크영화제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해 달라
아직 기획단계이고 프로그램이 수급되지 않았지만, 크리스토퍼 도일이 촬영감독을 맡은 <여자 갓빠>라는 판타지 뮤지컬 핑크영화가 단연 화제가 될 것이다. 그리고 관련된 한국 영화도 몇 작품 소개할 예정에 있다.

흥분되는 내일을 꿈꿔요
물론 핑크영화가 완벽한 이상향은 아니다. 저급한 영상에 비해 겨우 한 단계 나아진 것일 뿐 여전히 인간의 성에 대한 가치를 충분히 표현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다. 아직도 남성의 시각과 접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영화 속 여성을 남성의 성적 욕구를 해소하는 대상에 가둬두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 그 이유다.
그러나 핑크영화를 통해 우리는 꽁꽁 가려 있던 성을 건강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됐다. 당당하게 ‘밝힐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핑크영화는 영화산업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저 예산과 창작의 자유가 보장되기에 재능 있는 영화인들의 등용문이 역할을 하는 것. 실제로 영화 △<쉘 위 댄스> 수오 마사유키 △<박치기> 이즈츠 카즈유키 △<큐어> 쿠로사와 키요시 감독 등도 핑크영화로 영화계에 입문한 대표적인 감독들이다. 이렇듯 핑크영화는 성을 투쟁과 실험의 무기로 끌어올리고, 인재들이의 재능을 마음껏 펼치는 장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핑크영화는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배가 고파서 밥을 먹고, 졸리기 때문에 잠을 잔다.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고, 그 돈을 이용해 옷을 사고 집을 산다.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섹스도 한다. 다시 이별하고 나이를 먹는다. 핑크영화는 이런 살아가는 이야기다. 너도 겪고 나도 겪는 이런 이야기를 우리가 굳이 숨겨야 할 이유가 있는가. 우리 함께 쿨하게 즐겨보자. 아주 솔직한 사랑 이야기를.

<핑크영화제> 포스터. 왼쪽부터 차례대로 2007~2010년(1~4회). 핑크영화사무국 제공.

*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됐습니다. * 기사내용은 핑크영화제 사무국으로부터 도움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