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영화
    리뷰

기자명 엄보람 기자 (maneky20@skkuw.com)

텅 빈 지하철. 한 여자가 오도카니 앉아 자신에게 들이닥친 변화를 곱씹고 있다. 6년을 만난 애인이 다른 여자를 데리고 나타나 연거푸 미안하다는 말만 내뱉던 그 모습. 상념에 빠진 그녀의 어깨엔 처음 보는 남자 하나가 천사처럼 기대 잠들어 있다. 낯선 얼굴엔 아직 앳된 티가 역력하다. 가만히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여자는 열차가 종점에 멈추자 갑자기 그에게 입술을 포갠다.
28살의 직장인 토모미와 20살의 대학생 다카오. 인상적인 첫 만남 이후 두 사람의 이야기는 그저 평범한 남녀 연애사 일색이다. 통화를 하고 데이트를 즐기고 잠자리를 함께하다 어느 날 갑자기 더 이상 서로 보지 않는 그런. 하지만 영화는 묘하게 관객의 마음을 붙들고 놓아주질 않는다. 핑크영화라는 이름표를 붙인 두 사람의 솔직한 몸짓과 뜨거운 목소리는 무엇을 위한 것일까.
<OL 러브쥬스>는 뭇 여성의 사랑을 독차지한 여느 드라마들과 닮았다. 바로 여자들이 원하는 ‘어떤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하염없이 기다려주는 깜짝 마중과 보고 싶다며 첫차를 타고 달려오는 치기, 손수 정성껏 머리를 감겨주는 일 등. 토모미와 다카오는 여자들의 보편적 소망 뿐 아니라 그녀들 자신조차 몰랐던 비밀스런 로망까지 적나라하게 구사해낸다. 압도적 분위기 없이 나긋한 다카오를 만나며 토모미는 사슬이 풀려나간 듯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변해간다. 고삐가 끊어진 그녀의 입술과 혀, 손가락과 숨결은 다카오를 통째로 옭아매고 헤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슬쩍 밀려드는 통쾌함을 감출 길이 없다. 남자에게 버림받은 날 기적처럼 나타난 어린 애인에다 둘만의 은밀한 시간을 지배하는 주도권까지 덤으로 얻은 기분. 아무에게도 말 못할 부끄러운 상상과 그 사이를 메우는 섬세한 감성적 장치들은 내숭쟁이들의 가려운 곳을 대신 긁어주기에 충분하다. 운우지정이 난무하는 살색의 스크린 속에서 그간 여자를 구속하던 성역할의 구분은 시원하게 부서져 내린다.
부담 없는 관계가 지속되던 어느 날. 토모미는 어린 그에게서 진짜 사랑을 갈망하는 자신을 깨닫는다. 다카오의 아이를 가져도 괜찮다고, 둘이서 미래를 함께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런 그녀를 순간의 여자로 밖에 보지 않는 다카오는 결국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가벼운 관계에서조차 진심을 원한 여자는 결국 스스로에게 상처를 남긴다. 카메라는 다시 혼자가 된 토모미의 일상을 차례로 비춘다. 어느 가엾은 여주인공이 나오는, 어느 나쁜 남자가 등장하는 이야기처럼 영화는 그렇게 끝을 맺는 듯하다.
하지만 영화의 발칙함이 여기까지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갑자기 바뀐 화면 속, 토모미는 또다시 흔들리는 지하철에 앉아있다. 늘어지는 햇살에 졸고 있는 그녀 옆엔 어깨를 빌려주는 낯선 남자가 있다. 간간이 토모미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그는 아마도 내릴 역을 지나쳐버릴 것이다. 그리곤 열차가 종점에 다다르면 그녀에게 입을 맞출지도 모른다. 설핏 잠에서 깬 토모미는 새로 찾아온 사랑 앞에 다시 조용히 눈을 감는다. “난 아마도 운이 좋은가 보다”라는 독백을 읊조리는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핀다.
떠나간 남자를 마저 그리워하기도 전에 또 다른 사랑이 찾아오길 바라는 새하얗게 순수하지도, 새빨갛게 야하지도 않은 마음. 여자, 그들의 핑크빛 욕심과 상상은 도무지 종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