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제거술’의 현실화… 그대로 둬야 vs 필요시 지워도 괜찮아

기자명 황보경 기자 (HBK_P@skkuw.com)

고백했다 차였던 기억, 어렸을 적 당했던 교통사고, 우연히 목격한 범죄 현장… 살다 보면 여러 ‘끔찍한’ 기억이 생기기 마련이다. ‘내가 왜 그랬지’라며 후회도 해보고 잊어보려 억지로 노력해보지만 그때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기만 하다.

이럴 때 우리는 기억을 지우는 상상을 해본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는 기억을 지우는 병원이 등장한다. 주인공이 자신의 연인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며 그 병원에 찾아가자 의사들은 단지 몇 시간 만에 주인공의 머릿속에서 연인의 기억만을 골라 없애버린다. 이렇게 영화 속 주인공처럼 우리도 때로는 나쁜 기억을 지우고 싶어 한다.
이러한 상상은 이제 영화 속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실제로 우리나라를 포함한 세계 각국에서 특정 기억을 지워버리기 위한 연구가 진행 중이며 실로 대단한 성과를 내고 있다.

유오상 기자 osyoo@

기억 제어의 열쇠 쥔 단백질
기억을 지우는 기술의 핵심은 지난 2007년 우리나라 연구팀에 의해서 밝혀졌다. 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 강봉균 교수 연구팀은 뇌 안에 ‘CAMAP’라는 단백질이 장기 기억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우리가 감각한 정보는 시냅스로 연결된 신경세포들을 거쳐 뇌로 전달되는데 이때 CAMAP와 같은 단백질이 시냅스에서 세포핵으로 이동한다. 이 단백질이 세포를 오가며 기억을 담당하는 유전자가 활성화되고, 이러한 과정을 거쳐 기억이 형성된다. 실험은 커다랗고 단순한 신경망을 가진 바다달팽이를 대상으로 이뤄졌는데 단백질 CAMAP가 마치 메신저처럼 정보를 전달하면서 기억 형성과 강화에 큰 역할을 했다. 이를 토대로 하면 기억 형성과 제거의 단서가 특정 단백질의 제어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기억 형성 과정에 단백질을 이용하는 연구는 계속됐으며 지난 4월 미국의 한 연구팀은 바다달팽이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PKM’이라는 단백질을 통해 부정적 기억을 지우는 것에 성공했다. 장기기억을 형성할 때 단백질 PKM이 활성화되는데 이 단백질은 기억들 중에서도 특히 기분 나쁜 기억과 관련이 있다. 바다달팽이가 생명에 위협을 느낄 만큼 위험한 순간에 놓이면 달팽이의 신경 속에서는 상황에 대한 기억력이 강력해지며 그와 동시에 PKM이 활성화된다. 따라서 PKM을 조절함으로써 나쁜 기억을 약화시키거나 지울 수 있으며 이 원리가 인간에게 적용되면 결국 우리 뇌에서도 ‘부정적’이라고 판단한 기억을 지울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성폭행 피해자, 참전군인 등 과거의 기억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매우 희망적인 소식이다. 그뿐만 아니라 약물 중독자의 기억을 제어함으로써 중독 현상을 약화시킬 수도 있고, 반대의 원리로 기억을 강화시키면 알츠하이머 치료에도 크게 기여할 전망이다. 실제로 위 연구를 이끈 데이비드 글랜즈먼(David Glanzman)박사는 영국 일간지 <데일리 메일(Daily Mail)>의 인터뷰에서 “가까운 미래는 아닐지라도 어떤 사람의 뇌 안에서 특정 기억의 위치를 알아내 지울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 말했다. 영화 속에서만 벌어지던 ‘기억 삭제’가 실현을 앞두고 있는 것이다.

기억과 정체성, 당신의 선택은?
그러나 고통을 줄여준다는 효과가 있음에도 기억을 지우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선뜻 나설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아마 기억을 지우고 싶어 하는 사람 수만큼이나 꺼리는 사람의 수 역시 많을 텐데 이는 기억이 우리의 정체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과연 기억이 지워지면 우리의 정체성도 사라지는 것일까?

# 기억은 그 자체로 온전해야
인간의 인식에 대한 방법론에서 철학은 경험주의와 합리주의로 나눌 수 있다. 베이컨으로 대변되는 경험주의는 태초의 인간을 백지상태로 표현한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으로 백지를 조금씩 채워나가는 것이다. 이 경험주의 인식론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지식은 직접 감각한 경험을 통해서만 생겨날 수 있다. 우리가 실제로 지각하고, 행동함으로써 얻은 경험을 상기시켜낼 수 있는 것, 즉 기억해내는 것이 지식인 것이다. 앎에 관한 플라톤의 철학에서도 기억하는 것이 곧 지식이자 앎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기억이라는 과정은 우리의 지식을 구성하는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기억이 특정 교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경우도 있다. 불교와 힌두교의 핵심을 이루는 윤회사상이 이에 해당하는데 윤회란 사람이 죽으면 생전에 지은 업에 따라 몸을 바꿔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때로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이 매스컴을 통해 유명세를 얻는 것을 보곤 한다. 이 사람은 ‘전생기억’, 즉 전생을 기억해내는 것을 통해 윤회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기억은 단순히 윤회를 증명하는 것을 넘어 생에 따라 달라지는 육체의 모습과 상관 없이 우리의 진정한 정체를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이렇듯 경험주의 인식론과 윤회사상에 따르면 기억이라는 것은 고통스럽다고 해서 지워버리기보다는 좋든 나쁘든 마땅히 보유하고 있어야 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 반드시 보존해야 할 필요 없어
한편 기억의 위상이 그리 높지 않은 학문적 인식도 있다. 이를 토대로 한다면 특정 기억이 우리를 지나치게 괴롭힐 때 지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인식론과 관련한 합리주의에서는 인간이 세상을 인식하는 데에 경험이라는 후천적 요인보다는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나는 이성을 중요시한다. 대표적 학자로 데카르트를 꼽을 수 있는 합리주의적 인식론에서는 인간 내부에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이성이 지식의 본질이다.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은 항상 오류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불완전하다.
또 모든 이가 선천적으로 선한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맹자의 성선설은 올바른 판단 기준이 결국 우리의 마음속에 내재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우리의 깨끗한 마음이 특정한 경험이나 기억으로부터 오염되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 사고를 겪은 이후 차에 타는 것을 무조건 기피하는 것과 같이 특정 기억 때문에 그릇된 결론으로 도달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올바른 판단에 있어 과거의 기억이 때론 부정적 요소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기억을 지우는 것은 향후 올바른 삶을 위한 좋은 대안일 수 있다.
바다달팽이를 대상으로 시작한 실험이 인간에게 적용되기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또 인간의 기억은 여러 세포에 걸쳐 네트워크의 형식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특정 기억만을 지우기가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류가 ‘기억 삭제’를 위해 끝없이 노력한다는 것이며 이러한 노력과 함께 정말 기억을 지울 수 있는 날이 언젠간 온다는 것이다. 그러한 미래가 닥쳤을 때, 과연 당신의 선택은 어느 쪽인가? 당신의 정체성에서 기억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는 어디쯤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