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하나의 학문에서 출발해… 다시 융합으로의 회귀로

기자명 차윤선 기자 (yoonsun@skkuw.com)

고추장과 파스타. 언뜻 보기에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음식이 있다. 이 둘을 섞어 고추장 파스타를 만든다면 어떨까? 고추장의 알싸한 맛이 미끄덩한 파스타 면과 어울려 서로가 갖지 못한 부분을 채울지 혹은 극과 극인 음식이 끝내 조율점을 찾지 못한 채 입속에서 따로 놀게 될지 가늠이 가지 않는다. 그럼 이제 퓨전(fusion) 요리가 아니라 퓨전 학문, 즉 융합 학문으로 눈길을 돌려보자. 고추장과 파스타만큼이나 이질적인 인문학과 자연 과학, 이 둘은 조화로운 만남을 이룰 수 있을까?
퓨전 요리를 맛보진 않았어도 한 번쯤 들어보지 않은 이는 없을 만큼 퓨전이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꽤 익숙해져 버렸다. 전혀 다른 형식의 요리를 섞어 만드는 퓨전 요리처럼 최근 들어 전혀 다른 내용을 담은 학문이 섞이는 ‘학문 융합’ 현상에 전 세계적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학문 융합이란 각기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두 학문을 융합해 어떤 현상에 대한 시야를 넓혀 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학교에서 2006년 지능형 HCI(Human-Computer Interaction) 융합연구센터가 생기는가 하면 2009년엔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이 개원했다. 가장 최근 들어서는 정부가 인문산업융합연구소를 적극적으로 검토하는 등 우리나라 대학가 및 사회의 학술 열풍은 다름 아닌 융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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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하나의 학문에서 가지를 치기까지
그러나 최근 융합이 되거나, 되고자 하는 이질적인 학문들은 사실 한 덩어리였다. 사람들이 공부하던 것이 학문이라고 불릴 만큼 전문화됐을 때, 맨 처음 모든 것은 그저 한 덩어리의 학문이었던 것이다. 옛 철학자들의 직업이 이를 반증해 준다. 17세기 활약한 독일태생의 라이프니츠는 △물리학자이자 △수학자였고 △역사학자이면서 △신학자를 겸했던 △철학자였다. 라이프니츠 훨씬 이전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철학자이면서 정치가였다. 또 그는 시와 논리 및 윤리를 탐구하던 문학자이자, 물리 화학 생물에도 관심이 많았던 과학자였다. 물론 이와 같은 다중 직업은 지식의 깊이가 지금보다 훨씬 얕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근대 이전의 철학자들은 학문의 경계를 넘나드는 일에 거부감이 없이 자유자재였던 것만큼은 사실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각 학문이 점차 세분화됐고 한 뿌리를 가진 나무의 가지처럼 학문은 독자적인 가지를 치기 시작했다. 영국의 철학자인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학문의 진보』와 『노붐 오르가눔』에서 전체를 부분으로 분해해 이해하려는 환원주의를 암시했다. 즉, 학문의 발전을 위해 지식의 세분화를 주창했고 이후 학문의 세분화는 계속 이어져 나갔다.
학문의 세분화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경이적인 학문의 발전을 가져왔다. 학자들이 처음부터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선택해 그 길을 갈고 닦은 덕에 여러 분야의 학문을 두루 섭렵하는 것은 고사하고 한 분야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조차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 오늘날에 이르렀다. 그러나 학문이 세분화된 만큼 학문 간 장벽이 높아졌고 그 벽 또한 점차 두터워졌다. 뿐만 아니라 동일한 학문에서도 세부 영역 간에 차츰 벽이 생기고 있다. 지나친 학문의 세분화는 학문 내의 세부 전공 영역 간 소통의 부재를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것이다.


학문 융합의 르네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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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 세분화에 대한 회의감이 이는 분위기에서 최근 학문 융합 및 기술 융합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우리나라 대학가를 비롯한 세계적 학문의 큰 흐름은 다시 한 덩어리의 학문으로 회귀하려는 융합을 줄기 삼고 있다. 이에 대해 우리 학교 지능형 HCI 융합 연구 센터장 추현승(인터랙션) 교수는 한국경제와의 인터뷰에서 “페이스북 창시자 주커버그는 뛰어난 프로그래머가 아니라 ‘사업적 안목’을 지닌 프로그래머”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최근 고급기술자들의 기술 습득력 평준화로 타 분야에 대한 관심이 증가”했다면서 학문 융합이 오늘날 다시 각광 받는 이유를 설명했다. 에드워드 윌슨의 저서 『통섭』에서도 “통섭을 추구하는 일은 산산조각 난 교양 교육을 새롭게 하는 길”이라며 학문의 융합을 강조했다.
오늘날 다사다난하게 일어나는 사건들은 결코 한 분야의 한 가지 관점으로 해결될 수 없는 것들이다. △빈부격차 △인종 갈등 △환경 문제 등 사회적 이슈는 대부분 자연 과학적 지식과 인문 사회 과학적 지식이 결합되어야 비로소 균형 잡힌 해결책이 제시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학문 융합은 인류에게 밝은 미래를 제시하는 첫걸음인 셈이다.
그러나 이미 극도로 세분화된 두 학문을 융합하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것만은 아니다. 서울대학교 이건우(공학) 교수는 “융합기술에 대한 인식, 융합 기술 및 연구 인프라 부족 등이 큰 문제다. 학계 및 산업계에서 말로는 융합을 얘기하지만 실제로는 ‘융합’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라며 우려를 표했다. 융합 학문을 별개의 학문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올바른 인식이 아니라는 지적이다. 또 이 교수에 따르면 연구프로젝트 분배에서 융합 학문이 불리한 점도 학문 융합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헤쳐나갈 바른길은
윌슨은 ‘공동 지성’을 통해 학문 융합에 다가설 방법을 제시한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한 명의 천재로 예술 영역에서 모든 부분을 감당할 수 없지만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공동으로 만든 지성은 이를 가능케 할 수 있음을 역설한다. 마찬가지로 학문도 공동 지성으로 융합을 이뤄 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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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지식의 통섭:학문의 경계를 넘다』에서 최재천 교수는 “우물을 깊게 파려면 우선 넓게 파라”고 당부한다. 그는 김칫독을 묻기 위해서 딱 항아리의 지름만큼 땅을 파지 않고 더 넓게 파는 것이 당연한 것이 듯 학문도 그래야 한다고 설명한다. 이에 덧붙여 “넓게 파기 시작해야 하는데 혼자서는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답은 너무나 명확하다. 여럿이 함께 넓게 파기 시작하면 훨씬 더 깊게 팔 수 있다”면서 학문 간 융합의 방향을 제시했다. 또 『인간의 얼굴을 한 과학』에서 작가 홍성욱은 물리적 접촉 공간인 연구실의 디자인부터 융합의 분위기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말한다. “연구 공간을 디자인할 때에 서로 다른 전공이나 서로 다른 분야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쉽게 만나고 자유롭고 편한 분위기에서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은 지식의 융합을 가져올 수 있고 그 결과 창의적인 업적을 낳는 데 이바지할 수 있다”며 “의도적으로 구멍을 내지 않는 한 자동으로 소멸되지 않는다”고 덧붙여 설명하는 것이다. 
처음, 고추장은 우리 것이고 파스타는 서양 것이라는 인식에 자연히 거부감이 드는 것은 당연한 감정일지 모른다. 그러니 고등학생 때부터 크게 문ㆍ이과로 나뉘고 대학으로 진학해 전공만을 파고드는 우리나라 학자들이 학문 융합에 다가서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고추장과 파스타가 만난다는 막연한 거부감만 떨쳐내면, 고추장 파스타를 맛깔나게 만들 방법은 어디엔가 존재한다. 퓨전 요리를 맛있게 만드는 마음으로 두 학문을 한 프라이팬에 함께 요리해 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