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정미 기자 (sky79091@skkuw.com)

 지난 금요일 밤, 광화문. 저녁 8시를 조금 넘긴 시간.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KT 앞을 가득 채웠다. 저마다 촛불을 들었다. 의경들이 곳곳에 둘러 있었다. 사람들은 이날 1천 명이 됐다. 연행된 대학생들을 위한 모금은 불과 몇 분 사이에 1백만 원을 넘었다. 파워 트위터리안 모임 날라리 외부세력 선배부대와 시민, 인터넷카페에서 제공해 준 치킨은 5백 마리. 먹고 마시고 노래도 하고 춤도 췄다. 교수들과 직장인들이 지지 선언을 보내왔다. 힘겹게 토해낸 지금의 상황들 속에서 감정이 벅차오르는 누군가는 눈물을 흘렸고, 누군가는 수줍게 말을 건넸다. 사람들은 즐거워했다. 재치와 유머, 여러 문화적 코드 안에 현실과 진심이 공존했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 세상이 변할 수 있다고 믿는 건가. 아니면 이렇게라도 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기에 더욱 간절한 것일까. 트위터에서 거대 담론화된 ‘반값등록금’ 문제, 그리고 그 담론 속 정상과 비정상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는 대학사회. 그리고 갑갑한 현실에 뒤엉켜 꿈꾸기를 정지한 대학생 우리는, 떨어지는 촛농과 쌀쌀한 바람과 자꾸만 저린 다리를 모두 안고 거기에 있었다.

대학사회에 거대 이슈들이 들이닥쳤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카이스트의 징벌적 등록금제, 날치기 통과된 서울대 법인화 문제, 이제는 표퓰리즘적 반값등록금 공약까지. 하지만 이 담론들이 아직까지는 대학 깊숙이 침투하지 못했다. 많은 사람이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거나 깊게 관여하기에 거부감을 느낀다. 학기 초가 아니라도 등록금 문제는 생계와 직결된다. 수업을 받는 한 학기 내내 다음 학기 등록금을 고민한다. 누군가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등록금 얘기를 하고 싶은데 시기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런데 적정 시기가 아니라고 말하지 말라 한다. 그렇게 또 한 번 공통의 사고를 할 시간이 위축된다.

우리는 연애와 취업의 문제, 그것이 사회적 규제와 억압 혹은 잘못된 정책 때문이라고 점점 생각하지 않게 됐다. 지극히 개인의 능력 차이라고 인식하고는 체념한다. 사회문제들을 학내 진보적 모임들에서 끊임없이 제기하고 있으나 누군가는 용기가 나지 않아서, 아니면 그들만의 이야기라고 인식해서 관심 두지 않는다. 이러한 시선 탓에 사회문제에 관심 두는 것이 ‘대학생의 본분’이 아니라는 사고들은 쉽게 대학 사회에 산적한 문제들을 말할 수 없게 됐다. ‘정치적이다’, ‘이념적이다’, ‘편향적이다’라는 인식들이 ‘생존’ 그 자체와 ‘권리’의 문제를 ‘정치’, ‘이념’, ‘편향’의 관념들로 귀속시킨다. 누군가는 대학생을 지성인이라 부르지만, 지성인 담론을 현실로 끄집어내지는 않는다. 도서관에 자리를 잡지 않고 거리로 나온 대학생은 ‘반항아’ 혹은 ‘좌빨’로 그려진다. 아무튼 대학사회에 청년문화는 점점 사라지고 모호한 체념의 코드 ‘잉여’ 혹은 불안한 자기계발 ‘스펙 쌓기’가 가장 크게 자리했다.

트위터 이후로 어떤 생각들은 거대담론이 되고 트위터 안 사람들이 큰 영향을 미치지만, 현실로 돌아온 세상은 이상하리만큼 낯설다. 트위터 담론이 전체 거대 담론이 되지 않을 때가 잦다. 지극히 현실인 것 같지만 어쩌면 제대로 된 가상공간일지 모른다. 이번 집회를 다루는 많은 언론도 대학생 자체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김제동, 김여진, 고재열 등 소셜한 이들에게 더욱 집중한다. 뭔가 모르게 대학생은 빠져 있다. 논의의 핵심이 거세된 느낌을 져버릴 수 없다. 

어쩌면 학내 운동권에 대한 어떤 일련의 느낌들이 그것을 더욱 공고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너무도 투쟁적일 거라는 믿음, 크게 변하지 않는 구호와 운동, 집회 방식이 실행해야 할 사람과 지켜보거나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는 사람을 양분화시켰다. 실제로 집회 문화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는데도 여전히 인식은 그대로다. 대학사회 관련한 모든 이슈에 ‘한대련’을 비롯한 진보적 학생사회 조직이 참여하지만, 모두를 포괄하지 못했다. 대다수의 대학생을 이끌만한 무언가가 늘 부족했다. 관심 없거나 잘 모르는 학생들과는 어떻게 함께 해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하는데 모두가 공감하는 담론이 되기에는 어딘가 비어 있다. 대학사회에 산적한 문제들을 이념의 문제로만 바라보기에는 이제 한계가 있다. 사회는 변했고 의식구조도 달라졌다. 어떻게 하면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는지, 문화적 공감대를 어떻게 형성할 것인지를 고민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