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정기술, 환경ㆍ지속가능성 중요해져 최근 다시 관심… 우리나라도 첫 걸음

기자명 양명지 기자 (ymj1657@skkuw.com)

‘어린이 한 명당 노트북 한 대씩(One Laptop Per Child)’ 사업의 일환으로 보급된 노트북을 사용하고 있는 파퓨아뉴기니 Drekikir Admin 초등학교 아이들 ⓒOne Laptop per Child

소외된 이들을 위해 시작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이란 저개발국, 저소득층 주민들의 지역 조건에 맞는 기술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지역의 문화와 사회 구조, 자연환경 등 여러 조건을 고려하고 해당 지역에서 산출된 재료를 써서 지역 주민들에 의해 소비될 제품을 만드는 것이 적정기술이다. 예를 들면 △오염된 물도 즉석에서 정수할 수 있는 휴대용 정수기 빨대 △전기 없이 사는 사람들이 어디서든 독서를 할 수 있도록 제작된 이동전등 △물을 나르느라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이 물동이를 이고 지는 대신 원주형 용기에 넣고 굴림으로써 힘들이지 않고 물을 운반할 수 있는 큐드럼 △허리케인 카트리나 이후 폐허가 된 미국 루이지애나와 미시시피 지역의 잔해로 만든 가구 등이다. 이렇듯 적정기술은 최첨단 기술보다는 소박하고 원시 시대의 기초적 기술보다는 우수하다는 의미에서 ‘중간기술’로 불리기도 한다. 기술의 유지와 사용이 쉽고 투자비용과 에너지 사용량이 적으며 노동집약적이라는 점도 특징이다. 이는 대형화, 전문화를 추구하는 현대의 기술과는 여러모로 다르다.
적정기술의 시작은 인도로 볼 수 있다. 영국의 식민 지배 당시 본국의 값싼 직물이 인도로 들어와 경제를 종속화하려 하자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는 직접 물레를 돌려 실을 짓고 옷을 짓는 운동을 시작했다. 이는 비록 시간은 오래 걸리지만 누구든 필요한 만큼 옷을 만들 수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어 오늘날의 적정기술과 맞닿는 측면이 있다. 이후 간디에게 영향을 받은 영국의 경제학자 에른스트 슈마허(E. F. Schumacher)가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책을 발간함으로써 적정기술은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는 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아는 마음과 사용자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기술을 통해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며 적정기술에 대해 알리고 그 토대를 닦았다.

다시 주목 받는 기술

ⓒhoyasmeg

1970년대 미국에서는 저항과 변화의 물결을 타고 적정기술이 퍼지기 시작했지만 기득권의 정치 싸움에 휘둘려 곧 세가 꺾였다. 이런 적정기술이 전환점을 맞은 것은 2007년 뉴욕 쿠퍼 휴잇 박물관에서 열렸던 <소외된 90%를 위한 디자인> 전시회를 통해서다. 많은 디자이너들이 상위 10%의 부자를 위해 디자인하기 때문에 나머지 소외된 90%를 위한 설계가 필요하다고 역설한 이 전시회는 언론에 대서특필 됐으며 이후 많은 미국인들이 다시금 적정기술에 대해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최근 적정기술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 과학기술국제개발 포럼을 주관하고 있는 하재웅 전문위원은 “고속성장의 시대가 끝나고 전 세계적으로 환경과 지속가능개발, 빈곤퇴치가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면서 이에 잘 부합하는 적정기술이 주목을 받게 된 것 같다”고 했다. 또 제3세계에 대해 이뤄졌던 일방적인 원조가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해 지역에 맞는 기술을 보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는 것도 그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미국과 유럽에서는 적정기술에 대한 전시나 연구 활동이 활발히 이뤄지고 MIT, 스탠포드 등 대학 내에도 적정기술 관련 강의가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적정기술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수준과 연구 모두 미미한 상황이다. 환경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도 2000년대 이후로, 그 전에는 일부 환경단체들이 적정기술과 관련된 활동을 해온 것이 전부다. 그러던 지난 2008년, 국내 적정기술의 개척자라 할 수 있는 한밭대 홍성욱(화학공학) 교수가 ‘소외된 90%를 위한 공학설계 아카데미’를 개최하면서 국내에서도 적정기술이 조금씩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한밭대에 적정기술연구소가 설립되고 ‘소외된 90%를 위한 창의적 공학설계 경진대회’를 열어 대학생들의 신선한 아이디어를 모아보는 등 관심이 더욱 높아졌다.
우리나라의 적정기술 1호는 지난 2009년 굿네이버스와 ‘나눔과기술’이라는 과학자 모임이 함께 한 ‘G-SAVER’ 프로젝트이다. G-SAVER란 열효율은 높고 매연은 적은 난로로, 한겨울 추위에 떠는 몽골 주민들을 위해 제작돼 지난 해 칭길테 마을 주민들에게 전달됐다. 현재는 적정기술연구소와 시민단체 뿐 아니라, ‘과학기술국제개발’ 등 적정기술에 관심 있는 기업이나 정부 소속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모임도 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기술을 알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홍 교수는 “적정기술은 언뜻 보면 개도국 혹은 소외된 지역의 사람들의 얘기 같지만 알고 보면 그렇지 않다”며 “선진국이라 할 수 있는 일본만 봐도 자연재해 앞에서는 당장 사용할 물과 전기가 부족해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했다. 결국 적정기술은 개도국과 선진국 따질 것 없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기술인 셈이다.

근본적 삶의 변화 수반돼야
한편 적정기술은 적용 지역 주민들의 생활과 삶의 자세에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야만 실효성이 있다는 점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미국의 기술 철학자 랭던 위너에 의하면 기술은 단순한 도구를 넘어 우리의 사고와 삶의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그는 기존의 기술은 기존의 권력과 밀접한 연관을 지니므로 그 권력에 대항하지 않고서는 기존 기술의 견고한 틀을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홍 교수 역시 가치관이나 삶의 태도 변화 없이 수동적으로 기술을 수용하는 것을 적정기술의 한계로 꼽으며 “개도국의 경우 유입되는 기술을 배우려는 자세가 필요하고, 선진국의 경우에도 에너지 절약과 같은 삶의 태도 변화가 수반돼야만 적정기술도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 적정기술을 통해 당장의 문제를 해결한 뒤에는 어떤 과정을 통해 기술발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다. 물론 제3세계 사람들에게는 당면 문제에 대한 원조가 시급한 것이 사실이지만 신속한 원조만큼이나 그들의 내일을 위해서는 적정기술의 지속성도 중요하다. 적정기술과 관련해 저술한 논문에서 홍 교수는 적정기술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현대 기술의 문제점에 대한 대안으로서 탄생한 적정기술인 만큼 그것을 연구하는 데 있어 현재의 기술 발전 속도와 방향에 대한 근본적인 재고가 이뤄져야 함을 강조했다. 또 아직 국내에 적정기술이 적용된 사례는 많지 않고 그 시도도 활발하지 않아 국내의 소외된 이웃에게 필요한 기술은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도 한번쯤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늦게나마 새로운 기술에 대한 용감한 도전을 시작한 이들에게 박수를 보내며 성공적으로 연구가 이뤄져 다 같이 잘 사는 세상에 기여하기를 기대해 본다.